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부터 오늘 아침까지 읽었던 책은 은유 산문집『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이다. 나는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몇 편 읽었고, 그래서 어느 정도는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첫 두 쪽을 읽으면서 책을 두 번 덮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보다는
카를 마르크스를 공부했다’(5쪽)와 ‘나는 외동딸로 컸다’(4쪽)는
내 이야기가 아니었지만, ‘엄마가 쌀 씻는 일 한번 시키지 않았다’(5쪽)와 ‘나 스스로를 남자와 동일시하거나 남자의 승인을 기다리는 명예
남성의 존재로 만들었다’(5쪽), 그리고 ‘내가 여성성을 맞닥뜨린 건 결혼 이후다’(5쪽)는 내 이야기였다. 잠깐씩 숨을 고르고 이 책을 읽어나간다.
점심에는 친구가 보내준 명화를 감상했다. <노팅힐>.
남녀 사이에서 서로에 대한 호기심이 극에 달하는 ‘썸’ 단계는 그야말로 제일 흥미진진한 때다. 다섯 번이던가 여섯 번, ‘No’를 연발하는 줄리아 로버츠에게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질문하는, 말을 거는, 더듬거리면서 허둥대는 휴 그랜트가 너무 좋았다. 처음에 줄리아 로버츠가 나올 때 나오는 ‘She’라는 노래가 좋았고, 영화 말미에 다시 시작하자는 제안을 거절하는 휴 그랜트에게 자신을 거절한 게 좋은 선택이라고 말하며 웃는, 눈물을 글썽인 채 환하게 웃는 줄리아 로버츠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1999년
작품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 올해의 영화로 꼽고 싶다.
오후에는 『비평 이론의 모든
것』을 읽었다. 총 951쪽 중에서 27쪽까지
읽었는데, 여기까지 중에서 의미 있는 문장이라면, “이론은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는 세계를 새롭고 유익한 방법들에 따라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26쪽)” 이다. 대출 반납일까지 다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1차 목표는 <4장 여성주의 비평>까지 읽어내는 것이다.
저녁을 먹고 치우고 나서는 『파크애비뉴의 영장류』를 들었다. 잘 지었다고 소문난(?) 이 책의 부제는 ‘뉴욕 0.1% 최상류층의 특이습성에 대한 인류학적 뒷담화’이다. 저번 주에 촛불집회에 나갔을 때 교보문고에서 『PRIMATES of PARK AVENUE 』를 구입했다. 알라딘보다 2,500원이나 저렴하다는 건, <바로드림>을 한 후에 알았다. 표지색이 특이하고 예쁘다. 진도가 지지부진해서, 어제부터 이 책으로 갈아탔다.
이곳 아이들의 생활이 그저 특이한 정도라면, 엄마들 생활은 가히 괴이한 수준이다. 완벽한 특권층 여성을 지칭하는
이른바 ‘금수저녀gets’ 생활상을 나는 체험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발견한 바로는, 그녀들의 정체성은 자치회
면접이나 자녀의 명문 학교 진학 같은 어퍼이스트사이드 특유의 잔인한 통과의례를 거치며 형성된다. 그녀들이
‘맨해튼 게이샤’ 같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다. 시간과 돈이 남아도는 고학력자 여성들이 피지크 57 Physique 57과
소울사이클SoulCycle을 광적으로 추종하며 직업 대신 완벽한 몸매 가꾸기로 과시욕을 채우는가 하면,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명품(그 문화에 완전히 동화된 후, 내 경우엔 버킨 백이었다)을 손에 넣기 위해 치열한 탐색적은 벌이기도
하고, 장애인 통행권을 가진 디즈니랜드 안내원을 암암리에 고용해 합법적인 새치기를 꾀하는 방법 같은
‘내부자 정보’를 집요하게 찾아내기도 한다. (24쪽)
어떤 책이었던가. 인류
진화에 있어 ‘뒷담화’의 역할에 대해 긍정하는 문장을 읽은
것 같은데... 그녀들의 삶이 부럽지는 않지만, 조금 궁금하기도
하고. 아무튼 그런 의미로, 내게는 너무 먼 그녀들의 삶을
엿보는 즐거움에 빠져보려 한다.
금요일 밤이고, 내일은
토요일. 토요일엔 광화문. 광화문. 광장 그리고 촛불.
싸울 때마다 촛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