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1 (완전판) - 히코리 디코리 독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1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홍현숙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푸아로가 등장하는 1955년 소설이다. 여성적인 매력은 전혀 없고, 유능하기로는 제일 가는 비서 레몬 양, 정확히는 레몬 양의 언니 허버드 부인이 푸아로에게 고민을 상담하게 된다. 허버드 부인은 사별한지 4년 된 과부로, 오랫동안 영국 밖에서 거주한 데다가 자식도 없다. 적적해하던 그녀는 한 하숙집의 사감이자 관리인으로 일을 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자꾸 물건이 없어지는 일이 발생한다.

 

"그럴게요. 돈이 없어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여기저기서 돈이 조금씩 없어지는 거 말이에요. 그리고 보석이 없어진다 해도 납득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거 납득할 수 있기는 커녕 그 반대랍니다. 도벽이나 좋지 않은 버릇 때문일지도 몰라요. 제가 없어진 물건 목록을 적어 왔으니 한번 보세요."

허버드 부인이 가방을 열고 작은 수첩을 꺼냈다.

파티용 구두(새 구두의 한 짝)

팔찌(모조 보석)

다이아몬드 반지(수프접시 안에서 발견)

화장용 분

립스틱

청진기

귀걸이

라이터

낡은 플란넬 바지

전구

초콜릿 상자

실크 스카프(토막토막 잘린 채 발견)

배낭(위와 동일)

붕소 가루

목욕용 소금

요리책

"별스럽군. 그리고 아주, 아주 흥미진진해."

에르퀼 푸아로가 깊이 숨을 들이쉰 후에 말했다.

푸아로는 흥미를 느꼈다. 그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레몬 양의 얼굴과 진심으로 고민하는 허버드 부인의 얼굴을 번갈아 응시했다.

"축하합니다."

푸아로가 허버드 부인에게 상냥하게 말했다.

"무슈 푸아로, 뭘 축하한다는 말씀이세요?"

허버드 부인이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이렇게 독특하고 아름다운 문제를 갖고 계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무슈 푸아로께는 이해가 가는 일인지 모르지만......."

"저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지난 크리스마스 때 젊은 친구들의 권유로 함께한 라운드 게임이 생각나는군요. '뿔 셋 난 귀부인'이라는 게임입니다. 둘러앉은 사람들이 돌아가며 '나는 파리에 가서 무엇을 샀지.'라고 말하면서 어떤 물건의 이름을 댑니다. 다음 사람이 앞 사람 말을 반복하고 나서, 다른 물건을 하나 더 추가합니다. 이 게임은 사람들이 말한 여러 가지 물건의 이름을 외워서 순서대로 나열하는 건데, 때로는 아주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말이 되고 맙니다. 비누, 흰 코끼리, 접이식 탁자 그리고 사향 오리 같은 것들이 기억나는군요. 물론 아무 관련도 없는, 그러니까 아무런 전후 관계도 없는 물건을 순서대로 외우기는 어렵습니다. 허버드 부인이 방금 제게 보여 주신 목록처럼 말입니다. 게임이 무르익어 열두 가지 사물이나 동물의 이름이 나오면, 그것을 순서대로 나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집니다. 제대로 열거하지 못한 사람은 종이로 된 뿔을 받아야 하고, 그러면 그 사람은 다음 차례가 돌아오면 '뿔 하나 난 귀부인인 나는 파리에 가서.......'라고 말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게 뿔 세 개를 받으면 게임에서 빠져야 하고,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이 승자가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큰 흥미를 보이지 않던 푸아로는 이 기묘한 사건 뒤에 뭔가가 있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하숙집을 직접 방문하여 머물고 있는 젊은이들 한 명 한 명과 각각 대화하며 단서를 찾아간다. 허버드 부인 이름이 낯설지 않은데, 그러고 보니 셜록 홈즈의 하숙집 주인 이름이 허드슨 부인이었다. 푸아로가 이야기하는 라운드 게임은 우리 나라에도 비슷한 형식으로 존재한다. '시장에 가면'으로 시작하여 한 명 한 명씩 물건을 추가해가며 나열하는 바로 그 게임.

