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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베유의 The Iliad or the Poem of Force를 떠올렸다. 전쟁과 힘, 그리고 억압의 구조를 냉철하게 분석한 그녀의 글은 여전히 힘이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을 정확히 짚어낸다. “힘은 승자와 패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를 파괴한다”는 그녀의 통찰은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베유는 Gravity and Grace에서 "고통은 영혼의 중력이다"라고 말했다. 고통은 단순히 피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를 구성하는 필연적인 조건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고통을 은총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은총이란 무엇인가? 그녀는 이렇게 썼다. "은총은 고통의 중심에서 신성과 연결될 수 있는 경험이다." 즉, 고통은 인간에게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하고, 이를 초월하는 길로 안내한다. 고통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더 높은 차원의 존재와 합일을 경험하며, 궁극적으로 자신과 세상을 초월하는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된다. 베유에게 은총은 단순히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신성에 닿는 것이다.




힘은 무엇인가? 베유는 The Iliad or the Poem of Force에서 "힘은 인간을 파괴하고, 그들의 인간성을 비인간적인 것으로 만든다"고 말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무정부주의자 부대에 합류했던 그녀는 전쟁의 비극적 실상을 직접 경험했다. 승자와 패자가 모두 힘의 논리에 종속되고, 힘의 작동은 인간 관계를 지배와 종속으로 재편했다. 그녀는 일리아스 속 트로이 전쟁을 분석하며, 힘이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어떻게 압도하는지를 통찰력 있게 그려냈다. 이 논의는 한나 아렌트의 권력 개념과 흥미롭게 대조된다. 아렌트는 권력을 공동체의 협력과 합의를 통해 형성되는 긍정적인 힘으로 보았다. 반면, 베유는 힘을 본질적으로 억압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 정의했다. 아렌트에게 권력은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베유에게 힘은 인간 존엄성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였다. 이러한 차이는 두 철학자의 삶과 경험, 그리고 그들이 바라본 현실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혐오와 차별은 베유의 '주의(attention)' 개념이 오늘날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상기시킨다. 혐오는 고통을 외면하고, 차별은 타인의 존엄성을 부정한다. 베유는 “진정한 사랑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주의란 타인의 고통을 직시하며,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다. 현대의 '주의'는 단순히 관심을 끄는 디지털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혐오를 목격했을 때 침묵하지 않는 실천적 태도를 의미한다. 이는 온라인 연대와 커뮤니티 형성을 통해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베유의 철학은 그녀의 삶에서 분리되지 않는다. 그녀는 공장에서, 전쟁터에서, 그리고 책상 앞에서 고통과 힘의 문제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녀의 공장 노동 경험은 노동의 소외와 고통이 억압적 구조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했고, Labor Journal은 이러한 고통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그녀는 고통받는 노동자들과 연대하며, “타인의 고통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인간 존엄성 회복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녀의 사유는 단순히 생각에 그치지 않고 실천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녀의 실천은 때로 그녀를 파괴와 은총의 경계로 몰아넣었다. 


혼란의 시대,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비상계엄령이라는 단어가 주는 힘의 무게 속에서, 베유의 삶과 철학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힘의 논리를 거부하고, 타인의 고통에 주의를 기울이며, 은총으로 나아가는 길은 오늘날에도 유효한가? 베유는 그녀의 삶을 통해 말한다. "은총은 힘의 정점에서 드러난다." 이제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는 힘에 굴복하여 인간성을 상실할 것인가, 아니면 베유의 가르침처럼 고통에 맞서 연대하고 은총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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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에서 "계엄령"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법적 조치가 아니라 국민의 상처를 담고 있는 검은 기억이다. 정해구의 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은 이렇게 기록한다. “1980년 광주는 단지 지역적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 권력에 의해 자유와 생명이 유린된 참혹한 비극이었다.” 그 비극의 중심에 비상계엄이 있었다. 광주는 무자비한 계엄군의 폭력 아래 목소리를 잃었고, 민주주의는 칼날 위에 선 채 흔들렸다.


