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페미니즘
마리아 미스, 반다나 시바 외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책은 그 자체로 질문이 된다. "자연은 언제부터 이토록 파편화되었을까?" "여성은 언제부터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나기 시작했을까?" 그리고 근본적으로, "이 두 문제는 왜 이리 닮아 있는 것일까?" 마리아 미즈와 반다나 시바의 저서, 『에코페미니즘』은 바로 이러한 질문들을 우리 앞에 선명하게 제시한다. 이 책은 단순한 환경론을 넘어, 자연과 여성, 이 둘을 억압하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논리를 심층적으로 해부하는 혁신적인 시도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발전'이라는 개념이 복잡한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지 탐구하며, 현 시대의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가부장제는 여성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오래된 관습 속에서 착취의 구조를 공고히 해왔다. 마르크스주의적 분석틀로 보면, 여성과 자연은 자본주의 발전의 그늘 속에서 희생양이 되어왔다. 여성의 노동은 생산 과정에서 보이지 않게 지워졌고, 자연 역시 자본 축적의 도구로만 취급되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피해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자연을 소외시키고 통제하려는 태도 자체가, 곧 여성에 대한 억압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여성과 자연의 착취는 동일한 논리로 작동해 왔다.


반다나 시바는 산업화된 농업과 '녹색 혁명'이 제3세계 여성들의 삶을 어떻게 황폐하게 만들었는지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이른바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여성들은 농업 생태계에서 밀려나고, 그들이 오랫동안 축적해온 지혜마저 사라졌다. 산업화된 농업이 여성들의 전통적 역할을 배제하고, 기업 중심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면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더욱 단절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제3세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자연과 거리를 둔 채 살아가고 있으며, 환경 위기의 본질을 ‘기술적 문제’로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에코페미니즘은 이러한 관점을 뒤집고, 자연과 여성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마리아 미즈와 반다나 시바는 과학이 남성 중심의 시각 속에서 발전해왔음을 지적한다. 전통적으로 여성과 지역 공동체가 보유한 지식은 억압되거나 배제되어 왔다. 한때 여성 치료사들이 축적한 경험적 지식은 '미신'으로 치부되었지만, 서구 과학이 동일한 성분을 분석하고 상품화하는 순간 ‘합리적 지식’으로 변모했다. 결국, 과학적 진보는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권력 관계 속에서 선택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역사적 사례가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지식의 배타성이 유지되는 방식은 유사하다. 기업이 특허를 내세워 토착 종자를 소유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오랜 세월 동안 공동체가 축적해 온 농업 지식이 사라지고, 자본의 논리에 따라 자연이 독점되는 현실 속에서, 과학은 과연 누구를 위해 발전하는가? 에코페미니즘은 과학을 포함한 모든 지식 체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배제된 목소리를 회복하려는 시도를 지속한다.


『에코페미니즘』은 "쓰는 행위"가 단순한 표현 수단을 넘어, 저항과 혁신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글쓰기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지배적인 담론에 균열을 내고 억압받아 온 목소리를 복원하며,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힘을 지닌다. 저자들은 ‘여성과 자연에 대한 폭력’이 동일한 뿌리에서 비롯되었음을 날카롭게 분석하며, 이 구조적 억압을 전복할 방법을 모색한다. 이는 단순한 문제 제기가 아니라, 사고의 전환을 촉구하고, 기존 질서에 균열을 내는 실천적 행위로서의 글쓰기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 책이 제시하는 하나의 실천적 대안은 소비의 감축이다. 자본주의적 소비 패턴에서 벗어나, 지속 가능한 삶을 선택하는 것은 단순한 개인적 결단이 아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어떠한 사회를 원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연결된다. "당신은 어떤 답을 찾아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개인의 윤리적 선택을 넘어, 사회적 변화를 촉진할 수 있는 촉매제가 된다.


기존의 경제 시스템은 성장과 소비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지만, 우리는 이 구조 속에서 끊임없이 자원을 소모하며 살아간다. 경제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파괴된 환경, 그리고 이에 따른 불평등의 심화는 단순한 부작용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시스템의 본질적인 문제다.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이 책은 단순히 문제를 지적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실천적 변화를 위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오늘날 기후 변화, 생태 위기, 젠더 불평등이 지속되는 가운데, 이 책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시스템 전체의 혁신을 요구하는 강력한 외침을 던진다. "자연은 언제부터 이토록 조각나기 시작했을까?" 이 질문은 단순한 환경 문제를 넘어, 우리가 가진 가치관 자체를 재검토하게 만든다. 우리는 더 이상 획일적인 경제 논리에 휘둘리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자연과 관계 맺는 삶을 모색할 것인가?


답을 찾는 과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정해진 답이 아니라, 다시 묻는 행위 자체일지도 모른다. 질문을 붙들고 한 걸음 멈춰 서서, 우리가 놓쳐온 것들을 바라보는 일. 그런 순간들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의 문이 열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과연 더 나은 세계를 꿈꿀 수 있을까.


그 답은, 어쩌면 이 질문을 다시 던지는 순간 이미 시작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그 과정 속에서, 생태적 정의와 여성의 권리가 함께 어우러진 세상에 대한 희망은 조용히 싹틀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 질문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날이 올까.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다시 던져지게 될까.


『에코페미니즘』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방향을 향해 가고 있는지, 그리고 어디쯤에서 멈춰 서야 하는지를,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걸어갈지를 조용히 짚어주는 나침반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쟝쟝 2025-02-09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코로나19한복판에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다 읽지는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펜데믹 이후로 무언가가 좀 더 변해야하지 않을까. 나의 삶도 변해야하지 않을까? 하면서… 이것 저것 끊어보는 즐거움(?)을 누렸는 데, 편하기에 길들여진 인간이라 그때 했던 도전들 중에 이어가고 있는 것이 거의 없네요….

