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3 (완전판) - 잠자는 살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3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윤정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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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에 출판된 이 소설은 크리스티 사후에 출간되었기에, 마플 양 최후의 소설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1973년에 출판된 <복수의 여신>이 마플 양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미 1962년 소설 <깨어진 거울>에서 그녀의 친구인 밴트리 대령이 사망한 것으로 나오는데, 여기서는 살아 있기 때문이다. 또 세인트메리미드에 대해 이야기하는 웨스트 부부가 하나의 사건만이 그곳에서 일어났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목사관의 살인>과 <서재의 시체> 사이의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1930년에서 1942년 사이에 쓰여졌다는 말이 된다. 아마도 이 소설이 제때에 나오지 않은 이유는, 크리스티 스스로 흡족하지 않은 면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고, 그렇다면 이 소설은 어떤 면에서 독자들에게 불만족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1975년에 나온 <커튼>이 실제로는 수십 년 전에 이미 쓰여진 이야기이며, 푸아로의 죽음을 다루었기에 출판될 시기를 조절한 것과는 경우가 다르다. 1976년에 사망한 크리스티가 1975년에 <커튼>을 출판한 것은 아마도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커튼>은 크리스티가 제2차세계대전 중 집필했고, 폭격을 피해 금고에 보관하였다고 하는데 자신이 만들어낸 인물에 대한 책임감이 엄청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그녀에게 몇 년만 더 허락되었더라면, 마플 양에게도 비슷한 결말이 주어졌을 수 있을 것이리라. 어쨌든 1971년 출판된 <복수의 여신>이 마플 양의 마지막이었기에, 이 소설이 1976년에 출판되었다는 사실은 전혀 의미가 없을 것이다. 1950년대에 쓰여진 소설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크리스티의 소설은 가장 날카로우며, 원숙했다.

 

레이먼드 웨스트 부부는 자일스의 젊은 아내가 환영받고 있다고 느끼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 그웬다가 그들을 보고 내심 좀 놀랐다 해도 그들의 잘못은 아니었다. 우선 레이먼드는 외모가 괴상했다. 안 그래도 활개 치는 까마귀 같은 인상인데, 머리카락은 삐죽삐죽 솟았고 갑자기 언성을 높이는 그의 이해하기 힘든 말버릇 때문에 그웬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황할 뿐이었다.

그와 조앤은 둘이서 꼭 자기들만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때까지 한 번도 학구적인 분위기를 경험해 본 적 없는 그웬다에겐 정말 낯선 체험이었다.

"그웬다, 우리와 같이 쇼를 한두 개 보러 갔다 오죠."

레이먼드가 말했다. 먼 길을 온 그웬다가 홍차였으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하며 진을 마시고 있을 때였다.

그웬다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오늘 밤에는 새들러즈 웰스에서 발레를 보고, 내일은 우리의 놀라운 능력자 제인 아주머니의 생일 축하 파티를 합시다. 길더그 주연의 「말피 공작부인」을 보러 가자고요. 그리고 금요일엔 「그들은 발 없이 걷는다」를 봐야 해요. 러시아 번역 작품인데, 지난 20년간의 공연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이지요. 위트모어 극장으로 가는 겁니다."

 

주인공인 그웬다는 신혼 부부로, 남편인 자일스는 웨스트 부부와 사촌 관계이다. 새로 이사한 집인데 마치 자신이 아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상한 기분 때문에, 충동적으로 웨스트 부부를 방문하게 되고, 함께 연극을 보다가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온다. 마플 양은 특유의 따뜻한 태도로 그웬다를 위로하며, 그웬다는 마플 양에게 처음 힐사이드 집을 보았을 때부터 시작해, 서서히 당혹감을 느꼈던 일들을 이야기한다. 나무를 새로 심어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존재를 알고 있었던 정원 길, 막아놓았던 문, 본 적도 없는데 세세한 부분까지 상상했던 그대로였던 벽지, 그리고 연극을 보면서 떠오른, 살인 사건까지. 그웬다는 마플 양의 조언을 받아 죽은 어머니의 여동생에게 편지를 보내고, 그웬다의 부모가 인도에서 만나 결혼하였고, 그웬다가 2살 때 어머니가 사망하였으며, 아버지는 영국으로 그웬다를 데리고 와 재혼하였고, 1년 후 그녀와도 헤어졌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결국, 그녀가 환각이라고 느꼈던 것은 실제 그웬다의 어린 시절에 보았던 사실들로, 아버지는 오래 전에 사망했기에 살인 사건에 대한 정확한 사실 확인을 해 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자일스와 그웬다는 마플 양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18년 전의 살인 사건을 파헤치기로 마음먹는다.

