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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경제학 뒤집어 보기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7년 2월
평점 :
페미니즘을 경제학의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이 책의 도전이자
주제다.
첫번째는 의문문의 형태인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는 그대로다. 애덤 스미스씨,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이나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그들의 욕구이다’라는 당신의 주장은 이후 엄청난 영향력을 갖게 됐죠. 당신 말이 맞을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당신이 그런 주장이 펼 수 있도록, 당신이 이러한 학문적 성과를 달성할 수 있도록 당신을 돌봐 준 사람들은 어떤가요? 그들 역시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나요? 당신에게 저녁을 차려준 당신의
어머니는 이기심 때문에 그 일들을 했던 건가요?
이 책의 첫번째 논의는 애덤 스미스의 잊혀진 어머니, 그녀가 그를 위해 수행했던 일들과 관련이 있다.
애덤
스미스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이 경제학의 아버지는 거의 평생을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어머니가 집안일을 돌봤고, 사촌이 돈 관리를 했다. 애덤 스미스가 관세 위원으로 에든버러에서 일하게 되자 어머니도 함께 이사했다.
그의 어머니는 평생 아들을 돌봤지만, 저녁 식사가 어떻게 식탁에 오르는지를 논할 때 애덤
스미스가 언급하지 않고 넘어간 부분에 속해 있다. (30쪽)
애덤 스미스의 어머니 마거릿 더글러스는 26세에 애덤 스미스 1세와 결혼했다. 16세 차이가 나는 결혼이었다. 2년 넘은 결혼 생활 중에 애덤
스미스 1세는 세상을 떴고, 6개월 후 아들 애덤이 태어났다. 마거릿 더글러스는 평생 재혼하지 않았다. 불과 두 살에 불과한 애덤
스미스가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았고, 이 시점부터 마거릿은 금전적으로 아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애덤 스미스도 죽을 때까지 어머니에게 의존했다. (290쪽) 애덤의 사촌 재닛 더글러스는 평생 마거릿과 함께 애덤 스미스의 가사를 돌보았다.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경제학 최고의 유행어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는데 바로 그의 어머니와 사촌이다. 마거릿 더글러스와 재닛
더글러스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그녀들이 했던 일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들이 하루 종일 매달려
했던 수많은 크고 작은 일들은 애덤 스미스에게, 남자들에게, ‘경제적’ 판단의 틀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일’이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페미니스트인 시몬 드 보부아르의 ‘여성은 제 2의 성이다’는
세상을 정의하는 남성과 ‘그 외 인물’인 여성의 위치를 보여준다. 남성이 중심이고, 여성은 그 다음이다. 남성은 의미 있는 존재이고, 여성은 그 외를 맡을 뿐이다. 남성이 하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고, 여성의 일은 ‘그 외의 일’일 뿐이다. 의미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 (32쪽) 그렇게
오랫동안 여성이 하고 있는 일이 ‘일’로서 인식되지 않은
이유다.
남성이 노동한 결과는 측정할 수 있고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다. 여성이 노동한 결과는 보이지 않는다. 털어
낸 먼지는 어느새 다시 쌓인다. 밥을 해 먹여도 금방 또 배고파한다.
아이들은 재우면 다시 일어난다. 점심을 먹으면 설거지를 해야 한다. 설거지를 마치면 저녁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다. 이제 또 설거지를
해야 한다. (53쪽)
이것 뿐만이 아니다. 여성은
‘바깥’에서 일하느라 지친 남성들을 격려하고 위로해야
할 의무가 있다. 남성이 가지고 있지 않은 혹은 가지고 있지 않아도 괜찮다고 여겨지는 특성 — 감정, 육체, 의존성, 연대감, 자기희생, 부드러움, 자연, 예측 불가능성, 수동성, 인간관계 등 — 은 전통적으로 여성과 결부되는 것들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들은 ‘경제적 판단’에 근거했을 때, 측정되지 않는, 보이지
않는 일들이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논의는 ‘경제적
인간’에 대한 것이다. 1719년 다니엘 드포가 출간한 『로빈슨 크루소』의 로빈슨은 ‘경제적 인간’이라고 부르는 존재의 궁극적인 청사진이다.(36쪽) 자기 이익의 추구가 다른 고려 사항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자유로운
시장 속에서 개인의 특성 없이 지불 능력으로서만 평가받는 존재, 합리적이고 이성에 의해 움직이며,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나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만 움직이는 존재, 그가
바로 경제적 인간이다.
