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5 (완전판) - 운명의 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75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천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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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도 이름을 한두 가지 생각해 보았지요. 그런데 비어트리스가 그러는데 아가씨는 전에 이 마을에 살던 메리 조던이라는 사람을 안다고요?"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는 들었어요. 전쟁 무렵의 일이죠. 아니, 지난번 전쟁 말고요. 그보다 훨씬 전, 그러니까 체펠린 비행선이 날아왔을 때의 전쟁 말이에요."

"체펠린에 대해서라면 나도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터펜스가 말했다.

"1915년인가 1916년에 런던을 공습했다더군요."

"내가 어느 날 작은 할머니와 함께 육해군 매점에 가 있는데 공습경보가 울리더군."

"밤에 날아오는 때도 있었다던데요? 꽤 무서웠겠어요."

"글쎄, 생각보다는 무섭지 않았어요. 모두들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 하지만 저번 세계대전 때의 비행 폭탄보다는 덜 무서웠지요. 그것은 우리가 달아나는 곳은 어디든 뒤쫓아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밤마다 지하철 역에서 지내곤 했다면서요? 런던에 친구가 있었는데 밤이면 지하철 역에 머물렀다더군요. 워렌 가에 있는 것 말예요. 모두들 자기가 찾아갈 역을 정해 놓고 있었답니다."

"나는 이번 대전 중에는 런던에 있지 않았어요. 밤새 지하철 역에 있을 걸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는데."

터펜스가 말했다.

"하지만 제니라는 이 친구는 아주 재미있었다고 했어요. 역에서 한사람씩 사용하는 계단이 정해져 있었대요. 그 계단에서 잠도 자고 샌드위치도 먹고 함께 놀고 얘기도 나눴대요. 밤새 그런 식으로 재미있게 보냈대요. 지하철도 아침까지 운행되었고요. 제 친구는 전쟁이 끝나서 다시 집으로 돌아갔는데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더래요."

"어쨌든 1914년에는 비행 폭탄 같은 건 없었어요. 체펠린 비행선 뿐이었지."

이미 체펠린 같은 것은 그웬다의 흥밋거리가 될 수 없었다.

 

1973년에 나온 소설로, 토미와 터펜스가 등장하는 마지막 소설이다. 1922년의 <비밀결사>, 1929년의 <부부탐정> 1941년의 <N 또는 M>, 1968년의 <엄지손가락의 아픔>을 이은 소설로, 이제는 70대가 되고 손자, 손녀까지 둔 노부부로, 한적한 마을로 막 이주한 상태이다. <비밀결사>는 제1차세계대전 직후였다. 토미와 터펜스가 만나게 된 것도 전쟁 때문이었다. 군인과 간호사로 만난 것이다. 정보부에서 일하며 국가와 국가 사이의 첩보전까지 확대되었던 <부부탐정>을 지나 <N 또는 M>에서 제2차세계대전을 겪었고, <엄지손가락의 아픔>에서는 전쟁이 아닌 개인적인 사건을 겪었다. 제2차세계대전을 마치 흥미진진한 소설이나 영화처럼 생각하는 세대와의 대화는, 이들이 얼마나 긴 시간을 겪어냈는지 한순간에 느끼게 한다.

 

"할로케이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지? 정말 스파이와 관련된 일이었나?"

"사실 워낙 옛날 일이라서 나도 그다지 잘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닐세. 그떄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지. 나무랄 데 없는 젊고 우수한 해군 장교에다 꼭 영국인 같았어.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어. 고용되어 있었던 거야. 누구의 지시를 받았는지 지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독일인이었던 것 같아. 1914년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말이야. 맞아, 그게 틀림없어."

"그 사건에는 어떤 여자가 관련되어 있는 것 같은데?"

"메리 조던인가 하는 여자 이야기를 들은 것 같군. 나도 확실히는 모른다네. 신문에도 났는데 아마 그 남자 아내라고 생각되네. 아까 말한 그 해군 장교 말일세. 그 여자가 러시아 사람들과 접촉해서...... 아니, 그건 그 뒤에 있었던 일이지. 자칫하면 이야기가 뒤범벅이 되어 버린단 말이야. 모두 비슷비슷한 이야기라서 말일세. 그런데 그 여자가 자기 남편의 수입이 넉넉지 못하다, 즉, 자기 실수입이 넉넉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거야. 그래서...... 아니, 그런데 이 사람아! 왜 이런 케케묵은 이야기를 다시 캐내려고 하나? 이제 와서 그게 자네와 무슨 관계라도 있나? 자네는 옛날 루시타니아 호에 탔다든가, 루시타니아 호와 함께 가라앉았다든가 하는 사람을 도와준 적이 있지?(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3권 『비밀결사』의 내용-옮긴이) 아주 오래된 이야기지만 그 사건에 자네나 자네 부인이 말려들었지?"