쓰는 행위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 저는 눈 반짝하게 되는데, 맥락님의 출사표처럼 느껴지는 건 왜 때문?일까요 아래 글을 읽고 와서 일까요?ㅋㅋ

맥락없는데이터 2025-02-09 09:40   좋아요 1 | URL
어떻게 아셨죠?! ㅋㅋㅋ 出師表 느낌이 들었다는 게 우연이 아니라, 사실 저는 앞으로 알라딘에 글을 안 쓸 생각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딱 맞춰서 해석하신 걸 보니, 제가 너무 티를 냈나 봅니다. 😆 어쨌든 저의 出師表를 눈치채셨으니, 이제 어떻게 설득하실 건가요? ㅎㅎ 농담입니다. 변방의,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5-02-09 1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09 1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09 1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09 15: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알라딘에서 이달의 페이퍼나 리뷰로 당선되어 적립금을 받는 일은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선사했다. 물론 세 번뿐이라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특히 처음 당선되었을 때의 신선한 느낌은 상상하지 못한 보너스와도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선정 기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도대체 무엇이 이 글들을 선택하게 만들었을까?


세 차례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다른 글보다 더 신경을 쓴 글보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써 내려간 글들이 당선되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름 신경을 썼던 '똥'에 대한 글보다, 아무런 기대 없이 썼던 '고요한 읽기'에 대한 글이다.


좋은 글이란 무엇일까? 신경을 쓴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고, 계획 없이 흘러나온 글이 뜻밖의 반응을 얻기도 한다. 이는 내 경험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작가들이 글쓰기 과정에서 고민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앤 라모트(Anne Lamott)는 『쓰기의 감각』에서 커트 보니것의 말을 인용하며, 글쓰기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즉흥적인 과정인지를 강조했다.









'나는 글을 쓸 때, 입에 크레용 하나를 물었을 뿐 팔도 다리도 없는 사람처럼 느낀다.' (p. 80)


이 말은 글쓰기가 때로는 서툴고 어설프게 느껴질 수 있지만, 동시에 어린아이처럼 솔직하고 즉흥적인 감각에서 시작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완벽한 계획 없이 쓰여진 글이 더 강한 울림을 가질 수 있는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탈리 골드버그(Natalie Goldberg)는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에서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좌선을 할 때 당신은 사라져야만 한다. 좌선이 좌선을 하도록 만들어라. 이것은 글쓰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글이 글을 쓰도록 하라. 당신은 사라진다. (p. 92)


그녀는 머리로 문장을 완벽하게 다듬으려 하면 글이 경직될 수 있음을 경고하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글쓰기를 강조한다.


그렇다면, 글쓰기란 단순히 흘러가는 대로 쓰는 것일까? 즉흥성과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좋은 글이 나오는 걸까? 애트우드는 글쓰기의 또 다른 측면을 이야기한다. 그녀는 글쓰기가 단순한 표현의 행위가 아니라, 내면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는 『Negotiating with the Dead: A Writer on Writing』(한국어 제목으로 죽은 자들과 마주하는 글쓰기』정도가 좋을 것 같다.) 에서 글쓰기가 단순한 표현의 행위가 아니라, 내면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Possibly, then, writing has to do with darkness, and a desire or perhaps a compulsion to enter it, and, with luck, to illuminate it, and to bring something back out to the light."


(아마도 글쓰기는 어둠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욕망, 어쩌면 강박과도 연관이 있다. 운이 좋다면, 우리는 그 어둠을 밝혀내고, 다시 빛 속으로 무언가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즉, 글쓰기는 단순히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적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 그곳에서 무언가를 끌어내는 과정일 수도 있다.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최근 들었던 『The Source of Self-Regard』(『자존의 근원』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검색해보니 제목은 책의 목차 중 하나인 Invisible Ink(‘보이지 않는 잉크’)에서 따온 것이었다.)에서 글쓰기가 단순한 내면 탐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을 통해 지식을 확장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What I needed was imagination to shore up the facts, the data, and not be overwhelmed by them. Imagination that personalized information made it intimate, but didn’t offer itself as a substitute. If imagination could be depended on for that, then there was the possibility of knowledge.


(내가 필요로 했던 것은 사실과 데이터를 보강해 줄 상상력이었고, 그에 압도되지 않는 것이었다. 정보를 개인화하고 친밀하게 만드는 상상력, 그러나 그것이 대체물로 제공되지는 않는. 만약 상상력이 그것에 의존할 수 있다면, 지식의 가능성이 있었다.)

이 말은 글쓰기가 단순한 정보의 나열이 아니라, 독자의 감정을 움직이고, 그들과 교감하는 과정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글은 즉흥적으로 흘러나올 수도 있고, 내면의 어둠 속에서 길어 올려질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독자와의 연결 속에서 의미를 형성하는 것이야말로 글쓰기의 핵심 아닐까? 


여담이지만, 생각나는 대로 인용하고 보니 흥미롭게도 언급한 작가들이 모두 여성이다. 단순한 우연일까? 어쩌면 글쓰기의 본질에 대한 섬세한 탐구가 여성 작가들에게서 더욱 자주 발견되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그렇다면 독자와의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모리슨은 글쓰기에서 자기 신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작가가 자신의 글을 신뢰할 때, 비로소 글이 독자에게도 진정성 있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나치게 애쓰며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에 맡길 때 진정한 창작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이는 앞서 언급한 다른 작가들의 견해와도 일맥상통한다.


