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쪽)
책을 추천하거나 추천받는 것 모두 한결같이 주저되는 일인데, 알라딘서재에서 소개받는 책들은 찾아 읽는 편이다. 원래 치밀한 독서 계획이 없기도 하지만, 알라딘서재에서 추천받아 읽은 책들이 연타 흥행(?)에 성공해 역시 믿을 구석은 알라딘서재~라는 생각 때문이다.
저자는 스테퍼니 스탈(Stephanie Staal). 바너드 대학을 졸업하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언론학 석사. 언론계와 출판계에서 활약하다가 결혼-임신-출산으로 프리랜서 기자로 전업. 아이를 키우며 바쁘게 살아가던 중, 잊어버린 ‘여성으로서의 삶’을 찾기 위해 대학 때 들었던 ‘페미니즘 고전’ 수업 청강. 이 책은 그녀가 도전한 ‘페미니즘 고전 독서’의 결실이다.
나는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다,는 스테퍼니 스탈의 말이다. 이 글의 첫째 줄은 “(422쪽)“인데, 사실 내가 썼던 첫 번째 글의 첫 문장은 “나는 잠을 이루지 못 했다.”였다. 내가 썼던 두 번째 글의 첫 문장은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였다. 너무 많은 생각이 들어서, 너무 많은 이야기가 있어서,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 쓰고 지우고 다 지운 후에 다시 쓰고 지우고를 반복했다.
좋은 학교를 나오고, 좋은 직장을 다니다, 좋은 남편을 만나, 아이를 낳아 키우는 야무지고 똑똑한 한 여성의 ‘페미니즘 고전 서평’이 이렇게 많은 생각을 가져다 줄지는 상상도 못 했다. 가끔은 책을 읽다 말고, 잠시 덮어야만 했는데, 그래야만 마음속 가득한 동감과 울분을 겨우 식힐 수 있었다. ‘개인적인 소회’ 정도로 읽지 말라,고 저자는 당부했지만, 사실 내 개인적인 소회 때문에 그녀의 개인적인 소회에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전업 주부가 꿈인 명문대 여학생들, 아이비리그를 졸업한 직장 여성들이 결혼이나 출산 후 일을 그만두는 현상은 1~2년 전부터 언론의 단골 소재였다. 그런데 거기서 한 술 더 떠 여대생들이 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전업주부를 목표로 세포 생물학이나 르네상스 문학 같은 과목을 수강한다는 것이 그 기사의 주요 골자였다. (108쪽)
그 기사 내용은 우리 모두를 씁쓸하게 만들었다. 여대생들이 전업주부를 꿈꾼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고작 열아홉인 그들이 불평 한마디 없이 전통적 성 역할에 안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110쪽)
결혼 이후의 삶은 결혼 전과 같지 않다. 좋은 변화와 나쁜 변화가 동시에 일어난다. 하지만, 결혼 이후의 크고 작은 변화를 넘어 삶이 근본적으로 변하는 쪽은 여자다. 결혼 이후에 여자의 삶은 급격하게 변화하고, 변해야만 살 수 있다.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생물학적 변화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가슴뭉클한 순간이 많았다. 많았다,라고 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나 스스로 내 몸을 어찌할 수 없다는 깊은 절망감에 힘들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내 인생의 가장 큰 변화라면 아이를 낳은 후에 일어났다. 자고 있는 딸아이를 안고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출산 휴가 마지막 밤, 다음날부터는 시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출근하기로 했는데, 내게는 그 밤이 그렇게도 길었다. 시설이나 모르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도 아니고, 시어머니에게, 가족에게 아이를 맡기는 데도 내 아이를 버려 두고 일하러 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다. 쌔근쌔근 곤히 잠든 아이에게 너무 미안했다.
남편이 직장생활을 하고 내가 아이를 돌보는 편이, 내가 직장생활을 계속하고 남편이 살림하며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유리한 선택임에는 확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비리그 졸업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 108~110쪽의 여대생들처럼 행동하지 않기 위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삼개월 동안 잠을 이루지 못 했다. 남편은 내게 결정하라며 공을 넘겼고, 나는 엉겹결에 받은 큰 공을 어쩌지 못해 밤마다 뒤척였다. 나는 친정과 시댁 양쪽에서 육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천혜의 환경 속에 있었다. 도와달라고 부탁드리면, 4-5년 아예 아이를 키워주실 분들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결정하지 못 했다. 잠 못 드는 밤이 계속됐다.
아이가 웃을 때 엄마의 뇌에서 생성된다는 도파민. 마약처럼 작용한다는 도파민이 모성이 한참 부족한 내 뇌 속에서도 활발히 작용해, 나는 일평생 한 번도 예상치 못한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그건 ‘엄마’라는 무거운 이름과 ‘전업주부’라는 이상한(?) 이름이었다. 아이 때문에, 오직 그 이유 때문에 일을 그만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일을 그만둔 가장 큰 이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물론 ‘아이’였다.
나는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모른다.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하려는 알라디너들 틈에 에이바님 서재에 줄을 서기는 했는데, 하이드님 서재의 ‘추천 도서 목록’을 보고서는 완전 기가 팍 죽었다.
똑같이 한국의 입시전쟁을 치르고, (똑같은 대학은 아니지만) 똑같이 대학에 입학하고, 회사에 취업하고,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같이 만든 아이를 앞에 두고 직장을 그만 두는 쪽이 ‘나’여야만 했다는게 페미니즘에 관련된 건지, 아니면 그냥 효율성을 고려한 선택이었는지 모르겠다.