 

"실리아, 너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싶어. 예를 들어, 어렸을 때 가정 생활이 어땠는지 등등에 대해서 말이야.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이가 좋으셨니?"

"아니, 집에 있는 게 끔찍했어."

"딱 맞아떨어지네. 그리고......."

(중략)

"우리가 현대식 사랑의 한 장면을 참관한 느낌이군요."

에르퀼 푸아로가 두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허버드 부인이 그의 말에 반박하듯 짤막한 탄식을 내뱉었다.

"우리의 시대, 우리의 삶이여! 우리가 젊었을 때, 청년들은 여학생들에게 신지학(神智學)에 대한 책을 빌려 주거나, 마테를링크의 '파랑새'에 대해 토론하곤 했죠. 그 모든 감성과 고매한 이상에 대해서 말이에요. 한데 요즘은 현실 부적응자의 삶과 콤플렉스가 청춘 남녀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되었군요."

"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허버드 부인이 말했다.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변의 논리는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콜린처럼 젊고 열성적인 학생은 콤플렉스와 피해자의 불행한 가정 생활 말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푸아로가 허버드 부인과는 다른 견해를 밝혔다.

"실리아가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더군요. 그래도 우둔하지만 상냥한 어머니와 괜찮은 어린 시절을 보낸 걸로 알고 있어요."

허버드 부인이 말했다.

"아, 하지만 실리아는 젊은 맥냅 군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을 만큼은 머리가 돌아갈 거예요! 맥냅 군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 주겠죠. 실리아는 사랑에 깊이 빠진 것 같아요."

"무슈 푸아로, 그 모든 허튼 소리를 믿으시는 거예요?"

"실리아에게 신데렐라 콤플렉스가 있다거나, 실리아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물건을 훔쳤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콜린 맥냅의 관심을 끌 목적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값이 나가지 않는 물건들을 훔쳤을 것니다. 그리고 실리아는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실리아가 예쁘장하고 수줍음 타는 평범한 여자로 남아 있었다면, 결코 맥냅 군의 관심을 끌 수 없었을 겁니다. 여자는 남자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쓸 권리가 있다고 봅니다."

푸아로가 말했다.

"그애가 그런 생각을 할 만큼 똑똑하지는 않은 줄 알았는데요."

허버드 부인이 말했다.

푸아로는 이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이 모든 사건이 암컷의 몸부림이었단 말인가요! 무슈 푸아로,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하찮은 일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시다니요. 어쨌든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되었네요."

 

지금이나 60년전이나 청춘들의 남녀상열지사는 다른 게 없어 보인다. 한 공간에 비슷한 나이와 비슷한 지적 수준의 남녀가 있을 떄, 단일한 사건만으로도 서로에게 확 끌리는 것도,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콤플렉스로 상대를 해석하려 하며, 그 결과 연민에서 애정으로 발전하는 과정과 그 모든 것을 다 염두에 두고 행동하는 것도.

 

"나이절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아요. 어렸을 때, 가정 생활이 아주 힘겨웠거든요."

퍼트리샤가 열심히 말했다.

"하느님, 맙소사, 또 시작이군!"

"뭐라고 하셨죠?"

(중략)

"나이절을 오랫동안 알고 지냈나요?"

"아뇨, 1년밖에 안됐어요. 루아르 성을 관광하다 만났죠. 그때 나이절이 독감에 걸렸다가 나중에 폐렴으로 악화되는 통에, 제가 내내 나이절을 간호해 줬어요. 나이절은 아주 예민한 사람이고 자기 몸을 전혀 돌보지 않아요. 어떤 면에서는 무척 독립적이지만, 어린 아이처럼 누군가가 보살펴 주기를 바라죠. 나이절은 자신을 보살펴 주는 사람을 간절히 필요로 한답니다."