결국,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자연스럽게 흐르는 글, 애써 꾸미지 않은 문장이 때로는 더 깊이 있는 울림을 남긴다. 독자와 교감하는 글이란 단순한 기교가 아니라, 그런 신뢰 속에서 탄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알라딘에서 당첨된 내 글들도 그러했다. ‘잘 써야지’라는 의식 없이, 어떤 순간에 밀려오는 감각을 따라 쓴 글들이었다. 계획하고 쓴 글이 아니라, 어느 날의 생각과 감정이 저절로 흘러나온 글. 그렇다면 좋은 글이란 단순히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내적 필연성 속에서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글을 쓴다는 건 결국 자신과의 대화이자, 독자와의 조용한 교감인지도 모른다. 문장을 다듬고, 단어를 고르며, 가끔은 망설이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그저 글이 스스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 그렇게 나온 글이 누군가에게 닿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글이 아닐까.


글을 쓰는 동안, 한 번도 직접 만나본 적 없는 작가들과 대화를 나눈 기분이었다. 그런데 어쩌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도 아닌 내가 쓴 글을 일부러 찾아와 읽어주는 몇 안 되는 알라딘 친구들에게. 그렇게 글은 흘러가고, 문장은 이어진다.


하지만 글쓰기는 어렵다. 결국, 글쓰기가 어렵다는 게 결론이다. 생각을 글로 옮기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머릿속의 그것이 아니다.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다듬는 사이, 말하고 싶었던 본래의 감각은 희미해지거나 전혀 다른 모습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쓴다. 어쩌면, 완벽한 문장은 없을지라도, 누군가의 문장을 따라 읽고, 또 누군가의 문장에 답하듯이, 그렇게 읽고 쓰는 일이 연결되고, 또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오늘도 읽는다. 


그리고 적립금으로 책을 샀다. 김금희의 『나의 폴라 일지』, 『대국』, 그리고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반유행열반인 님, blueyonder 님, 서곡 님께 각각 ‘Thanks to’를 했다. 알라딘에서 몇 안 되는 친구분들께 작은 감사를 전할 기회가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댓글(17)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곡 2025-02-07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쭉 읽어 내려오다가 막판에 저도 등장하네요 ㅋㅋㅋ 감사합니다 즐독열독 생활 응원합니다

맥락없는데이터 2025-02-07 20:09   좋아요 0 | URL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좋아요‘ 눌러주신 덕분에 제 글이 더 많은 분들에게 보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ㅎㅎ 그리고 가끔 서곡님이 올려주시는 글이 어떤 책을 읽을지 선택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해요. 앞으로도 알라딘에서의 활동, 늘 응원합니다!

물감 2025-02-07 2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이 말에 공감이 많이 됩니다. 당선 축하드립니다 ^^

맥락없는데이터 2025-02-07 22:58   좋아요 1 | URL
따뜻한 축하의 말씀 감사합니다. 글을 쓴다는 것이 나만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점에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감 님의 당선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반유행열반인 2025-02-08 0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전 오랜만에 뽑히고 되게 웃겼던게 아…글 읽어보지도 않고 뽑는가? 했어요. (내 보기엔 잘 쓴 달에 안 뽑아준 때도 많음!! ㅋㅋㅋㅋ) 일단 제 리뷰 서두는 알라딘 플랫폼 망한 흑역사를 시작으로… 이 책은 알라딘에서 안 사고 지금은 망해버린 인터파크 도서에서 샀다… 이랬는데도 그걸 떡 뽑아놨어… 자조적이다… 아니면 정말 안 읽는다…

맥락없는데이터 2025-02-08 00:54   좋아요 2 | URL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ㅎㅎ 님의 댓글을 읽고 나니 저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되네요. 어쩌면 알라딘이 직접 선정하는 게 아니라, 출판사에서 적립금을 지원하는 방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다 보니 당선되는 멤버들이 어느 정도 고정되어 있고, 출판사가 마케팅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한 책들이 선정되는 구조일 수도 있겠지요.

뭔가 일정한 흐름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 시스템을 온전히 신뢰하기는 어려운 부분도 있네요. 더구나 적립금 받고 희희비비하는 것도 싫어서 더는 여기에 에너지를 쏟지 않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반유행열반인 님의 글은 언제나 독창적이고 흥미로워서, 알라딘 서재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글을 쓰시는 분 중 한 분이라고 생각해요. 직장으로 돌아가시더라도 글을 쓸 여유가 있으셨으면 좋겠어요.

아, 그리고 땡투는 3% 정도는 되는 줄 알았는데, 너무 미미해서 세 분을 언급한 게 괜히 민망할 정도네요. 생각보다 적어서 좀 황당하기도 하고요. 죄송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5-02-08 00:56   좋아요 1 | URL
축하가 늦었는데 당선 축하드려요…그래도 기본이 된, 책을 소개하는 좋은 글이니까 뽑히셨을 거예요. 저는 하도 안 준다고 징징대서 불쌍해서? ㅋㅋㅋ(자조) 출판사한테 니네 책 홍보해줄게 찬조할테냐? 할 거 같기도 하네요. 부족한 글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전엔 땡투하면 누르는 사람도 적립금 주던 시절도 있었답니다 ㅎㅎㅎ저는 아직 읽지도 않은 책일텐데 경제적 원조(?)까지 한 번 더 감사합니다. 편안한 밤 보내시길!!!