그리고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일요일은 한 주의 고단함을 씻어내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날이다. 그러나 그날 광주는 안식과 준비의 시간이 아니라, 칼끝 아래 놓인 공포의 시간이 되었다. 무방비한 일요일의 평화로움은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깊은 밤, 모든 것이 잠든 어둠 속에서 선포된 비상계엄령. 그것은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난 듯했다. 국민의 목소리를 억누르고 민주주의를 짓밟으려는 그 음험한 시도는, 분노를 넘어 경멸을 자아낸다. 하물며 새벽이라는 시간은 더욱 치졸하고 비겁하다. 모두가 방어를 내려놓고 잠든 그 순간을 노린다는 것, 그것은 단지 악한 행동이 아니라, 어둠에 숨어 흉괴를 꾸미려는 비열한 자의 전형이다. 괘씸하고도 괘씸하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는 그 시절을 지나온 이들의 상처를 이렇게 전한다. “우리는 모두 그날의 시간 속에서 멈춰 있다.” 비상계엄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진 폭력은 단지 과거의 고통으로 머물지 않는다. 역사는 언제나 반복될 가능성을 품고 있고, 그 공포는 살아남은 이들의 가슴속에 깊이 각인된다. 계엄령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법적 조치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그것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억누르며 과거의 악몽을 되살리는 암호다.


그 시절, 한 소년은 평범한 하루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광주는 점령당했고, 그는 친구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다. 도청으로 실려 오는 시신들, 빛을 잃은 얼굴들. 초를 밝히며 혼을 달래던 열흘의 시간은 단지 하루하루를 견디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년과 주변 사람들의 세계를 영원히 바꿔 놓았다.


한강은 묻는다. “왜 우리는 그 학생의 이름을 말하기 직전, 알 수 없는 망설임에 멈추는가?” 이 단순하지만 깊은 질문은 그녀가 왜 이 이야기를 써야만 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녀는 고백한다. "이 이야기를 통과하지 않고는 어디로도 갈 수 없었다"고.


소년이 온다는 광주라는 도시와 그곳에서 상처받은 이들의 삶을 통해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이 소설은 과거를 기록하며 동시에 묻는다. 우리가 이 비극을 잊는다면, 그날의 어둠은 다시금 우리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 나온 말처럼, "권력은 칼을 쥔 자의 것이 아니라, 그 칼을 바라보는 자들의 두려움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정국에서 다시 떠오른 계엄령의 망령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국민은 이미 한 번 그 칼끝에 당했던 경험이 있다. 우리가 두려움 속에 침묵하면, 권력은 그 칼을 휘두를 이유를 스스로 정당화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두려움은 과거와 닮아 있다. 칼끝은 여전히 우리의 눈앞에서 흔들리고 있고, 권력은 여전히 그 칼을 자신들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하려 한다. 하지만 칼을 마주 보는 이들이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김훈의 글이 강조하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두려움을 느끼더라도, 침묵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칼을 바라보는 이들의 두려움이 권력의 이유가 될 수 없다면, 그 칼은 아무것도 자를 수 없다.


한강과 김훈의 글은 다르지만, 공통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두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침묵해서는 안 된다. 두려움이 침묵으로 이어질 때, 권력은 이번처럼 가장 추악한 형태로 자신을 드러낸다. 침묵하지 않는 순간, 칼을 쥔 손은 흔들리고, 그 칼은 힘을 잃는다.


오늘의 계엄령의 그림자는 단지 과거의 반복이 아니라,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던지는 질문이다. 우리는 다시 두려움 속에서 침묵할 것인가, 아니면 그 칼끝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스스로의 목소리를 지킬 것인가?


계엄령 논란 속에서 어느 대형 신문사가 보여준 태도는 그야말로 "진실을 가장한 기만의 언어"였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렇게 말한다. "진실이 부정되고 거짓이 수단화될 때, 권력은 가장 추악한 형태로 존재한다." 이 신문사는 국민의 상식을 무시하고, 왜곡된 프레임을 통해 국민의 분노를 조롱한다. 그들은 국민을 똥멍충이로 보고, 진실을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왜곡하며, 허상을 마치 진실처럼 내세운다.


한편,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러한 권력과 거짓의 메커니즘을 더욱 날카롭게 꿰뚫는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단지 명령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행위가 만들어낸 참혹한 결과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회피했다. 그는 스스로의 무지를 무기로 삼아, 제도적 악의 일부로 기능했다.