"둘 다 말려들었지만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 이제 완전히 잊어버렸네."

"그때도 어떤 여자가 관련되어 있지 않았나? 제인 피시인가 하는 여자, 아니 제인 왜일이었던가?"

"제인 핀이야."

"그 여자는 지금 어디서 사나?"

"미국 사람과 결혼했다네."

"흠, 그거 잘됐군. 옛날 친구들과 그때 일을 떠올리면 항상 이야기에 열을 올리게 된단 말이야. 옛날 친구들 얘기를 하다 보면 녀석들이 죽은 것을 알고 깜짝 놀랄 때도 있지만 죽지 않고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더 놀라기도 하지. 그러니 참 까다로운 세상이야."

 

머튼 촙이라는 별명을 지닌, 토미의 과거 동료와 토미와의 대화이다. 예전에 빨강 머리 톰이라고 불리던 토미는 이제 백발의 톰이 되어 버린 상태로 최근에 이주한 할로케이에 대한 이야기를 동료와 나눈다. 머튼 촙이란 양의 갈빗살을 가리키는 단어로, 위는 좁고 아래가 넓은 삼각형 모양의 구레나룻을 뜻하기도 한다고 한다. 노인이 되어서도 젊은 시절의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이야기하는 모습이 정겨웠다. 아마도 내 기억이 맞다면 제인과 그녀의 부자 사촌, 그리고 토미 베레스퍼드와 프루던스 카울리는 4각관계였을 것이다. 잠깐 서로 엇갈려서 끌리는 듯 했지만, 결국 로맨스는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그 이후로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고, 미국으로 건너간 제인 핀과 그녀의 남편의 이야기 또한 토미와 터펜스 못지 않는 장대한 스토리가 될 지도 모른다. 나는 단시간 내에 크리스티의 전집을 읽고 있기 때문에 수십년의 세월을 한 번에 느끼게 되어서 좀 아찔했지만, 오랫동안 크리스티의 소설을 읽으며 그녀와 함께 수십년의 세월을 살아온 독자들은 이 대목을 읽으면서 감개무량하지 않을까?

 

"간단히 말씀드리면 저희 내외는 새 집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신경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더군요."

"그렇겠죠. 저도 압니다. 전기 기사가 마룻바닥을 온통 차지하고 여기 저기 구멍을 뚫어 대지요. 그러면 거기에 발이 빠져서......."

"전에 살던 사람이 가지고 있던 책을 저희한테 팔고 갔습니다. 아동용 도서가 많았는데 정말 종류도 여러 가지였습니다. 헨티(영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 소년 위주의 모험 역사 소설 작가-옮긴이)라든가 그런 작가들의 작품 말입니다."

"기억 나네요. 헨티의 작품이라면 어릴 때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집사람이 읽던 책 속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글자 밑에 그어진 줄을 이어나가다 보니 하나의 문장이 되는 겁니다. 지금부터가 정말 바보 같은 이야기입니다만......."

"흠,기대가 되는군요. 엉뚱한 이야기는 언제나 듣고 싶어지더군요."

"이런 문장이 되는 겁니다. '메리 조던의 죽음은 자연사가 아니었다. 범인은 우리 가운데에 있다.'고 말입니다."

"정말 흥미롭군요. 이런 건 처음인데요. 틀림없이 그런 문장이었습니까? 메리 조던의 죽음은 자연사가 아니었다고요? 누가 그렇게 적어 놓았죠?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있었습니까?"

"초등학생 정도의 사내아이 같습니다. 파킨슨이 그 일가의 성입니다. 그 일가가 저희가 이사 간 집에 살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내아이도 아마 파킨슨 집안의 한 사람이겠지요. 알렉산더 파킨슨! 어쨌든 지금 그 아이는 그 지방의 교회 묘지에 묻혀 있습니다."