사촌언니들이 모두 출가해 홀로 남은 ‘손녀’로서 ‘설거지담당’으로 낙하하지 않고, 이른바 ‘남자상’에서 밥 먹던 내가, 명절에는 친가에 먼저 가야한다고 딸애에게 말하는 것이, 말해야만 하는 것이 페미니즘과 관련된 것인지, 한국의 유교 문화와 관련된 것인지 나는 알지 못 한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여자라고 불평등한 대우를 받은 적이 없다고 믿고 살았던 내가, 결혼 후에 느꼈던 사소하지만 형태가 분명한 각양각색 불편한 감정들이 페미니즘에 관련된 것인지, 우리 부부 두 사람의 문제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제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한다. 아는 게 없으니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모르는게 무엇인지부터 알아보려고 한다. 각 잡고 제대로 한 번 붙어보자,는 식은 아닐테지만, 나름대로 알차게 공부해보고 싶다. 목표라고 한다면, 이제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하기로 단합한 알라디너님들 틈바귀에서 정박자, 기본템포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제 시작이다.
『여성의 권리 옹호』, 『각성』, 『자기만의 방』
『제2의 성』, 『가사노동의 정치학』,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성의 변증법 : 성 해방을 통한 인간 해방 역설』
페미니즘을 ‘하나’로 사고하는 것 자체가 성차별이다. 나는 숱한 사람들이 사상가들을 언급할 때 마르크스, 프로이트, 푸코, 루소, 그리고 페미니시트 식으로 나열하는 데 대해 분노를 느낀다. 남성들은 ‘개인’으로 호명하면서, 어째서 페미니즘은 한 덩어리로 간주하는가? 그러니까 마르크스 한 사람과 모든 여성이라는 식의 발상이다. (11쪽, ‘혁명보다 진화’, 정희진)
나는 결혼을 하고 어머니가 된 후에야 비로소 나이가 들수록 아는 것이 적어진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가슴 터질 듯한 사랑도 느꼈지만 미칠 듯한 좌절감도 맛보았다. 그전까지는 생각해 보지도 못한 존재의 근간을 뒤흔드는 새로운 감정이었다. 백만 가지 방식으로 아이와 연결된 어머니가 되고 나서야 페미니즘의 이상향을 현실에 접목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페미니즘을 저버릴 수도 없었다. 아이를 욕조 속에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20쪽)
모성신화를 떠받치는 기둥은 어머니는 더 이상 자신만의 야심도 호기심도 욕구도 느낄 필요가 없다는 믿음이다. (88쪽)
에드나는 끝내 자아를 포기하지 못하고 아내와 어머니라는 운명에도 완전히 빠져들지 못한다. 라티그놀레 부인에게 아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에 대해 열띤 토론이 오가는 가운데 에드나가 입을 연다. “본질적이지 않은 것은 포기할 수 있어요. 돈과 생명은 아이들에게 내줄 수 있어요. 하지만 나 자신을 내주지는 않을 거예요.” (156쪽)
나는 나를 낯선 이의 손에 맡겨야 했던 부모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했는지는 말할 수 없지만 남의 손에 자란 내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했는지는 말할 수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 중 한 분이 출장을 떠날 때마다 나는 원인 모를 고열에 시달렸다. 학교가 파한 후 빈집에 들어갈 때 귓가에 울리는 내 발자국 소리가 왠지 서글펐던 기억, 초등학교 학예회 때 꽉 찬 관중석 어디에도 부모님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 「주여 오소서」를 부를 때 느낀 외로움 등이 내가 치러야 했던 대가였다. 나는 연극이 끝난 후 무대 뒤에서 한 이웃 아주머니가 자기 자식에게 주려고 가져온 꽃다발에서 뽑아 낸 꽃 한 송이를 건네받은 적도 있었다. (238쪽)
아이를 키우려면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지 피부로 체험하고 나자 가슴에 맺혀 있던 어린 시절의 상처가 어느 정도 씻겨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아이의 기대에 찬 눈빛에 매번 녹아 내리고 마는 엄마였다. 해야 할 일들을 옆으로 밀어 놓은 채 책을 읽어 주거나 실비아가 만들었다는 노래를 들어주기 일쑤였다. 나는 아이들이 세상을 원색으로만 본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주지시켰다. 정규직을 버리고 프리랜서를 선택한 데는 다른 이성적 동기도 영향을 주었지만 사실 감정적 동기가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시간을 유동적으로 쓸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실비아가 필요로 할 때마다 옆에 있어 주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어린 시절의 나처럼 부모님의 부재로 인한 결핍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242쪽)
일과 양육이 주는 만족도가 얼마나 큰지, 두 가지가 자아실현에 얼마나 기여하는지 비교해 보려는 시도는 허울만 그럴듯할 뿐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두 가지가 서로 다른 종류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인쇄되어 나온 내 이름을 보는 경험과 실비아의 무용 발표회를 보는 경험은 서로 비교할 수 없다. 어느 한쪽이 월등히 더 좋거나 더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두 가지가 서로 다른 욕구에 부응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워 본 사람이라면 내 말에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도 언론은 ‘직장 맘 대 전업 맘 전쟁’ 같은 자극적 기사들을 내보내면서 그런 중요한 차이를 언급하지 않은 채 오만하게 넘어가 버린다. (2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