오늘날, 비상계엄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권력자들은 이러한 태도를 떠올리게 한다. "나는 법을 따를 뿐이고, 나는 질서를 유지하려 할 뿐"이라는 그들의 논리는, 아이히만의 태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아렌트가 지적했듯, "악은 극악무도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평범함 속에서 자란다." 무지와 도덕적 무관심, 그리고 자기 성찰의 부재는 결국 권력의 가장 위험한 도구가 된다.


그러나 이번 계엄령이 실패한 이유는, 그나마 생각 있는 군 간부나 군인들이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변명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역사의 죄인이 되기를 거부하며, 아이히만 같은 존재로 전락하지 않으려는 결단을 내렸다. 이 선택은 단순한 거부가 아니라, 권력이 악의 도구로 작동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지였다고 본다.


그러나 아렌트의 경고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악의 평범성"은 단지 개별적 사례에 머물지 않고, 체제와 구조 속에서 반복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상황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거짓과 왜곡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작동하는 한, 국민은 그 칼끝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멍청한 권력자의 위험성은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역사가 끊임없이 경고해온 주제다. 예컨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떠올려보자. 리어는 자신의 권력욕과 판단력 부족으로 인해 자녀들과 나라를 모두 파멸로 몰아간다. 그는 자신이 옳다는 착각 속에서 자멸로 향했고, 결국엔 고통 속에서 무너졌다. 오늘날의 무지한 권력자는 마치 리어 왕처럼 자신의 판단이 나라를 파괴로 이끌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 채, 현실을 부정하며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리어 왕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가장 큰 비극은 통치자의 눈이 가려졌을 때 시작된다." 오늘날 우리는 이 경고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무지한 지도자의 결정은 단지 어리석음을 넘어선 재앙이 될 수 있다. 



또한, 로마 제국의 칼리굴라 황제는 권력의 절대성을 믿으며 비이성적 결정을 남발했던 전형적인 지도자였다. 칼리굴라는 반대 의견을 "반역"으로 치부하며, 자신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이들을 제거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결국 그의 어리석음은 제국 전체를 위기에 빠뜨렸다. 이처럼 두려움 속에서 국민을 지배하려는 멍청한 권력자는 늘 같은 길을 걸어왔다. 


이러한 지도자들은 공통적으로 모든 비판을 "괴담"으로 치부한다. 이는 그들이 두려움과 무지를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무지를 당당히 정당화하며 국민의 불안을 정치적 도구로 삼는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적으로 경고한다. 무지한 권력자는 끝내 자신뿐만 아니라 국민과 국가를 파멸로 몰고 갈 뿐이다.


우리는 더 이상 무지한 권력자의 배 위에 올라타 있지 않을 것이다. 그 배가 침몰한다면, 우리는 진실을 붙들고 헤엄칠 것이다. 대형 신문사가 국민을 조롱하며 내세우는 허상은 결국 부서지고, 그 잔해 위에서 진실은 다시 빛을 볼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대한민국은 여전히 "계엄령"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움츠러드는 상처를 안고 있다. 그러나 이번 비상계엄령 논란은 단지 과거의 반복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축적된 부정과 불의가 폭로되는 전환점이었다고 생각한다.퇴진하라에서 지적된 대로, 부패한 권력은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거짓과 왜곡을 반복한다. 그러나 국민의 분노는 더 이상 가라앉지 않는다. 이번 비상계엄령은 그 임계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다시 권력을 잡으려는 이들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절망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우리 국민은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며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온 저력을 가지고 있다. 모두가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친다면, 나라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현명한 지도자를 선택하고 더 나은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지금까지 수없이 속아왔어도, 그 희망만은 여전히 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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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04 15: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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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 Richter - On the Nature of Daylight


병원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의사는 간결하고 명확하게 말했다. “골다공증입니다. T-점수가 -2.99로 나왔어요.” 순간, 마치 깊은 바닷속으로 끌려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내 몸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던가. “약물 치료와 생활 습관 개선이 필요합니다.” 의사의 말은 귓가에 맴돌았지만,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2.99. 그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 몸, 내 삶, 내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막막함과 두려움이 밀려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착잡한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칼슘, 비타민 D, 골다공증 약, 운동..." 의사가 말한 생활 습관 개선 목록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막상 실천하려니 막막했다. 칼슘이 풍부한 음식을 챙겨 먹는 것도, 규칙적으로 운동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약까지 먹어야 한다니... 일상생활에 큰 변화가 불가피했다.