저자는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경제학적 논리’가 ‘인간 존재의 의미에 관한 거대한 담론’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80쪽) 인간의 가장 강력한 본성은 ‘이익을 거두는 것’이라는 주장 그리고 ‘경제적 인간’의 결정은 ‘합리적’이라는 ‘경제학적’ 주장만
되풀이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 모두가 합리적인 개인이라는 가정을 받아들이면 인종, 계층, 성별 등에 대한 의문은 의미 없어진다. 우리는 모두 자유로운 존재들
아닌가. 콩고에 사는 한 여성처럼 말이다. 그녀는 통조림
세 개를 얻기 위해 민병대 군인들과 성관계를 맺어야 한다. 칠레에 사는 한 여성처럼 말이다. 그녀는 과일 수확을 하며 살충제를 들이마셔 2년 후에 신경이 손상된
아이를 출산할 것이다. 혹은 모로코에 사는 한 여성처럼 말이다. 그녀는
공장에 일자리를 얻으면서 큰딸을 자퇴시키고 집에서 동생들을 돌보게 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행동이
가져오는 결과를 늘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가능한 한도 내에서 최선의 결정을 내린다.
자유라는 단어는 단어에 불과하다. 정말로 단어에 불과하다. (86쪽)
‘합리적’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주장이 경제학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설득력을
얻어갈 때, 그런 환경은 부자에게, 권력을 가진 자에게, 기업가에게 그리고 남성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85쪽: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시와 설명은 <제4장: 세상에 유일한 진리는 경제학뿐?>과
<제5장 경제학이 여성을 가뿐히 무시하는 방법들>에서 다루어진다.) 인간 관계의 근본을 ‘경쟁’이라고 여기며, 인간의
삶을 시장 가치로 높이기 위한 일련의 투자 행위로 보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이런 방식으로 전 세계를 뒤덮고 있다는 것이다. (220쪽)
애덤 스미스의 주장 뒤에 숨겨진 퍼즐은 그의 어머니 마거릿 더글러스다. 하나의 섬처럼 고립되어 경쟁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개인과 그 개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개인. 합리적 이성에 근거한 판단과 결정이 전 세계를
얼마나 불평등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설명과 고민. 주류 경제학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페미니스트적 관점이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사회 전체적으로 확산시켜야 하는 페미니스트의 임무(198쪽)를 마음에 새기며 책장을 덮는다.
아래의 문단은 이 책에서 제일 인상깊은 문단이고, 나를 다시 깨어나게 하는 생각들을 제공한 문단이다. 현대 사회를
살고 있고, 아이가 둘이며, 전업주부이고, 페미니즘과 경제학을 같이 고민하는 내게, 아래의 문단은 생각거리를
준다. 피곤하고 괴롭다. 피곤하고 괴로우며, 기대되고 설레이면 좋으련만. 현재로서는, 피곤하고 괴롭다. 지금은 그렇다.
가정 내의 엄격한 분업을 유지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성인 한 명은 가사노동에, 또 다른 한
명은 직장생활에 전념하는 것이 실제로 ‘가치 있는’ 일인가? 세상이 완전히 합리적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가족 중 성인 한 명은
모든 시간을 무보수 가사 노동에 쓰고, 다른 성인 한 명은 모든 시간을 집 밖에서 보수를 받는 노동에
쏟아붓는 것이 과연 이치에 맞는가? 누가 무슨 역할을 맡는지 따지지 않는다 해도, 이 분업 관계가 진정 효율적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아이가 열넷 정도 되고, 식기세척기가 없고, 천기저귀를 날마다 마당에 있는 커다란 솥에서 삶아야 된다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 그러나 자녀의 수가 적어진 현대 사회의 가정에서는 그다지 큰 이득을 볼 수 없는 형태의 분업이다.
또한 식기세척기의 버튼을 눌러 작동시키고 진공청소기의 먼지 주머니를 교체하는 일은 10년
내내 그 일을 전업으로 했더라도 더 숙련될 여지가 거의 없다. (6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