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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한 마음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116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유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평점 :
사랑은 함께 있을 때는 기쁨을, 반대로 떨어져 있을 때는 슬픔을 가져다주는 감정이다. 이에 반해 연민은 남의 불행을 먹고사는 서글픈 감정일 수밖에 없다. ... 결국 연민을 계속 품고 있으려는 사람은 상대방이 계속 불행하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강신주의 감정수업], 203쪽)
안톤 호프밀러는 케케스팔바 성으로의 방문이 즐거웠다.
난생처음 나보다 계급이 높은 상관이 계급을 의식하지 않은 채 나를 대해주었다. 그는 내게 부대 생활에 만족하는지, 진급 가능성은 어떤지 등을 물어보았고, 빈에 오거나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자신을 찾아오라고 말해주었다. (63쪽)
일개 장교에 불과한 자신이 상류층의 사람들과 격의 없이 편안하게 어울리고, 전에는 들어보지도 못했던 진귀한 음식들을 대접받았을 때, 호프밀러는 행복했다. 마음속으로는 끊임없이 감탄을 자아냈고, 이런 호화로운 생활을 상상할 수도 없는 자신의 친구들을 떠올리며 뿌듯해했다. (64쪽)
그 뿐이 아니다.
매일 오후 나는 여러 마리의 암탉을 거느린 수탉처럼 두 여자 사이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밝고 여성스러운 목소리에 몸이 노곤노곤해지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끼며 나는 난생처음 젊은 여인들과 있으면서도 전혀 움츠러들지 않는 나의 모습을 즐겼다. (72쪽)
케케스팔바 성에 속해 있을 때,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느꼈다. 수염이 덥수룩한 거친 남자 동료들 대신에 아름다운 여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에게 케케스팔바 성은 황홀경이다. 지옥 아닌 천국, 지상 아닌 낙원, 케케스팔바 성과 부대, 호프밀러는 그렇게 서로 다른 두 개의 세계를 겹쳐서 살고 있었다.
케케스팔바는 마치 어린아이나 여자를 쓰다듬듯이 아주 부드럽고 수줍게 내 팔을 어루만졌다. 이 수줍은 손길에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깊은 애정과 감사가 담겨 있었다. 그 안에서 느껴지는 깊은 행복감과 절망감이 또 다시 나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67쪽)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 자신이 뭔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 지구상의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확신(68쪽), 희망 없는 에디트에게 자신이 환희와 기쁨을 선사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에 호프밀러는 계속해서 케케스팔바 성을 방문한다.
하지만, 술집에서 만난 친구들의 조롱 때문에 호프밀러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케케스팔바 성을 방문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자신은 다른 사람을 ‘돕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친구들은 자기를 그저 부자들의 환심이나 사고 저녁식사비를 아끼고 선물이나 받을 요량으로 그 화려한 저택에 드나들고 있다(85쪽)고 생각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호프밀러는 자신의 선한 의도가 그렇게 이해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다음날, 그는 아무런 연락 없이 매일 방문하던 케케스팔바 성에 가지 않는다.
케케스팔바 성은, 케케스팔바 성 전체는, 그 곳의 모든 사람들은 그를 기다린다.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결국에는 그를 찾는 사람이 그가 죽치고 있던 카페 근처까지 오게 된다. 무심한듯 하지만 사뭇 진지한 초대 때문에 호프밀러는 다음날 케케스팔바 성을 방문하겠다고 약속한다. 그 다음날, 어설프게 핑계거리를 찾던 호프밀러의 거짓말은 ‘연민으로서는 찾아오지 말라’는 에디트의 솔직함 앞에서 떨어진 낙엽처럼 초라하게 굴러다닌다.
소설 첫 장에서, 호프밀러는 말한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어디까지가 나의 단순한 실수이고 어디서부터 나의 죄가 성립되는지 그 경계를 구분 짓지 못한다. 아마 앞으로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19쪽)
영 모르겠다니, 내가 알려준다. 호프밀러의 단순한 실수가 죄로 변용되는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바로 이 지점부터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연민으로써 자기를 찾아오지 말라는 에디트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은 것, 그것이 그의 실수다. 자신에게 희생하지 말라는 에디트의 말을 주의깊게 듣지 않았던 것, 그것이 그의 잘못이다. 자신을 동정하지 말라는 에디트의 말의 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 그것이 그의 죄다. 바로 이 지점부터, 호프밀러는 ‘연민’의 감정을 ‘우정’으로 위장한 채, 케케스팔바 성을 방문한다. 그와의 모든 시간을 한없이 소중히 여기는 에디트의 본심을 까마득히 모른 채 말이다.