의문은 점차 내 사고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병원에서의 진단과 숫자들,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들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다. 이때 문득 떠오른 것이 미셸 푸코였다. 그의 ‘규율 권력’에 관한 이야기는 병원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했다. 푸코는 권력이 단순히 억압하는 힘이 아니라, 개인을 특정한 방식으로 형성하고 규율하는 메커니즘이라고 주장했다. 병원은 단순히 병을 치료하는 곳이 아니라, 의료 지식과 기술을 통해 사람들을 특정 방식으로 형성하고 변화시키는 힘의 장(場)이라는 것이다. 진단, 검사, 치료, 그리고 생활 습관 개선에 이르기까지, 병원의 모든 과정은 개인의 몸과 행동을 규율하고 통제하는 섬세한 권력 작용의 그물망을 형성한다.


병원의 진단은 내 몸을 숫자로 번역했다. 뼈의 밀도를 수치로 보고, 그 숫자가 나를 규정하기 시작했다. -2.99. 단순한 숫자 하나가 내 몸의 상태를, 아니 어쩌면 내 존재 자체를 정의하는 듯했다. 나는 건강한가? 나는 평균에 도달해 있는가? 끊임없이 다른 숫자들과 비교되고 평가되었다. 푸코는 말했다. “권력은 억압하지 않고, 행동을 유도하며, 스스로를 규율하게 만든다.” 그의 말처럼, 병원은 내게 직접적인 강제를 가하지 않았다. 의사의 말과 진단서는 내게 더 나은 선택을 하라고 조언했지만, 동시에 내 몸에 대한 새로운 기준과 불안을 심어주었다. 건강에 대한 불안감, '정상'에서 벗어났다는 초조함, 그리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압박감. 나는 더 이상 내 몸을 이전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내 몸은  의료 권력에 의해 끊임없이 감시되고 규율되는 대상이 되었다.


골다공증이라는 진단을 받은 10월 내내 나는 우울감 속에 갇혀 있었다. 마치 몸속에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듯, 언제 부러질지 모르는 뼈에 대한 불안감이 나를 짓눌렀다. 이 숫자와 진단이 나를 옭아매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나는 이제 '-2.99'라는 숫자로 규정되는 존재인가?" "내 삶은 이제 골다공증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것인가?" 하지만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걷기 운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처음엔 의사의 권고대로 걷는 것을 목표로 삼았지만, 걸으며 느낀 것은 내 몸과의 새로운 대화였다. 발이 땅에 닿는 감각,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 햇살의 따스함, 그리고 내 몸에서 울려 퍼지는 숨소리와 심장 박동. 이 단순한 움직임 속에서, 나는 의사의 기준이 아닌 나만의 리듬을 찾아가고 있었다. 걷는 것은 단순한 치료 행위를 넘어, 나 자신에게 집중하고 내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었다.


걷는 동안, 나는 또 다른 질문과 마주했다. 이 숫자들은 내 몸을 규정할 수 있지만, 나의 존재까지 정의할 수 있을까? 나는 단지 '-2.99'라는 숫자, 골다공증 환자일 뿐인가? 나는 내 몸의 상태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 나의 삶을 구성하고 싶었다. 숫자에 매몰되지 않고, 나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골다공증이라는 진단은 내게 새로운 약속처럼 느껴졌다. '나약해진 몸'이라는 현실에 좌절하는 대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계기처럼. 내 몸을 새롭게 이해하고,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고민할 기회였다. 이제부터라도 내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내 몸과 진정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2.99라는 숫자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 몸의 '현재'를 가장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지표이며, 동시에 나를 불안과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낙인과도 같다. 그러나 나는 이 숫자를 단순히 약점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나는 '-2.99'라는 숫자에 갇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매일 걷는 발걸음과 함께 나의 몸과 삶의 경계를 다시 정의하고 있다. 매 걸음마다 나는 내 몸의 한계를  넘어서고,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간다. 이 숫자가 내게 던진 질문은 어쩌면 내 남은 삶을 탐구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시작점이 될 것이다. 