"파킨슨이라? 잠깐, 생각 좀 해 봅시다. 사건에 관련된 이름 중에 파킨슨이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이었는지까지 기억하고 있는 경우는 드물지요."

"저희 내외는 메리 조던이 누구인지 알아내려고 무척 노력했습니다."

"메리 조던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니었으니까요. 그쪽은 당신의 전문 분야인 것 같은데요. 하지만 정말 묘한 이야기로군요. 혹시 메리 조던에 대해서 알아낸 것은 없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그 지방 사람들도 별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고 그 여자에 대해 이야기해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고작 지금으로 말하자면 오페어 걸이거나 가정 교사였다고 알려 준 사람이 있었지요. 아무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맘젤이나 프로라인이라고 불렸다는 정도였죠. 완전히 두 손 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녀의 사망 원인은 뭐죠?"

"누군가가 디기탈리스 잎을 시금치와 함께 정원에서 모르고 뜯어 와서 그것을 먹은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런 정도로는 죽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죠?"

"그래요. 그 정도로는 죽지 않지요. 하지만 치사량의 디기탈리스 알칼로이드를 커피나 식전에 마시는 칵테일에 넣어 두고 그것을 메리 조던이 마시도록 했다면 디기탈리스 잎 때문에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지요. 그런데 알렉산더 파커인가 하는 학생은 그런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하고있었다는 거죠? 그밖에 알게 된 것 없습니까? 언제적 일이죠? 2차 대전, 1차 대전, 아니면 그보다 앞서 일어난 일입니까?"

"그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독일 스파이였던 모양입니다."

"그 사건이라면 알고 있습니다. 큰 소란을 일으켰죠. 1914년 이전에 영국에서 일했던 독일인은 모두 스파이라고들 했습니다. 사건에 가담한 영국인 장교는 전혀 의심을 받지 않았죠. 저는 전혀 의심을 받지 않는 사람을 유심히 살핍니다. 꽤 오래된 이야기군요. 최근에는 기삿거리도 되지 않죠. 사건 기록이 공개되어도 대중의 관심을 끌 만한 기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런 기사는 모두 개략적인 것이지요."

"예, 그럴 테지요. 그 사건은 그 무렵 도난당한 잠수함 기밀과 관련이 있었지요. 아니, 비행기에 관한 기사도 있었지. 이쪽 사건의 기사도 꽤 많았어요. 그런 것이 대중의 관심을 끌었죠. 하지만 다른 사정이 많이 있었던 겁니다. 거기에는 정치적인 면도 있었지요. 유명한 정치인들이 많이 관련되어 있었어요. 대중으로부터 정말 청렴결백한 정치인으로 인정받는 사람들 말입니다. 공직에 있는 사람으로서 청렴결백이라니 얼미도 없는 소리죠. 그러보 보니 2차 대전 무렵이 생각나는군요. 세상 소문과는 반대로 청렴결백한 면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떤 남자가 이 부근에서 살았지요. 해안 쪽에 방갈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봉자를 잔뜩 길어서는 히틀러를 추켜세웠지요. 이 나라가 살아남는 유일한 길은 히틀러와 손을 잡는 것밖에 없다면서 말입니다. 분명 그 녀석은 고결한 인물로 보였지요. 아주 훌륭한 뜻을 품고 있는 사람 말입니다. 가난, 억압, 부정 같은 것들을 근절하자고 소리 높여 외쳐댔습니다. 파시즘은 아니라고 하면서 실은 파시즘의 기수였던 것이죠. 스페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랑코를 위시한 그 일파와 손을 잡은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열변을 토하고 다닌 무솔리니도 물론 있었죠. 전쟁 직전에는 언제나 많은 간접적인 원인이 있는 겁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아무도 모르는 일 말입니다."

"모르시는 게 없는 것 같군요. 이런 말씀 드리면 무례하다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을 만나면 사실 저는 몹시 흥분이 됩니다."

"그렇군요. 사실 저는 종종 그런 일들에 관여했습니다. 원인이나 배경이 되는 문제들 말입니다. 귀를 열고 있으면 많은 얘기를 듣게 되지요. 문제에 깊이 관여하고 있어 많은 것을 아는 옛친구들한테서도 얘기를 듣게 되죠. 당신도 그런 친구를 찾아 나설 생각이겠죠?"

