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굳이~~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는 굳이~ 이런 걸 좋아라 한다.
1.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이고 최근 책에서 많이 사용되는 사진이기도 하다. 지적인 표정, 감출 수 없는 화끈한 대머리, 당당히 팔짱 낀 모습에 ‘작가님’ 포스 폭발.
2.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필립 로스의 사진이다. 『포트노이의 불평』에서 읽었던 유대인의 ‘코’에 대한 묘사를 다시 한 번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그런 사진.
3.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진이다. 비교적 최근 사진이라고 여겨지는데, 사진기자가 필립 로스 안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1. 『전락』
북플 ‘읽고 있어요’ 책장 속, ‘좋아요’ 4개에 빛나는 『전락』이다.
미국 고전극 최후의 가장 뛰어난 무대 배우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던 액슬러에게 생긴 일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연기를 할 수 없었다. 한때 관객의 시선을 무대에 못박아두던 그런 연기를 말이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연극계에서 그보다 더 철저하고 쉼없이 연구하고 신중한 사람은 없었고, 자신의 재능을 그보다 더 잘 관리한 사람도 없었으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연극계 환경에 그보다 더 잘 적응해온 사람도 없었다. (19쪽)
하지만, 그는 연기에 대한 모든 것을 잃어버렸고, 그의 몰락에 실망한 아내는 그를 떠났다. ‘날카로운 물건들’을 맡기고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치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온 에이전트 제리가 그를 찾아와 무대로 돌아오기를 종용했지만, 그는 그럴 수 없노라 거절했다. 다시는 예전처럼 할 수 없다고, 액슬러는 말했다.
그녀가 그곳에 오기 전, 그는 자신이 끝장났다고 확신했었다. 연기 생활도, 여자관계도, 인간관계도 끝났고, 행복과도 영영 이별이라고. (55쪽)
그에게 삶의 의미를 되찾아준 여인은 페긴. 액슬러는 페긴이 태어나기 전부터 페긴의 부모와 친한 친구 사이였고, 갓난아기 때부터 그녀를 보아왔다. 말 그대로 엄마 품에 안겨 처음 젖을 빠는 모습도 보았었 사이이다.
노년의 액슬러를 찾아온 페긴은 40대의 육감적인 여인 그 자체였고, 액슬러가 누구와 살고 있는지 보러 왔다는 페긴과 스스럼없이 그녀에게 키스하는 하는 액슬러는 한 집에 살게 된다.
내 의문은 이런 거다. (답을 알면 참 좋을텐데, 내게는 오직 의문뿐이다.)
그의 절망, 연기생활도, 여자관계도, 인간관계도 이제 모두 끝이라는 그의 절망은 젊은 여자와의 결합으로 이리도 쉽게 극복될 수 있는가. 열여섯 살짜리 사내아이도 입지 않을 듯한 옷을 입고 나타난 그녀에게 치마, 블라우스, 벨트, 재킷, 구두, 스웨터들을 사주며 그녀를 새로운 사람으로 변신시키는 것이 그의 진정한 부활을 의미하는가(68쪽). 그를 소생케 한 사랑의 힘이라는 건, ‘성적 결합’, 오직 그것만을 지시하는가.
나는 이 책을 ‘서울과학관’에서 과학 지식을 알려주는 다른 부스를 모두 뒤로 하고 ‘배구게임’에 푹 빠져, 그 자리를 지나가는 모든 남녀 어린이들과 ‘배구 게임’을 벌이는 어떤 아이를 지켜보며 읽었다. 중간 중간, 책을 덮을 수 밖에 없었고, 오늘은 조금 바빠서 생략하고 지나가지만, 필립 로스의 여타 책 중에서 야한 것으로만 판단해 둘째가면 서러워할 정도의 섹스신에 ‘어이, 참~~’을 연발했다.
『혼자 책 읽는 시간』에서 보았던 이런 문장이 생각난다.
우리가 좋아하여 읽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다. 어떤 책을 좋아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 책이 우리 자신의 어떤 면모를 진정으로 나타내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131쪽)
『전락』을 좋아한다고 말한다면, 그 책이 좋았다고 말한다면, 그 책은 내 자신의 어떤 면모를 보여준다는 말이다. 내가 그런(?) 부분을 좋아해 찾아 읽은 것은 아니라 해도, 그 자체로도 그 책, 그 책의 선택 자체는 나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고, 여기는 어디인가.
2. 『울분』
『안나 카레니나』의 첫문장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에 못지않을 만큼 인상적인 첫 문장을 가진 소설이 여기 있다.
1950년 6월 25일 소련과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지원으로 무장한 북한의 정예 사단들이 38도 선을 넘어 남한으로 들어가면서 한국전쟁의 고통이 시작되었고, 나는 그로부터 두 달 반 정도 뒤에 뉴어크 시내에 있는 작은 대학 로버트 트리트에 입학했다. (13쪽)
아시아 끝자락에서 일어난 예기치 전쟁 때문에 언제 징집될지 몰라 불안에 떨던 유대인 청년 마커스. 성인이 된 뒤로 자신에게 더욱 더 집착하는 아버지를 피해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에 입학한다. 징집에 대한 두려움과 아버지의 집착, 유대인으로서의 부담감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마커스 안에서 예상 외의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마음에 가득찬 울분, 그 울분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기에 마커스는 너무 순수하다. 아니, 그는 너무 젊다.
『울분』을 읽으면서 내가 찾은 문장이다. 외모에 대한 필립 로스의 묘사는 그리 특별한 것이 없는데도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다. 아니다. 특별하다. 그의 문장이 특별하기 때문에 마음을 끈다. 의미심장한 문장들이다. 의미심장한 문장들 뿐이다.
도대체 진화의 원리는 무슨 생각으로 백만 명 가운데 한 명만 내 앞에 서 있는 이 아이처럼 만들어놓은 것일까? 다른 모든 사람이 자신의 불완전함을 돌아보게 한다는 것 외에 이런 잘생긴 외모가 무슨 역할을 한단 말인가? 나도 외모의 신에게 완전히 버림받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이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이 제시하는 가혹한 기준에서 보자면 상대적으로 평범해질 수밖에 없었다. 마치 내가 기형으로 전락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일부러 그를 보지 않으려 했다. 그의 이목구비는 완벽했으며, 그의 생김새는 사람을 초라하게 만들고, 수치스럽게 만들고, 그래서 의미심장했다. (48쪽)
이름은 인간의 이름이군. 나는 생각했다. 검은 눈은 섬광처럼 빛나고 턱에는 세로로 깊숙하게 선이 새겨져 있고 물결치는 검은 머리는 투구처럼 보이는 아이가 어떻게 그런 이름을 가질 수 있을까? 게다가 말까지도 자신만만하게 거침없이 잘하는데. (49쪽)
3. 『네메시스』
2012년 절필을 선언한 필립 로스의 마지막 책이다,라고 출판사에서는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던데, 필립 로스의 소설 30여권 중에서 이번에 번역된 『네메시스』가 열 두어번째 책인것 같아 앞으로도 번역을 통해 더 많은 필립 로스의 책을 읽을 수는 있을 테다.
딱! 한 권 남았다고, 교보문고를 방문해서 얻는 즐거움인 ‘바로드림’도 포기하고, 구입해온 책 『NEMESIS』를 쳐다본다. 반쪽만 읽어서 이해가 안 되는 것인지, 반쪽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는 이 찰나, 『네메시스』의 출간을 기뻐한다.
나 하나만을 위해서는 아니었겠지만, 타이밍 한 번 기막히다.
문학동네 여러분, 수고 많으셨다.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