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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뭐라고 - 시크한 독거 작가의 일상 철학
사노 요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7월
평점 :
사람이 살아가는데 먹는 일은 중요하다. 물론 나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결혼 15년차에 국 세 개(미역국, 된장국, 북어국)에 찌개 하나(김치찌개)를 끓일 줄 아는 주부가 할 말은 아니다. 그래도 요즘엔 이런 생각이 자주 든다. 사람에겐 먹는 게 중요하다. 같이 먹는 데서 정이 든다.
커피 한 잔 하자고 건너오라기에 털레털레 걸어 구역 식구의 집에 갔더니, 브로콜리, 감자 샌드위치에 맛있는 커피를 내려주고, 제육볶음에 무공해 갖가지 밑반찬에 기가 막힌 된장찌개, 말 그대로 진수성찬 우리집 생일상급 밥상을 내온다. 다른 말이 필요 없다. 애정과 사랑이 그대로 전해진다. 따뜻한 밥 한 그릇에 마음이 전해진다.
시크한 독거 작가 사노 요코씨의 이야기 중에 관심을 끄는 건 ‘먹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일본에서도 이제는 아침은 거르거나 아주 간단히 먹는 문화가 일반적인 듯하다. 아침마다 멸치를 우려내 된장국을 끓이고 매일 새로 배추절임을 만들던 부지런한 일본의 어머니들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아직도 그런 ‘화려한’ 아침 밥상을 받고 있는 남동생이 요코씨 집에 하루 머물러 왔다.
“된장국도 필요해?” “밥엔 된장국이지. 다른 건 필요 없어. 아무거나 괜찮아.” “반찬은?” “샐러드 같은 거 말고. 채소는 나물이면 돼.” “평소에는 뭘 먹는데?” “딱히 뭘 먹는다고 할 정도는 아닌데. 저기, 헤헤, 전갱이 구이 정도야. 정말로 특별한 건 안 먹어.” “말린 전갱이 먹을 땐 무도 갈아서 곁들여?” “누나, 그건 당연하잖아. 안 그래?” “그리고 또?” “데루코는 요리 솜씨가 없어서 낫토 정도밖에 못 만들어.” “낫토는 있어. 고명은 양파로 얹어도 되지?” “냄새나는 건 싫은데. 낫토엔 대파잖아. 쪽파는 먹어도 먹은 것 같지가 않다고. 고명은 대파 흰 부분으로 해야지. 진짜로 특별한 건 필요 없다니까.” “그리고 또?” “다시마조림 같은 게 있으면 좋지.” (99쪽)
무 채 써는 소리가 부엌에서 울려 퍼지고 멸치 우리는 냄새가 풍겨오는 아침에 차가운 배추절임과 함께 뜨끈한 밥 한 그릇을 받는다. 전갱이 구이, 대파를 얹은 낫토, 다시마조림. 아들에게 우유를 들이부은 현미 플레이크 따위를 먹였던 누나(102쪽)는 아직도 저 지방 도시 한구석에서 소박하고 수수하게, 알뜰하고 검소하게 살아가는 남동생이 ‘특별할 것 없다’는 바로 그 아침상을 계속해서 받게 되기를 바란다. 바로 이 지점. 특별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온 가족 다함께 새로 생긴 맥도날드에서 맥머핀을 먹고 나서는 배를 두드리며 행복한 아침 수면에 들어간 가족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애들아, 미안하다. 여보, 쏘리. 나는 맥머핀이 좋아요.
사노 요코. 예순을 넘긴 나이. 암에 걸린 상태이고 머리를 밀었다.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고, 치매에 걸린 엄마를 찾아가서는 가까이에 있다는 천국이 어디에 있는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착하게 살려고 하지 않고, 아직도 자신만의 고집을 버리지 않는다. 이 귀여운 할머니의 이야기는 즐겁다. 사람이 갖는 매력이다. 사람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매력 때문에 그녀의 글을 읽게 된다.
한국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뭔지 모를 쾌감도 느껴진다.
<호텔리어>의 침착하고 유능한 호텔 총지배인은, 이번에는 쾌활하고 성격 좋은 가난뱅이 젊은이가 되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가난뱅이 청년은 매일매일 활기차게 생수를 배달한다. 남자판 신데렐라 스토리로, ‘현대 그룹’ 같은 재벌가 회장 따님과의 사랑 이야기였다. 추잉 껌이 된 채 나는 또다시 절절한 행복에 빠졌다. 지금의 나를 예순여섯의 나를 이렇게나 행복하게 만드는 한국 드라마는 대체 무엇인가. 한국 드라마를 모른 채, 이 행복을 모른 채 죽었다면 나의 일생은, 아아, 그건 아마도 손해 본 일생이었으리라. 진심으로 고맙다. (125쪽)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는 드라마, 예순 여섯의 그녀를 이토록 행복하게 만들었던 그 드라마를 만드는 나라가 내 나라가 아닌가. (그렇다. 이 순간만이라도 헬조선을 잊고 싶다. 잠깐만이라도 잊자. 드라마처럼, 드라마처럼 잠깐만 잊자). 한국 드라마의 저력에 대해 동의한다. 동아시아를 넘어 아시아 지역에서는 최고라고 생각한다. 한국 드라마에는 중국이나 일본이 가지고 있지 않은 독특한 정서가 있다. 연출력도 훌륭하다. (실례: 응답하라1988) 뻔한 듯 하지만 다른 장르에서 줄 수 없는 강렬한 감동을 준다. 아시아의 많은 사람, 아시아의 많은 여자, 아시아의 많은 아줌마들에게 다른 세상에 대한 기대를, 어쩌면 터무니없을지도 모르는 환상을 심어준다. 웃게 한다. 행복하게 한다.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크기에 반해 책읽기를 시작했는데, 그녀의 다른 작품 『죽는 게 뭐라고』도 찾아 읽어보고 싶다. 암진단을 받고 죽음을 코 앞에 두었으되 삶을 삶, 그 자체로 바라보는 그녀. 늙어가는 것을 느끼고, 그러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녀. 그녀의 멈춰지지 않는 찰진 불평소리에 중독된 탓일까. 벌써부터 절로 웃음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