"예, 실은 저도 옛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자기네 옛친구들과 만나곤 하니까요. 그러는 가운데 많은 얘기를 듣게 되죠. 그때까지는 한데 묶어서 생각지 않았던 이야기도 다시 들어보게 되면 아주 흥미 있을 때도 있습니다."

"예, 이제 당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이 이런 사건과 부딪치다니 재미있군요."

"문제는 그걸 나 자신도 잘 모른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쓸데없는 일에 발을 들여 놓았는지도 모르지요. 오래 전부터 탐내던 집도 샀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집을 손보고 나서 정원을 꾸며 보려는 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제 다시는 사건이나 그런 것에 매달리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는 단지 호기심에서 이러는 겁니다. 오래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 생각하고 알고 싶은 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마찬가지지요. 여기에 어떤 목적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 일을 해 봐야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로빈슨 씨와 토미의 대화이다. 이사한 집에서 발견한 의문의 메시지를 보고 부부는 각자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은다. 터펜스가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고, 토미는 옛 동료들을 수소문한다. 로빈슨 씨는 이쪽 분야에서 일급 인물로, 그가 토미의 지인의 딸의 대부인 관계로 그를 만나게 된다.

 

"응, 그러니까 모두들 나를 찾는 것 아닌가? 연기로 숨이 막히니 어쩌니 군소리를 해 가면서도 나를 찾아오지. 그건, 그래 그 무렵이었어. 바로 그 프랑크푸르트 일당의 사건 무렵이었어.(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6권 『프랑크푸르트 행 승객』의 내용-옮긴이) 우리는 그것을 겨우 막아냈지. 사건의 배후 인물을 밝혀내어 겨우 막았던 것일세. 이번 경우에도 누군가가, 그렇다고 한 사람은 아니야. 여러 사람이 배후에 있을 걸세. 설령 배후 인물을 밝혀낼 수 없다고 해도 일의 경위는 알 수 있겠지."

 

파이커웨이 대령과의 면담이다. 로빈슨 씨도, 파이커웨이 대령도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인 1970년 <프랑크푸르트 행 승객>에서 활약한 인물로 이 소설에 나타난다. 그 소설을 읽으면서 히틀러가 사망한지 25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그 망령을 두려워하는 크리스티의 심정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는데, 이 소설에도 그 기조가 이어진다.

 

"메리 조던?"

"그래. 그 일 때문이었어."

"나도 그 일이 마음에 걸려요.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대체 현대와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요?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과거가 어떻다는 건가요? 아무 관계가 없어야 마땅해야. 지금 와서......."

"과거는 현재와 아무 관련도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야? 하지만 관계가 있어. 틀림없이 잇지. 생각지도 못할 묘한 곳이나, 설마 하고 생각할 그런 곳에서 말이야."

"과거에 원인을 두고 있는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뜻인가요?"

"그래. 기다란 사슬 같은 것이지. 당신도 가지고 있잖아. 틈새가 있고 군데군데 구슬이 달려 있는 것."

"제인 핀 사건 같은 거로군요. 우리가 젊어서 모험이 하고 싶었을 때 원하던 대로 모험을 하게 된 그 제인 핀 사건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모험을 했었지. 가끔 옛날 모험을 되돌아보면 둘 다 용케 목숨을 부지해 왔다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또 있어요. 생각 안 나요? 둘이서 손을 맞잡고 사립 탐정 흉내를 내던 일 말이에요."

"응, 그건 재미있었지. 당신, 기억 나? 왜, 그때......?"

"아니, 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하는 건 사양하겠어요. 뭐 발판으로라면 또 모르지만. 정말이에요. 하지만 여하튼 그건 좋은 연습은 되지 않았어요? 그리고 또 하나 있었죠."

"그래, 블렌킨솝 부인, 맞아?"

터펜스는 웃었다.

"네, 블렌킨소프 부인이에요. 그 방에 들어갔을 때 당신이 거기 앉아 있는 것을 봤던 일은 잊혀지지도 않아요."

"잘도 그런 뻔뻔스러운 행동을 했지, 터펜스. 장롱 뒤인가 하는 곳에 숨어들어 가서 나와 그 남자의 이야기를 엿듣다니! 그러고 나서......."

"그러고 나서 블렌킨솝 부인이라고요."

터펜스는 다시 웃었다.

