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원년, 우리가 갈등하는 감정의 모든 것>이 부제인 이 책은 “불확실성의 시대, 감정은 어떻게 배치되는가?”라는 질문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1. 페미보비아femiphobia
페미포비아femiphobia는 페미니즘 포비아feminisim phobia가 너무 길어서 저자가 축약한 단어이다.(23쪽) 저자는 글로벌 페미포비아가 글로벌 신자유주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시대의 고용유연화 정책으로 인해 장기간에 걸쳐 축적되는 가치가 낮게 평가되고, 헌신, 희생, 신뢰, 정직, 양육, 보살핌과 같은 가치들이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무시된다. 이윤을 창출하지 못하는 가사노동 역시 미흡한 ‘집안일’이라 여겨진다.(24절)
소비가 노동과 분리되고, 소비자와 생산자가 양극화됨으로 인해 노동자는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반면 소비자는 능력자로 비쳐지게 된다.
고용이 불확실한 시대, 한가롭게 소비하는 자아처럼 보이는 여자들은,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는 남성들의 불안한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남성이라고 하여 하나의 남성인 것은 아니므로, 일자리를 위협받는(다고 가정하는) 남성들은 자신들과 경쟁하는 여성들이 얄밉다. 그러다보니 경제적 걱정 없이 한가롭게 소비하는 자아의 이미지로 포장된 ‘된장녀’는 선망과 미움의 대상이 된다.(25쪽)
한가롭게 소비만 하는 여자들에 대한 불편한 시선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실제 여성들이 된장녀인지 아닌지는 그다지 문제 되지 않는다.(25쪽) 소비하는 여성을 ‘된장녀’로 취급할 뿐이다. 그 여성이 어떻게 일하는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다. 소비하는 행위 자체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행위 자체가 미움의 대상이 된다. 돈을 버는 남자와 돈을 쓰는 여자로 양분한다. 분노는 돈을 쓰는 여자, 돈을 쓰기만 하는 여자에게로 집중된다.
2. 『추락』
과거에는 현대 문학을 가르쳤지만 지금은 커뮤니케이션 학과에서 배울 의욕 없는 학생들을 열정 없이 가르치고 있는 데이비드 루리 교수는 자신의 강의를 듣는 여학생 멜라니 아이삭스와 관계한다.(196쪽) 멜라니의 암묵적 동의하에 이루어진 성관계였다는 게 루리의 주장이다. “어느 날 저녁, 대학 정원을 걷다가 문제의 여학생과 만났고 그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다. 에로스가 들어왔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루리는 동료 집단과 사회가 요구하는 ‘진정성 있는 고백과 사죄“를 거부하며 자기 행위가 성추문이 아니라 에로스라고 위로하면서 대학을 떠난다.(205쪽)
루리는 케이프타운 고지대의 흑인거주지에 살고 있는 딸 루시를 찾아온다. 그는 ‘동물복지연합’의 일을 돕게 되면서 동물 복지까지 주장하는 베브 쇼와 같은 페미니스트들에게 극심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모든 사람들이 선의가 지나쳐, 얼마 후에는 몸이 근질거려 밖으로 나가 강간을 하고 약탈을 하고 싶겠어. 아니면 고양이를 발로 차버리든가’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저주가 실제로 이루어진다. 세 명의 흑인 강도가 집에 침입해, 그의 딸 루시를 강간한 것이다.
루시는 백인 여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녀의 강간을 암묵적으로 사주한) 흑인 농장주인 페트루스의 세 번째 부인으로 들어가 살겠다고 말한다(207쪽). 자신의 땅을 지참금으로 가지고 페트루스의 셋째 부인이 되는 것, 그곳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며 그의 보호 아래 들어가는 것이 자신이 이 곳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행복의 조건은 무엇일까? 한 사회의 정상적 규범이 주는 특권들 즉, 결혼, 가족, 이성애 일부일처, 직장, 젠더적 특징으로서 여성다움, 돈, 지위가 있으면 가능하다. 그런 것들이 없다면 당연히 불행해야 한다. 지배담론은 그런 것들을 소유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혹은 장차 미래의 행복을 약속해 줄 것이라고 설득해왔다.... 불행유발인자들을 루시는 골고루 갖추고 있다. 그녀는 레즈비언이다. 여성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뚱뚱하다. 몸놀림이 둔하고 여성스럽지도 않다. 레즈비언인 파트너와 살고 있다. 변변한 일자리도 없이 흑인거주지의 외계인이자 주변인으로서 텃밭에서 채소와 꽃을 가꾼다.... 루시는 기존의 정상성 규범에서 보자면 ‘아무 것도 없다’는 점에서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는 존재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녀는 기존의 정상성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무너뜨린다. 그런 의미에서 루시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바닥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214쪽)
‘아무 것도 아닌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는 루시가 놀랍다. 모든 것을 상실했기에 개처럼 수치스럽다고 여겨지는 그 지점에서 자신의 의지로 ‘자율적인’ 삶을 택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치욕과 함께 살아가기로 선택했다는 바로 그 점에서 말이다.
3. 페미니즘
에 마주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할 것과 읽어야할 것이 많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푸코도, 라캉도, 프로이트도, 그냥 쉽게 길을 비켜주지 않을 것이다. 울적하다. 임옥희,라는 이름이 뇌리에 꽂혔다. 일부러 찾았던 건 아닌데, 다음 책으로 준비운동 중인 『주디스 버틀러 읽기』 역시 그녀의 책이다.
한 가지 배웠다는 뿌듯함보다는 갈 길이 멀어 아득한 이 느낌을.
여기에 남긴다.
이제 주디스 버틀러에게 간다. 더 깊은 아득함을 향해.
한 걸음.
딱 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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