케케스팔바 성에서 한 발짝 발을 빼려 했던 호프밀러는 오히려 콘도어 박사에게 에디트의 병에 대한 진척 여부를 물어봐 주기로 케케스팔바씨와 약속한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케케스팔바의 가장 중요한 문제에 접근해간다. 케케스팔바씨의 딸이자 케케스팔바성의 진정한 주인, 불쌍한 소녀 에디트의 삶 속으로 그렇게 걸어 들어간다.
자신의 진실한 사랑을 상대방이 연민으로 대하고 있음을 알게 됐을 때, 그것만큼 불행한 일이 있을까. 에디트에 대한 연민으로 호프밀러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쾌유를 기원하고, 회복 후 그녀 앞에 펼쳐질 밝은 미래를 기약한다. 그는 그녀를 돕기 원했다. 그는 그녀에게 희망을 주고, 그녀를 격려해 주고, 그녀를 칭찬해 주었다. 그녀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와 체스게임을 두고, 그리고 그녀와 식사를 했다.
그는 그것이 그녀를 돕는 일이라 생각했다. 에디트, 아름다운 소녀이자 성숙한 여인, 불구의 몸이나 날개처럼 가벼운 사람. 어쩌면 그녀는 그에게 신비롭게 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연민은, 호기심은, 그리고 희생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랑은 그렇게 쉽지 않다.
호프밀러는 누군가를 사랑하기에는, 혹은 누군가에게 사랑받기에는 아직 나약한 사람이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솔직히 직면하는 에디트와 비교하면 그의 나약함은 더욱 두드러진다. 그는 결정을 번복하고, 이별을 연기하고, 사람들의 눈물 어린 부탁에 어쩔 줄 몰라한다. 그의 이런 우유부단함은 에디트를 더욱 고통스럽게 할 뿐이다. 나약한 호프밀러의 연민, 그의 연민에 사랑을 기대하는 에디트, 그런 에디트에 종속되어 있는 케케스팔바성. 아슬아슬하다.
다만, 호프밀러를 위해 변명 한 마디를 하자면, 이렇다.
호프밀러는 여러 번 케케스팔바 성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 다짐한다. 하지만, 에디트의 아버지, 에디트의 주치의, 에디트의 사촌언니, 그리고 케케스팔바 성의 하인들은 그에게 간청하고 또 간청한다.
“제발 이 곳에 와 주세요.”
“내일 아침 일찍 와 주세요.”
“잠깐이면 됩니다. 꼭 와 주세요.”
그들에게 에디트는 ‘거부할 수 없는 명령 그 자체’이다.
그녀는 불행하다.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고, 아무도 부럽지 않은 환경속에서 자랐지만, 에디트는 불행하다. 앞으로도 살날이 창창한 그녀는 족쇄같은 기계에 매여 있다. 언제 회복될지 모르며, 효능을 예상할 수 없는 치료를 계속해야 한다. 친구를 만날 수도, 산책할 수도, 걸을 수도, 달릴 수도 없다. 도망갈 수도, 그렇다고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다. 그녀는 불쌍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 그 아이가 얼마나 예민한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모든 것을 우리보다 훨씬 강하게 느낀답니다. 지금도 자신이 자제력을 잃은 것에 대해 우리보다 더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자제를 하겠습니까? (56쪽)
에디트는 불행하고, 불행한 그 소녀는 스스로를 자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종종 자제력을 잃을 수도 있고, 그리고 자신이 자제력을 잃은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고통스러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많이 불행하다고 해서, 그녀가 스스로를 자제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본문 인용의 굵은 글씨체는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작가가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케케스팔바씨가 말한다.
“... 어떻게 자제를 하겠습니까?“
불쌍한 딸을 둔 아버지의 절절한 심정이, 사촌언니의 애달픈 마음이, 케케스팔바 성 하인들의 충심이 한데 모아져서, 결국에는 스스로 자제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든 욕망을 끝까지 관철시키고야 마는,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졸도해버리고 마는, 그런 에디트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어리석고 바보같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남주, 안톤 호프밀러 소위를 위한 한 가지 변명이다.
결국에는 케케스팔바 성 전체를 파국으로 이끌었지만, 그래도 한 때는, 그 성에서 가장 활기찬 웃음소리를 만들어냈던 남주 안톤 호프밀러를 위한 내 작은 배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