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4 (완전판) - 주머니 속의 호밀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4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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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사일 가능성은 눈꼽만큼도 없지."

번스도프 선생은 호언장담하더니 "물론 비공시적인 이야기지만." 하면서 뒤늦게 몸을 사렸다.

"예, 예, 이해합니다. 그런데 독살인가요?"

"응, 게다가...... 이건 정말 비공식적인 이야기인데...... 자네만 알고 있어야 해....... 어떤 독극물이 쓰였는지 내기를 해도 되겠어."

"그래요?"

"탁신이야, 이 친구야. 탁신이라고."

"탁신? 그런 독극물은 처음 듣는데요."

"당연하지. 그래서 아주 특이한 사건인 거야. 기분 좋을 만큼 특이한 사건이라고. 3~4주 전에 있었던 일이 아니면 나도 몰랐을 거야. 소꿉장난을 하던 아이들 몇 명이 주목 열매를 따가 그걸로 차를 끓였거든."

"거기 들어 있는 겁니까? 주목 열매에?"

"열매 아니면 잎에 들었지. 아주 유독해. 물론 알칼리성이고. 이 독극물이 사용된 사건은 들어본 적이 없어. 그러니 정말 흥미진진하고 특이한 사건 아닌가....... 허구한 날 제초제만 다루다 보면 얼마나 지겨운지, 닐 자네는 모를 거야. 탁신은 고마운 선물이지. 물론 내 짐작이 틀릴 수도 있으니까 절대 다른 데 옮기지는 말아 줘. 하지만 거의 확실해. 자네한테도 흥미진진한 사건이 되겠군. 일상의 변화 아닌가?"

"모두에게 즐거운 시간이라는 건가요? 희생자만 빼고?"

"그렇지, 그렇지. 희생자만 딱하게 됐지. 아주 운이 안 좋았던 거야."

번스도프 선생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고인이 죽기 전에 남긴 말이 있나요?"

"글쎄? 자네 부하 직원 하나가 공책을 들고 옆에 앉아 있었으니 자세한 건 그 사람한테 듣도록 해. 차가 어쩌고 저쩌고 했는데...... 사무실에서 마신 차 속에 뭐가 들어 있었다고 말이지.......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왜 말이 안 된다는 겁니까?"

닐 경위는 매력적인 그로브너 양이 차를 끓인 다음, 그 속에 주목열매를 넣는 장면을 곰곰이 따져 보았다. 하지만 이내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날카롭게 물었다.

"그렇게 금세 효과가 나타날 수 없거든. 듣기로는 차를 마시자마자 증상이 나타났다고 하던데?"

"그랬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금새 효과가 나타나는 독극물은 거의 없어. 예외라고 할 수 있는 게 청산가리라고...... 순수 니코틴인데......."

"그런데 청산가리나 니코틴은 분명 아니었고요?"

"이봐. 그랬다면 구급차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죽었을 거야. 청산가리나 니코틴은 분명 아니었어. 스트리크닌인가 의심하긴 했는데, 스트리크닌의 경우에는 그런 식으로 경련을 일으키지 않아. 비공식적이기는 하지만, 탁신이라는데 내 이름을 걸어도 좋아."

"시간이 얼마나 지나야 효과가 나타나는 거죠?"

"상황에 따라 다르지. 한 시간? 혹은 두세 시간? 죽은 사람을 보아하니 대식가였던 것 같던데, 만약 아침을 푸짐하게 먹었다면 그 때문에 시간이 좀 걸렸겠지."

"아침이라......."

닐 경위가 생각에 잠긴 채 중얼거렸다.

"예. 아침일 것 같네요."

"범인과의 아침 식사였던 셈이지."

 

부유한 금융 회사 사장이 출근 후 회사에서 차를 마시다가 사망한다. 죽기 전 그는 차가 이상하다는 말을 남겼고, 사인은 탁신으로 인한 독살. 현재 보톡스에 쓰이는 그 독극물이다.

 

"예. 그런데 이상한 게 한 가지 있습니다. 입고 있는 양복 주머니 속에 뭐가 있는지 봤거든요. 손수건, 열쇠, 잔돈, 지갑. 여기까지는 평범한데, 특이한 게 한 가지 있었어요. 재킷 오른쪽 주머니에 곡식이 들어 있는 겁니다."

"곡식?"

"예."

"곡식이라니? 옥수수나 보리, 뭐 그런 거 말인가?"

"예, 맞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호밀 같았는데, 제법 많이 들어 있었습니다."

 

<주머니 속의 호밀>이라는 제목만 보았을 때는, 호밀밭 근처에서 살해당했다거나 하는 그런 이야기인줄 알았다. 하지만 범인의 눈속임이었다

 

닐 경위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약 10초 동안 마플 양을 멍하니 쳐다 보았다. 처음에는 이 노부인의 정신이 나간 게 아닐까 싶었다.

"지빠귀요?"