맥락없는데이터 2025-02-08 16:49   좋아요 2 | URL
반유행열반인 님도 당선 축하드립니다! 🎉 글이 워낙 흡입력 있고 독창적이라, 역시 뽑히실 줄 알았습니다. ‘징징대서 불쌍해서‘라는 말에 웃었어요. 😆 하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라, 충분히 좋은 글이니까 당연히 선정되신 거죠. 예전에는 땡투하면 누른 사람도 적립금을 받았다니, 그 시절을 경험해보지 못한 게 아쉽네요. 아무튼 좋은 글 늘 잘 읽고 있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반유행열반인 2025-02-08 17:53   좋아요 1 | URL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숲노래 2025-02-08 0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란 언제나 그림입니다. ‘글’이라는 낱말은 ‘그리다’에서 비롯했습니다. 모름지기 ‘글·그림’은 같지만 다른 말입니다. ‘글’은 노래·놀이가 물처럼 언제나 즐겁게 흐르듯이 피어나는 결을 그린다면, ‘그림’은 눈으로 넉넉히 담아내는 결을 그립니다.

그려서 글인데, 글이란 늘 말을 그립니다. ‘말’을 옮기기에 글이라고도 하지만, 제대로 들여다보면 모든 글은 “말을 눈으로 그림처럼 보도록 그린 모습”이라고 여겨야 알맞습니다. 우리는 말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그리는 ‘글’을 펴면서 서로 말을 나누는 셈입니다. 글을 남긴 분이 이미 즈믄해쯤 앞서 이 땅을 떠났어도 글을 읽는 사이에 ‘떠난 글님’하고 말을 섞을 수 있습니다.

이제 말이 무엇인지 살펴야 할 테지요. 말이란 ‘마음’을 담은 소리입니다. 말을 안 하더라도 눈짓이나 몸짓에도 마음이 묻어나기에, 눈짓과 몸짓으로 마음을 알아보기도 합니다. 다만 숱한 사람들은 한 마디를 하지요. “말을 안 하는데 네 마음을 어떻게 알아?” 하고요.

우리가 글을 쓴다고 할 적에는 바로 “마음을 담은 소리인 말을 다시 눈으로 쉽게 바로 그때그때 언제까지나 알아보려는 뜻으로 그린다”고 할 만합니다. 이 얼거리를 읽어낸다면 ‘글쓰기 = 말그림 = 마음쓰기’인 줄 알아채면서 어떤 마음을 어떤 말로 담아서 어떤 글로 그릴 적에 스스로 빛나는 줄 깨달을 만합니다. 이 얼거리를 읽지 않는다면, 꾸밈글과 치레글과 허울글과 겉글에서 맴돌고요.

잘 쓴 글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을 쓴 글”만 있습니다. 때로는 “마음을 안 쓰고서 꾸미는 글”만 있을 테지요. 이를테면 보람(상·당첨)을 노리며 쓰는 글이라면 마음이 아니라 딴청을 하면서 허울을 드러내는 글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잘 쓴 글 = 그저 꾸며서 속이는 글”입니다. “마음을 쓴 글 = 마음을 나누려는 글”입니다. 마음을 나누려는 말이나 글은 “잘하다 못하다”가 아닌 오롯이 “마음을 나누려는 빛”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이란 무엇인지 짚어야 할 테지요. 마음이란 바로 ‘삶’입니다. “좋은 삶”도 “나쁜 삶”도 “기쁜 삶”도 “슬픈 삶”도 아닌, 그저 내가 나로서 오늘을 누리는 삶이 고스란히 깃드는 마음입니다. “마음을 말로 나타낸다”고 할 적에는, 내가 스스로 오늘이라는 삶을 보낸 모든 이야기를 가리거나 숨기거나 보태거나 꾸미지 않으면서 “그저 그대로 담아서 편다”는 얼거리입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보고 짚는다면, ‘글쓰기 = 말그림 = 마음쓰기 = 삶쓰기’라는 길을 환하게 맞아들일 테고, 이 글결을 읽기에 낱말을 하나하나 깊고 넓게 짚고 다루면서 ‘글쓰기’라는 하루를 짓는다고 느낍니다.

<이거 그리고 죽어> 같은 만화책도 읽어 보셔요. 글쓰기에 빛이 될 만하리라 봅니다.

그리고, ‘누군가의‘는 틀린 말씨입니다. ‘누구‘라는 낱말에는 ‘-ㄴ가‘를 붙이지 않습니다. 밑꼴은 ‘누‘일 뿐이고, ‘누가(누 + 가)‘처럼 쓰는 말이고, ‘누구가(누구 + 가)‘처럼 쓰기도 합니다.

맥락없는데이터 2025-02-08 16:22   좋아요 0 | URL
역시 글을 사랑하시는 분답게 깊이 있는 시선이시네요. 그런데 저는 ‘누구가‘보다 ‘누군가‘가 더 익숙한데, 이걸 바꾸면 제 글이 어색해질 것 같아요. (^^;) 그래도 새로운 시각 배워갑니다! 긴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blueyonder 2025-02-08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제 닉네임이 언급되는 영광이… ^^; 원래 바둑 좋아하시나요? 괜히 저 때문에 영업 당하신 것은 아닌지… ㅎㅎㅎ
글쓰기에 관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맥락없는데이터 2025-02-08 16:26   좋아요 0 | URL
네, 원래 바둑 좋아합니다. 바둑 기사들의 자서전은 거의 다 읽은 것 같은데, 덕분에 또 좋은 책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이런 영업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죠. 😊 그런데 영문학에도 조예가 깊으신 것 같은데, 혹시 제 번역에 어색한 부분이 있으면 살짝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민선진 2025-02-08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그 신선한 기분 느껴보고 싶어집니다

맥락없는데이터 2025-02-08 16:27   좋아요 0 | URL
처음 댓글 남겨주셔서 반갑습니다! 😊 예상치 못한 즐거움이라는 게 참 신선하죠. 저도 처음 당선되었을 때의 그 느낌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민선진 님도 곧 그런 순간을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공쟝쟝 2025-02-09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려요, 맥락님의 데뷔의 순간!!!이네요~ 앞으로도 좋은 독후감 부탁드립니다! 글에 쓰신 바 와 댓글을 읽어본 바, 내가 좋아하는 글과 당선작의 기준은 조금 다르긴 한 것 같지만, 그래도 받으면 책 한 권이 공짜이니까요!! 그걸 기대하면서도 좋은 독후감 써주세요. 자주 놀러올게요~