푸아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불현듯 이 모든 사랑타령이 지겹게 느껴졌다....... 먼저 실리아가 누군가를 사모해 마지않는 눈빛을 하고 나타나더니, 이제 헌신적인 성모 마리아 같은 퍼트리샤라니. 분명 청춘남녀가 만나 짝을 이루는 사랑 이야기였다. 그는 그 모든 시기를 지나 보낸 게 다행스럽기만 했다.

 

젊은 남녀들간의 사랑만이 넘치는 이 공간에, 사소한 절도 사건으로 끝난 것 같아 보이던 이 소동은 결혼 발표를 한 다음날 실리아가 사망하면서 급변하며, 연이어 두 건의 살인이 더 일어난다. 그러면서 평범해 보이던 하숙집의 비밀이 드러나고, 의외의 인물이 범인으로 등장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살인자일 가능성이 있는 셈이군요."

샤프 경위가 느릿느릿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레너드 베이트슨은 성격이 불같아서 자제력을 잃는 경우가 있죠. 발레리 홉하우스는 머리가 좋아서 뛰어난 계략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이고요. 나이절 채프먼은 균형 감각이 없는 어린아이 같습니다. 돈이 생긴다면 살인이라도 저지를 프랑스 여학생도 있어요. 퍼트리샤 레인은 모성이 강한 여자지만, 이 유형은 언제나 무자비하지요. 샐리 핀치라는 미국 여학생은 명랑하고 쾌활하지만, 그 누구보다 꾸며 낸 역할을 잘 해낼 사람입니다. 진 톰린슨은 상당히 친절하고 정의로워 보이지만, 우리 모두 일요 성경 학교에 헌신적으로 나가는 살인자가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서인도 제도 출신의 엘리자베스 존스턴은 그 하숙집에서 생활하는 그 누구보다 머리가 좋을 겁니다. 엘리자베스는 감정을 이성의 하위에 두고 있는데, 그건 위험한 생각이지요. 게다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이유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매력적인 아프리카 청년도 있죠. 심리학자인 콜린 맥냅도 있고. '의사여, 그대 자신을 치료하라.'라는 말에 해당되는 심리학자는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무슈 푸아로, 제발 그만 하십시오.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입니다! 살인을 저지를 법하지 않은 사람은 없나요?"

"나도 그 점이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이 소설은 크리스티가 쓴 수십 편의 소설 중 상위 10%에는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기준이다. 이 소설은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대저택, 부호, 귀족, 미망인, 상속녀, 바람둥이, 팜므파탈 등 크리스티 특유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전형적인 인물과는 구성이 사뭇 다르다. 희생자도, 범인도, 하숙집 젊은이들 중 하나이며, 살해 동기는 유산이나 원한 관계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누군가를 정황상 범인으로 지목하기가 어렵고, 온전히 하숙생들의 캐릭터로만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또한 밀실 살인이나 신원 불명의 시신, 살해 도구의 실종 등 사건이 복잡하게 꼬여 있지 않고, 하숙집의 특성상 사람이 자주 드나들며, 각 인물 간의 공간 구분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복잡한 트릭을 쓰지 않아도 범인이 누구인지 짐작하기 어렵게 만든다. 전부 밝혀진 살해 동기와 수법도, 사실 알고 보면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들 답지 않게 단순하다. 즉,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바로 그런 사건들이지 소설 속에서나 볼 수 있던 형태가 아니다. 아마도 하숙집과 트렁크, 여권 등의 이야기는 실제 이 시절, 빈번하게 존재했던 범죄의 한 형태이지 않을까 싶다. 신문을 통해 사건을 접한 크리스티가 재구성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사건을 현실적이며, 인물들은 내 눈앞에 있는 것 같이 생생하다. <히코리 디코리 독>은 무슨 뜻일까 궁금했는데 크리스티 소설에서 종종 인용되는 마더 구스의 노래로, 사건이 일어나는 하숙집 주소가 히코리 가 26번지라는 것을 제외하면 큰 관련은 없다. 아마도 크리스티는 이 소설을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시간을 많이 들이지 않고 단시간내에 썼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리가 없고 산뜻하며, 소설 시작에 몰입한 그대로 멈추지 않고 끝까지 도달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