마플 양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지빠귀."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가사를 읊었다.

"6펜스 노래를 부르자. 주머니는 호밀로 한가득.

파이로 구워진 넷하고 스무 마리의 지빠귀.

파이가 열리면 새들이 노래를 시작하지.

이건 왕 앞에 차릴 만한 진수성찬.

왕은 보물 창고에서 돈을 세고,

왕비는 거실에서 빵과 꿀을 먹고,

하녀는 정원에서 빨래를 너는데,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하녀의 코를 물었지."

"이럴 수가."

닐 경위가 말했다.

"딱 들어맞지 않나요? 그 사람 주머니에 들어 있었던 게 호밀 맞지요? 어느 신문에서 그러던데. 다른 신문에서는 그냥 곡식이었다고 했으니 쌀일 수도 있고, 옥수수일 수도 있지만, 호밀이었지요?"

닐 경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요."

마플 양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렉스 포티스큐. 렉스는 라틴어로 왕이라는 뜻이지요. 왕은 보물 창고에서, 왕비인 포티스큐 부인은 거실에서 빵과 꿀을 먹다가....... 그래서 범인이 가엾은 글래디스의 코를 빨래집게로 집은 거랍니다."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에서도 종종 등장하던 마더 구스의 노래가 또 한 번 등장한다. 미친 사람의 소행인지 아니면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운 상황. 부자 사장과 그의 아내가 사망하였고, 동기만 놓고 보면 두 아들 부부와 딸에게로 좁혀진다.

 

그녀는 조금 신경질적으로 안락의자에 앉았다. 닐은 등이 똑바르고 조그만 그 옆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예전보다 조금 더 주의 깊게 그녀의 얼굴을 관찰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여자 같았다. 그리고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기도 했다. 그런데 불안해하고, 불만이 많고, 소견이 좁아 보이지만, 간호사라는 자기 직업 세계에서는 유능하고 능숙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부잣집 도련님과의 결혼을 통해 여유를 얻었지만, 그 여우가 만족을 선물하지는 못했다. 옷을 사고, 책을 읽고, 달짝지근한 간식을 입에 달고 살았겠지만, 경위는 렉스 포티스큐가 죽은 날 밤에 소식을 듣고 몹시 흥분하던 퍼시벌 부인의 모습이 생각났고, 그 모습에서 잔인한 기쁨을 포착했다기보다 그녀의 인생을 둘러싼 권태라는 사막을 보았다. 그가 예리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녀의 눈꺼풀이 떨리더니 아래로 내리깔렸다. 긴장을 해서 그런 것 같긷 하고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어 보이기도 했는데, 둘 중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다.

 

첫번째 며느리에 대한 설명이다.

 

"그 남자가 돈 때문에 결혼한다고 생각하나요?"

"예. 할머님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가요?"

"장담하지만 돈 많은 철물점 딸, 매리언 베이츠와 결혼한 엘리스 같겠죠. 매리언은 아주 평범한 아가씨고 엘리스한테 홀딱 반했는데, 의외로 잘 살았어요. 엘리스나 이 제럴드 라이트 같은 청년은 사랑한답시고 가난한 집 아가씨와 결혼했을 때 정말 꼴불견이 된답니다. 그런 짓을 저질러다는 게 너무 짜증이 나서 부인한테 화풀이를 하거든요. 하지만 돈 많은 아가씨하고 결혼하면 부인을 계속 대접해 주지요."

 

가난한 남자와 사귀고 있는 딸의 남자친구에 대한 대화이다. 놀랍게도,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의외의 인물이 범인으로 밝혀지지만, 사실상 공범인줄도 모르고 이용만 당한 사람까지 죽었기 때문에 범인을 검거하기는 힘든 상황. 이 때 책 마지막에서 의외의 단서가 나온다.

 

추신: 버트와 함께 찍은 사진을 같이 보내요. 행락지에서 어떤 남자가 찍어서 준 거예요. 버트는 저한테 이 사진이 있는 걸 몰라요. 사진 찍는 걸 싫어하거든요. 하지만 마님도 보시면 알겠지만, 정말 잘생기지 않았나요?

마플 양은 입술을 오므리고 사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사진 속의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플 양의 시선이 홀딱 반해서 입을 살짝 벌리고 있는 글래디스의 가엾은 얼굴에서 옆 사람 얼굴로 넘어갔다. 미소를 짓고 있는 랜스 포티스큐의 까무잡잡하고 잘생긴 얼굴이었다.

이 애처로운 편지의 마지막 구절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정말 잘생기지 않았나요?'

마플 양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연민의 뒤를 이어 분노가 치밀었다. 잔인한 살인범에 대한 분노였다.

그러다 연민과 분노가 잦아들면서 승리의 기쁨이 용솟음쳤다. 턱뼈 일부분과 이빨 몇 개를 가지고 멸종된 생물은 복원하는 데 성공한 전문가가 느낌직한 승리의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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