 

"정의가 잘못 실현된 경우는 없었을까요? 이 범죄의 결과로 고통 받은 사람은 없었다는 겁니까?"

"제가 아는 한은 없었어요."

"흠, 회상 속의 살인이라. 잠자는 살인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예, 제 생각을 말씀드리죠. 저라면 잠자는 살인 사건을 그대로 묻어 두겠습니다. 살인을 들쑤시는 건 위험합니다. 매우 위험할 수 있어요."

"제가 두려워하는 것도 바로 그거예요."

"살인자는 반드시 범행을 되풀이한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과 달라요. 한 번 죄를 저지르고 그것으로부터 멀찍이 물러나 절대 다시 목을 빼지 않고 조심하는 범죄자도 있지요. 그런 자가 그 뒤 내내 행복하게 산다고 말할 의도는 없습니다. 그럴 것이라고는 절대 믿지 않으니까요. 세상에 여러 가지 형태의 징벌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겉으로만은 모든 일이 평화로웠겠지요. 마들렌 스미스 사건, 리지 보든 사건이 그 좋은 예입니다. 스미스와 보든은 비록 유죄로 입증되지는 않았으나 많은 사람들은 그 여자들 둘 다 유죄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이름을 들려면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두 번 다시 범행을 되풀이하지 않았지요. 한 번의 범행만으로 바라던 것을 얻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위협을 느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는 말씀하신 살인자가 바로 그런 종류의 범죄자일 걸로 생각합니다. 그가 남자든 여자든 간에요. 그는 죄를 저지르고 보기 좋게 달아났습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의심받지 않았지요. 하지만 누가 여기저기 냄새를 맡고 돌아다닌다면? 쿡쿡 찌르고, 쑤시고, 파내어 결국엔 목표를 찾아낸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 살인범의 행동은 어떠할까요? 그저 빙그레 웃고 앉아서 수색이 점점 가까워 오기를 기다릴까요? 아니죠. 저는 무슨 뚜렷한 명분이 없는 한, 그저 내벼려 두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 당시 영국에도 공소시효가 있었을지, 있었다면 몇 년 이었을지 궁금해졌다. 영화 <살인의 추억>도 함께. 우리나라 공소시효는 15년이라 이미 영화 개봉 당시 공소시효까지 4년도 남지 않았던 상황이었고, 2006년을 기점으로 7차까지의 화성연쇄살인사건의 공소시효는 만료되었다고 한다. 이후 법이 개정되어 2008년 1월 1일부터 발생한 살인에 대한 공소시효는 25년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강력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당신의 가엾은 아이인가요?"(요양원을 배경으로 한 『엄지손가락의 아픔』에도 등장하는 말-옮긴이)

그웬다는 뒤로 팔짝 뛸 뻔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니, 아니에요."

"아, 난 혹시나 하고."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우유를 마셨다. 그런 다음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10시 30분이에요. 항상 10시 30분으로 정해져 있지요. 특이하기도 하지."

그녀는 또 다시 목소리를 낮추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소곤거렸다.

"벽난로 뒤랍니다. 하지만 내가 얘기했다고는 하지 말아요." (이 역시 『엄지손가락의 아픔』의 패러디-옮긴이)

 

1968년 출판된 <엄지손가락의 아픔>이 출판시기로는 이 책보다 먼저지만, 사실 이 책이 훨씬 더 전에 쓰여진 것이라고 추측되기에 여기에서 잠깐 사용했던 아이디어를 좀 더 발전시켜 <엄지손가락의 아픔> 에 크리스티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옮긴이의 말과는 정반대일 것 같다. 그곳에서도 요양원에 부부가 방문하는 부분이 있는데, 여기에서도 부부가 정신 병원을 방문한다. 그웬다의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곳. 그웬다는 자신이 본 살인 사건에서 목을 졸린 여자는 새어머니이며, 남자는 아버지가 아닐까 의심한다. 그러나 당시 아버지를 담당했던 정신과 의사도, 새어머니의 배다른 오빠인 의사도, 아버지가 살인자는 아니며 다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을 뿐이라고 한다.

 

살인은 실제로 일어났으며, 아버지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범인일까? 피살된 새어머니와 애정 관계가 있었던 세 명의 남자로 용의자는 좁혀지지만, 범인은 의외의 인물이었고, 아버지 또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인물은 아니었음이 밝혀진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새어머니의 인상이 완전히 바뀐다는 것. 깔끔하면서도 우아한, 마치 크리스티 자신을 닮은 듯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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