맥락없는데이터 2025-02-09 09:38   좋아요 0 | URL
공쟝쟝 님, 오랜만이에요. 반갑습니다. 잊지 않고 댓글 남겨주시고, 자주 놀러오신다고 하시니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이 순간은 데뷔가 아니라 퇴장의 순간입니다. 앞으로 글을 올릴 생각은 없지만, 대신 공쟝쟝 님의 글은 시간 나는 대로 읽겠습니다. 좋은 글 많이 남겨주시고, 계속해서 공쟝쟝 님만의 목소리를 들려주세요. 늘 응원합니다!
 

요즘 들어 책 읽기가 예전 같지 않다. 얼마 전 구입한 소설책은 몇 페이지 넘기지도 못하고 책꽂이에 꽂혀 있고, 읽어야 할 논문은 모니터 속에서 나를 시험하듯 쌓여 있다. 마음은 무겁고 머릿속은 복잡하다. 단순한 취향의 변화일까, 아니면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 걸까.


아니, 어쩌면 이 공허함은 만성적인 외로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분주한 도시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는 오히려 더 깊은 고독을 느낀다. 마치 유배지 같은 이 일상에서, 술 한 잔은 유일한 위안이 되어 주곤 한다. 오늘도 익숙하게 냉장고에서 술을 꺼내 잔에 따랐다. 그러다 문득, 오래전 읽었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가 떠올랐다. 서재 구석에 꽂혀 있던,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초록색 표지의 낡은 책을 꺼내 들었다.















책장을 넘기자 200년 전 유배지에서 고독한 시간을 보냈을 다산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그는 한마디의 거짓말도 세상에서 가장 큰 죄악으로 여기라고 가르쳤고(p.57), 편지 한 자 한 자까지 사실과 어긋나지 않게 쓰라고 당부했다(p.97). 한 글자 한 글자에 꼿꼿한 선비의 기개가 서려 있는 듯한 그의 문장들은, 술기운을 빌려 휘갈겨 쓰는 나의 가벼운 글쓰기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술은 나에게 일종의 도피처이자 해방구다. 팍팍한 현실과 무거운 책임감, 그리고 지독한 외로움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내 안의 솔직한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게 해 준다. 하지만 동시에, 술기운에 기댄 글이 과연 얼마나 진실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남는다. 이런 나 자신이 가끔은 한없이 초라하고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산은 저 멀리 유배지에서도 저렇게 꼿꼿하게 자신을 바로 세우고 학문에 정진했는데, 나는 고작 팍팍한 일상 속 외로움을 핑계로 술잔 뒤에 숨어 취중방담이나 늘어놓고 있으니 말이다.


만약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과연 다산처럼 살 수 있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어쩌면 나 역시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침묵하고 타협하며 그렇게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그의 시대는 지금처럼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말 한마디, 글 한 줄에도 목숨을 걸어야 했던 시대였다. 그 험난한 시절, 유배지에서도 자신만의 꼿꼿함을 잃지 않았던 다산의 강인함이 새삼 존경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든다. 이건 내 공간이고, 내 글이다. 다산처럼 신중하고 절제된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해서, 꼭 부끄러워할 필요가 있을까. 그 시대와 지금은 다르다. 나는 다산의 시대를 살고 있지 않고, 그는 이 시대를 경험해 보지 못했다. 그의 시대에 글이 절제와 신중의 산물이었다면, 지금의 글은 때로는 자유와 즉흥적 표현의 영역이기도 하다. 적어도 이 공간에서만큼은, 나 역시 내 생각을 자유롭게 펼칠 권리가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나에게 글쓰기란, 이 지독한 외로움을 견디기 위한 나만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취중방담처럼 술기운을 빌려 끄적이는 글 속에서나마, 나는 세상과 소통하고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책임하게 아무 말이나 내뱉겠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 글이 다산이나 다른 사람들의 것과 다르다고 해서 주눅 들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꼿꼿한 문장들은 여전히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특히 "천리는 돌고 도는 것이니, 한 번 넘어졌다고 결코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p.174)라는 구절은, 요즘 들어 잦은 실패로 의기소침해 있던 나에게, 그리고 외로움에 지쳐 있던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200년 전 유배지에서 쓰인 한 문장이, 팍팍한 현실에 지쳐 있던 나에게 다시 일어설  힘을 준 것이다. 어쩌면 술은 단순한 도피 수단을 넘어, 이런 오래된 지혜와 나를 연결해 주는 매개체가 되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매개체가 되어준 술 한 잔이 있었기에 망가진 나를 다시 추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다시 다산의 편지를 읽으며 생각에 잠긴다. 술 한 잔을 앞에 두고 그의 시대를 떠올리고, 그가 남긴 문장을 되새기며, 여전히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한다. 그리고 때로는 이런 고민 속에서, 이 외로움 속에서 한 줄기 의미를 발견하고, 또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비록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취중방담처럼 술기운을 빌려 끄적이는 것뿐일지라도, 이 순간 만큼은 나 자신에게 솔직하고 싶다. 팍팍한 현실 속에서도, 때로는 외로움에 휩싸여도, 술 한 잔과 함께 이런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속에서 작은 의미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지금 나에게는 이 작은 바람으로 충분하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잉크냄새 2025-02-03 1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취중방담이 곧 취중진담이 되지 않을런지요.