"N 또는 M, 그리고 '거위야, 거위야, 어디에 갔다 왔니'잖아요."

"하지만 설마......."

토미는 잠깐 주저했다.

"설마 그런 것들이 이번 사건의 발판이 되는 건 아니겠지?"

"맞아요. 어떤 뜻으로는 발판이 되는 거지요. 로빈슨 씨도 그런 옛날 일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당신에게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어요. 뿐만 아니라 나 역시 당신 동료 중 한 사람이니까."

"당신은 틀림없이 내 동료 중 한 사람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그 일로 완전히 사정이 바뀌고 말았어요. 아이작 말이에요. 그가 살해당했잖아요? 머리를 얻어맞고, 우리 집 정원에서요."

"설마, 그 일과 관계가 있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 점을 나는 말하고 있는 거예요. 이제 지금부터는 단순한 범죄 사건을 조사한다고 생각해선 안 돼요. 과거에 대해 조사하고 과거에 누가 무슨 이유로 죽었는가 하는 점을 밝혀야 해요. 개인적인 문제가 되어 버린 거예요. 완전히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요. 아이작 영감이 죽은 것을 말하고 있는 거 말예요."

 

설령 메리 조던과 알렉산더 파킨슨의 일에 음모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것은 수십 년 전의 일이 아닌가? 하고 의문을 품을 때쯤 부부의 정원일을 도와주던 노인이 살해된다. 여기까지 소설이 도달하면 크리스티 특유의, 과거의 죄가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바로 그런 스토리로 연결되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사건은 너무나 쉽게 풀려버려 맥이 빠진다. 1973년 <운명의 문> 이후로 1975년 <커튼>, 1976년 <잠자는 살인>이 나왔지만, 뒤의 두 소설은 사실 몇 십년 전에 미리 쓴 소설이기 때문에, 사실상 크리스티가 쓴 마지막 소설이 이 소설일 것이다. 소설이 다소 헐거운 것에 불만을 표하고 싶다가도 이 소설을 쓸 당시의 크리스티의 나이가 83세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경의를 표하게 된다. 사실상 크리스티가 쓴 마지막 소설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 마을은 깨끗해졌습니다. 벌집이 완전히 제거되었거든요. 조용한 생활을 즐길 수 있는 마을로 되돌아간 겁니다. 녀석들은 베리 세인트 에드먼드 부근으로 본부를 옮겼다고 보아도 좋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끊임없이 경계하고 있으니까 전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크리스핀이 말했다.

터펜스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고마워요. 제 딸 데보라가 세 아이를 데리고 와서 이따금 묵어 가곤 하니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로빈슨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N 또는 M' 사건이 있은 뒤로 두 분은 그 사건과 관련된 아이를 양녀로 삼으셨죠? 그 『거위야, 거위야, 어디에 갔다 왔니?』인가 하는 동화책을 가지고 있던 아이 말입니다."

"베티 말이에요? 네, 대학에서 성적이 좋아 지금은 아프리카에서 원주민들의 생활상을 조사하고 있어요. 그런 일에 열중하는 젊은이가 꽤 많은가 봐요. 베티는 정말 귀여워요. 아주 행복해 보이기도 하고요."

로빈슨은 목청을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건배 하시죠. 베레스퍼드 부부의 조국에 대한 공로에 감사하는 뜻에서."

일동은 한마음이 되어서 잔을 비웠다.

"한 번 더 건배하죠. 이번에는 한니발을 위해서."

로빈슨이 말했다.

"자, 한니발!"

터펜스가 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분들이 너를 위해 건배를 해주시는 거란다. 이건 기사의 작위나 훈장을 받는 것만큼이나 멋진 일이야. 전 얼마 전에 스탠리 웨이먼의 『한니발 백작』을 읽었답니다."

"저도 어릴 적에 그 책을 읽었습니다."

로빈슨이 말했다.

"'내 형에게 상처를 주는 자는 타반에게 상처 주는 자다.'라고 했던가요? 파이커웨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니발에게 작위 수여식을 하고 싶은데."

앞으로 한 발짝 나선 한니발을 로빈슨이 관례에 따라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자 개는 꼬리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지금부터 그대를 우리 왕국의 백작에 봉하노라."

"한니발 백작, 멋지지 않니? 얼마나 마음이 뿌듯하니?"

터펜스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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