맥락없는데이터 2025-02-07 15:13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합니다. 다시 보니 살짝 부끄러운데, 따뜻한 반응 덕분에 덜 쑥스럽네요! :)

마힐 2025-02-03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자 술 한잔 기울이는 것은 바로 내 마음에 귀기울이는 거와 다름 없지요.
그렇게 진실해 지니까 취중진담이 가능해지는 거겠죠?
새해에 얼른 기운내시고 행복 하십시요!

맥락없는데이터 2025-02-07 15:13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혼자 마시는 한잔이 때론 가장 솔직한 시간이 되는 것 같아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 가득한 한 해 되시길 바랍니다! :)
 
전쟁과 평화 1~4 세트 - 전4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러시아의 귀족들은 조용한 응접실에서 전쟁을 이야기한다. 프랑스가 쳐들어온다, 황제께서 결단을 내리셨다, 전쟁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 살롱의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다른 곳에서는 이미 총성이 울리고 있다. 전쟁은 그렇게 한순간에 현실이 된다.


이 거대한 소설은 시작부터 독자를 19세기 초 러시아의 격동의 한복판에 던져놓는다. 피에르는 사색에 빠지고, 안드레이는 칼을 들고 나선다. 나타샤는 춤을 추며 사랑을 꿈꾼다. 이 세 인물을  중심으로, 소설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요동치는 인간 군상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은 흘러간다. 영광도, 패배도, 젊음도. 전쟁과 평화는 이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흔들리고, 변화하고, 때로는 같은 자리에 머무르는지를 담아낸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고민과 갈등 속에서 방황하고, 성장하고, 때로는 좌절한다. 그들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 오히려 나약하고, 모순적이며, 끊임없이 흔들리는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본다. 『전쟁과 평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깊이다. 그들은 단순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 흐르는 역사 속에서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생함을 지닌다.


피에르의 여정은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구도의 길과 같다. 방탕한 젊은 귀족이었던 그는 프리메이슨에 가입하여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한다. 나폴레옹을 악의 화신으로 여겨 암살하려는 엉뚱한 계획을 세우기도 하지만, 결국 이 또한 허망하게 끝나고 만다. 그러나 러시아군 포로로 잡혀간 그는 그곳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농민 병사 플라톤 카라타예프와의 만남을 통해, 피에르는 비로소 삶의 본질에 다가선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플라톤의 말은, 피에르에게 단순한 위로를 넘어 삶을 관통하는 진리로 다가온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풍 속에서도 결국 중요한 것은 현재, 그리고 그 순간을 살아가는 자신의 존재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피에르와 대비되는 인물인 안드레이는 처음부터 야망 넘치는 군인으로 등장한다. 그는 전쟁에서 공을 세워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고, 나아가 역사에 이름을 남길 위대한 인물이 되고자 한다. 하지만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쓰러져 마주한 드높은 하늘은, 그에게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준다. "저 높고 푸른 하늘에 비하면, 내가 좇던 영광이란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  이 깨달음 이후 안드레이는 회의주의에 빠져 세상과 거리를 두게 된다. 사랑하는 아내 리자의 죽음은 이러한 그의 염세관에 쐐기를 박는다. 그러나 보로디노 전투에서 다시 만난 나타샤의 헌신적인 간호는, 죽음을 앞둔 그에게 진정한 평화를 선사한다. 아마도 톨스토이는 이 장면을 통해 진정한 평화란 삶의 끝자락에서야 찾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나타샤는 등장할 때부터 생명력으로 가득 찬 인물이다. 그녀는 사랑을 꿈꾸고, 음악을 즐기며, 세상 모든 것에 마음을 열어둔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순탄치 않다. 안드레이와의 약혼은 전쟁으로  인해 파국을 맞고, 아나톨 쿠라긴과의 위험한 사랑은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나타샤는 더 이상 과거의 철없고 감정적인 소녀가 아니다. 그녀는 고난을 딛고 일어서, 피에르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나타샤의 변화는 삶의 가혹함 속에서도 인간은 얼마든지 성장하고 강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것이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전쟁을 미화하지 않는다. 아우스터리츠와 보로디노 전투 장면은 영웅적 승리의 서사가 아닌, 혼란과 죽음이 난무하는 참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특히 보로디노 전투는 러시아군의 승리로 기록되지만, 톨스토이는 이 전투의 무의미함을 피에르의 눈을 통해 강조한다. 수많은 병사들이 두려움 속에서 죽어가는 동안, 정작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저 멀리 안전한 곳에서 상황을 관망할 뿐이다. "이것이 승리라면, 패배는  무엇인가?" 피에르의 이 씁쓸한 독백은 전쟁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나폴레옹 역시 기존의 역사 서술에서처럼 영웅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는 뛰어난 전략가이지만, 오만함에 사로잡혀 결국 몰락의 길을 걷는다. 모스크바 화재를 멍하니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역사의 거대한 흐름 앞에 선 개인의 무력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전쟁이 끝나고 모든 것이 변했다. 피에르는 나타샤와 가정을 이루고, 몰락 위기의 로스토프 가문은 니콜라이와 마리야 볼콘스카야의 결혼으로 안정을 되찾는다. 하지만 이 모든 변화 속에서도 진정한 평화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에필로그에서 보여지듯,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인간의 삶은 여전히 고민과 갈등으로 가득 차 있다. 어쩌면 역사에서 '평화'란 잠시 머물다 가는 신기루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전쟁과 평화』를 덮고 나면, 마치 한 시대의 흥망성쇠를 직접 경험한 듯한 긴 여운이 남는다. 우리는 과연 자유로운 존재인가? 개인의 선택은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에 이끌려 살아가는 것일까? 톨스토이는 방황하고, 성장하고, 때로는 좌절하는 인물들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중요한 단서를 남긴다. 피에르가 포로 생활 중 깨달은 "순간에 충실한 삶", 안드레이가 죽음 직전에 느낀 초월적인 평화, 그리고 나타샤가 보여준 삶에 대한 강한 의지. 이 모든 것들이 모여, 결국 우리가 붙잡아야 할 삶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 아닐까.


『전쟁과 평화』는 단순한 역사 소설을 넘어,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거대한 서사시와 같다. 이 작품은 내 삶의 잔잔한 수면에 묵직한 돌멩이 하나를 던졌다. 그 돌멩이가 만들어낸 파문은 책장을 덮은 후에도 오랫동안 내 안에서 일렁였다. 피에르의 방황, 안드레이의 깨달음, 나타샤의 성장은 마치 내 이야기처럼 생생하게 다가와,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강렬한 울림은 앞으로도 내 삶 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전쟁과 평화』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까지 살아 숨 쉬는 고전으로 남아 있는 이유일 것이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lueyonder 2025-02-03 14: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전쟁과 평화> 처음 몇 장 읽고는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했습니다. 언젠가 읽어야 할 책 리스트의 상단에 있습니다. ^^

서곡 2025-02-04 10:55   좋아요 1 | URL
bbc 드라마 전.평. 전에 보다 말았는데 이번 겨울이 다 가기 전에 다시 시도해보고 싶어집니다 ㅎㅎ

맥락없는데이터 2025-02-07 15:15   좋아요 1 | URL
공감됩니다! 저도 처음엔 몇 장 읽고 멈췄지만, 결국 다시 돌아와 읽게 되더라고요. 리스트 최상단에 두셨으니 언젠가 멋진 독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

서곡 2025-02-04 1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러시아 영화 전.평. 보셨는지요? (오드리 헵번 주연 할리우드판 후에 나왔는데요) 시간도둑이지만 유튜브에서 영문자막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맥락없는데이터 2025-02-07 15:16   좋아요 0 | URL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예전에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는데, 정확히 떠오르지 않았어요. 다시 찾아봐야겠네요. :)

서곡 2025-02-07 15:41   좋아요 0 | URL
바쁘다고 하셨는데 TMI 죄송합니다 ㅋㅋㅋ 제가 그 러시아 영화를 오래 전 보다가 다 못 봤는데 작년 2024년에 유튜브에서 나머지를 다 봤거든요

맥락없는데이터 2025-02-07 17:21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 적 있어요! 오래전에 보다가 잊고 있다가 다시 보면 묘하게 기분이 좋더라고요. 아무리 바빠도 스트레스 받을 땐 영화로 풀기도 하죠! 저도 요즘 유튜브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 오래된 영화 찾아보곤 해요. 시간은 없지만, 알려주신 오드리 헵번의 전쟁과 평화 꼭 찾아볼게요.=)

서곡 2025-02-04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평. 저는 박형규 역본으로 읽다가 을유문화사판으로 겨우 다 읽었습니다 또 읽게 될지는 자신 없네요 ㅋㅋ 아, 그리고 덧붙이는데요 그림책 작가 타샤 튜더의 타샤가 전.평. 나타샤로부터 딴 이름이라고 합니다 ~

맥락없는데이터 2025-02-07 15:19   좋아요 0 | URL
을유문화사판은 어떤 느낌이었나요? 그리고 타샤 튜더 이름 유래는 들으니 자연스럽긴 한데, 전.평.과 연결된다고 하니 묘하게 흥미롭네요! 재밌는 정보 감사합니다! :)

서곡 2025-02-07 15:45   좋아요 0 | URL
을유문화사판은 교수님 두 분 공역인데 다소 딱딱하지만 무난한 편입니다 글맛이 있는 느낌은 아니고요 그래서 연진희 역자님의 번역이 궁금하긴 한데 워낙 볼륨이 있는 책이라 섣불리 도전은 못 하겠고요 안.카.도 새롭게 시작했다가 아직 끝을 못 봐서요

맥락없는데이터 2025-02-07 17:24   좋아요 0 | URL
저는 을유문화사판을 읽지 못해서 뭐라 말씀드리기가 어렵지만, 어느 것이든 읽었다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굳이 이런 대작을 역자를 바꿔가며 읽을 필요가 있을지는… 저는 그런 정성까지는 못 낼 것 같아요. ㅎㅎ 문학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한 걸까요? 😂
 


우연히 <베이비 붐>이라는 오래된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처음엔 단순히 추억을 되새기려던 마음이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잊고 있던 감정들이 되살아났다. 이 영화는 1980년대에 발표가 되었지만, 나는 1990년대 말 대학생 시절 처음 이 영화를 접했다. 그 당시, <베이비 붐>은 단순한 코미디 영화 그 이상이었다. 예일대와 하버드 MBA를 통해 성공한 커리어 우먼 J.C. 와이어트의 이야기는 나에게 당시 여성으로서의 삶과 선택을 깊이 고민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J.C.는 맨해튼에서 성공적인 경영 컨설턴트로 활약하며 세련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영국의 먼 친척으로부터 14개월 된 아기 엘리자베스를 양육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서 그녀의 삶은 완전히 바뀐다. 커리어와 모성이라는 갈림길에서 J.C.는 혼란을 겪고, 결국 버몬트로 이주해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J.C.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경험한다.


영화는 당시 사회에서 여성이 경력과 모성을 동시에 유지하기 어려운 환경을 비판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한다. J.C.의 여정은 단순히 개인적인 성장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성 중심적인 사회 속에서 여성들이 겪는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다. 특히 Ken이라는 동료가 J.C.의 혼란을 틈타 그녀의 자리를 차지하는 장면은, 여성이 성과를 축소 평가받거나 가로채이는 현실을 보여준다.


Ken의 행동은 크리스틴 델피가 [가부장제의 정치경제학]에서 설명한 여성 억압의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델피는 가부장제를 단순한 문화적 현상이 아니라, 여성의 무급 노동을 착취하며 유지되는 물질적 생산 양식으로 보았다. 그녀는 가사 노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수적인 노동력 재생산을 담당하면서도, 여성의 자연스러운 의무로 여겨지는 점을 비판한다. J.C.의 사례는 이러한 분석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녀는 유능한 전문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모성을 선택한 순간 회사에서 주변부로 밀려난다. Ken은 사장의 편애를 등에 업고 그녀의 자리를 차지하며, 남성 중심적 기업 문화가 어떻게 여성의 성과를 지워버리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캐런 윌슨-부터바우의 [아기 퍼가기 시대]는 J.C.의 경험을 분석하는 또 다른 관점을 제공한다. 윌슨-부터바우는 현대 사회가 여성을 모성이라는 틀 안에 가두고, 이를 강요된 선택으로 만드는 과정을 비판한다. J.C.가 엘리자베스를 돌보게 된 것은 원치 않은 일이었지만, 이를 통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녀의 변화는 모성이 여성의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재정의할 수 있는 영역임을 보여준다.








클레어 혼의 [재생산 유토피아]는 J.C.가 보여주는 대안적 삶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데 적합하다. J.C.는 버몬트에서 유아식 사업을 시작하며 새로운 성공을 만들어낸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 성취를 넘어, 여성의 독립적 삶과 경력의 새로운 형태를 제시한다. 혼은 사회가 양육과 가사 노동을 여성 개인에게 맡기는 대신, 이를 사회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J.C.의 여정은 사회적 지원 없이 홀로 싸워야 했던 한계를 드러내지만, 동시에 여성이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설계할 수 있다는 희망도 전한다.


<베이비 붐>은 198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담고 있지만, 그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여성이 직면하는 커리어와 모성의 갈등, 그리고 사회적 틀을 넘어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여정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깊은 울림을 준다. J.C. 와이어트는 단지 한 개인의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여성들이 스스로의 삶을 정의할 권리를 주장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이혜미 기자의 [잠정의 위로]는 J.C.의 여정을 현대적으로 확장하며 우리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자기만의 방]에서 시작된 버지니아 울프의 사유처럼, [잠정의 위로] 역시 온전히 자신으로 사는 삶이란 무엇인지, 안정과 자유, 돌봄과 경력 사이에서 흔들리더라도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잠정의 공간'은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 이혜미 기자가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공표하고 강력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도 정말로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는다고 증명해 보이고 싶다"라고 말한 것처럼, J.C. 역시 자신의 선택을 통해, 여성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오늘날의 현실을 바라볼 때, J.C.와 이혜미 기자의 이야기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여정임을 보여준다.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결혼과 출산, 경력 단절 사이에서 어려운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1980년대의 J.C.에 비해 분명 많은 것이 변했지만, 여전히 '돌봄은 여성의 몫'이라는 낡은 인식, 경력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장벽들은 곳곳에 남아 있다.


J.C.의 이야기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이혜미 기자의 이야기가 책장이 덮인 후에도 우리 곁에 남아 계속 질문을 던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J.C.는 완벽하지 않다. 그녀의 선택은 때로는 주저함과 혼란 속에서 이루어지며, 이는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과 닮아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 혼란 속에서도 멈추지 않았고, 자신만의 답을 찾아 나아갔다. "경력과 모성, 일과 돌봄 사이에서 여전히 힘겨운 줄타기를 하고 있는 이 시대의 수많은 J.C.들과 이혜미들에게, 과연 우리 사회는 어떤 답을 줄 수 있을 것인가?" <베이비 붐>과 [잠정의 위로]가 우리에게 남긴 숙제는 분명하다. 더 이상 여성들이 혼자 돌봄의 부담을 짊어지지 않도록, '돌봄의 사회화'를 위한 제도적 지원, '부모의 공동 양육'이라는 인식의 확산, 그리고 가족 친화적 기업 문화를 조성하는 일이 절실하다. J.C.의 질문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결국, 더 평등한 사회로의 도전이 될 것이다. <베이비 붐>과 [잠정의 위로]는 여성들이 자신으로 살아가며, 자신이 원하는 삶을 만들어가는 여정에 영감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곡 2025-01-17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운 댓글에 별 내용은 없었답니다 ㅎㅎ 프사랑 닉넴 바꾸셨네요 라고요 ㅋㅋ 저야말로 무맥락 디비...

맥락없는데이터 2025-01-17 14:02   좋아요 0 | URL
닉네임과 프사를 바꿨습니다. 닉네임이 어떻게 불리는지 고민하는 분이 계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바꿔보았습니다. 친절을 베풀려는 행동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줏대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도 스쳤습니다. 닉네임을 바꾸는 김에 프사도 함께 바꿨습니다. 변화를 알아봐 주시니, 서곡님과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입니다. 남은 하루도 기분 좋은 일들로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

서곡 2025-01-17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셨군요 저도 닉넴과 프사 바꿀까 생각 중이었는데요 서재 시작하면서 깊은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택하여 지금껏 지내고 있습니다 귀차니즘 때문에 계속 유지할 가능성이 높지만요!

맥락없는데이터 2025-01-18 07:03   좋아요 0 | URL
서곡 님의 닉네임은 부르기 쉽고 간결하면서도 의미가 담긴 느낌이 들어, 올리시는 포스팅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프로필 사진도 가끔씩 변화를 주시면 어떨까 기대해 봅니다. 물론 지금도 충분히 좋지만, 새로운 모습도 궁금해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