길 위에서 나는 여전히 묻는다. "나의 몸은 어디까지 나의 것인가? 나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바람을 가르며 걷는 동안에도, 그 질문은 끊임없이 나를 따라온다. 마치 내게 달라붙은 꼬리처럼. 그리고 나는 매일 그 답을 찾아간다. 걸음걸음마다 내 몸의 감각에 집중하며, 몸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내 몸의 이야기와 함께, 그 질문을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두 권의 책을 집어 들었다. 마치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의 지도처럼.


『몸의 일기』 (다니엘 페나크)

다니엘 페나크는 몸이라는 존재를 단순히 생물학적 구조가 아니라, 우리의 기억과 감정, 삶의 궤적을 담아내는 매개체로 바라본다. 이 책은 몸을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몸과 마음이 서로 연결되어 변화하고 나이 들어가는 과정을 탐구한다. 골다공증이라는 진단 이후, 내 몸과 새롭게 마주하며 느꼈던 생각들, 내 몸은 내 것이면서도 외부의 힘과 시간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깨달음, 이 이 책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페나크는 독자에게 몸의 이야기와 삶의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내는 기쁨과 슬픔을 전하며, 나로 하여금 내 몸에 대해 보다 부드럽고 열린 시선으로 대하게 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골다공증 진단 후, 내 삶은 단순히 건강을 관리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어떻게 나다운 삶을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확장되었다.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나에게 이러한 고민을 철저히 되돌아보게 한 책이었다. 가완디는 현대 의학이 생명 연장에는 탁월하지만,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질문에는 여전히 답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특히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우리는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존엄하게 살다 존엄하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이는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을 때 내가 처음 느꼈던 당혹감과도 연결된다. 단순히 '수치'로 규정된 나의 몸을 넘어서, '내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나만의 선택과 주체적인 삶의 태도에서 시작될 것이다. 이처럼, 가완디의 책이 제안하는 의료적·철학적 관점은 골다공증이라는 나의 현재 경험과도 깊이 맞닿아 있다. 내 몸의 변화를 수용하며, 어떻게 나다운 삶을 지속할 것인지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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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과 윌리엄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는 문학적 전통과 스타일은 다르지만, 시간과 고독, 가족의 붕괴라는 보편적 주제를 탐구하는 공통점이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신화적 세계와 미국 남부의 현실적 배경이라는 서로 다른 문화적 토대 위에서 두 작품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다양한 시각에서 조망한다. 이 글에서는 시간, 가족, 공간이라는 세 가지 측면을 중심으로 두 작품의 문학적 깊이를 비교하며, 각 작품이 독자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백년의 고독』은 시간의 순환성을 통해 부엔디아 가문의 역사를 신화적 서사로 그려낸다. 마르케스는 마콘도를 중심으로 시간이 직선적으로 흐르지 않고, 마치 강물이 굽이치듯 반복되고 되돌아오는 구조를 채택한다. 첫 번째 아우렐리아노와 마지막 아우렐리아노는 이름뿐만 아니라 성격과 운명에서 놀라운 유사성을 보이며, 이는 시간의 원형적 순환을 드러낸다. 이 시간의 순환은 부엔디아 가문이 고독이라는 숙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암시하며, 과거의 실수가 미래로 반복된다는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보여준다.


반대로, 『소리와 분노』는 시간을 파편화된 방식으로 다룬다. 포크너는 벤지, 퀸틴, 제이슨이라는 세 명의 화자를 통해 각기 다른 주관적 시간을 제시하며, 시간은 개인의 기억과 심리적 경험 속에서 왜곡된다. 벤지의 시점에서 시간은 무의식적으로 뒤섞이며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무너진다. 퀸틴의 시점에서는 시간은 절망과 집착의 대상이 되어, 그의 고통스러운 심리를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시간은 이 작품에서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들의 심리를 해체하고 가족의 붕괴를 가속화하는 역할을 한다.


마르케스는 포크너의 실험적 시간 구조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만의 신화적이고 순환적인 시간 서사를 구축했다. 포크너의 파편화된 시간은 개인적 기억과 내면적 혼란을 드러내는 반면, 마르케스는 시간을 가족과 공동체의 운명과 연결하여 더 광범위한 역사적 서사를 형성했다.


가족의 몰락은 두 작품의 핵심 주제다. 『백년의 고독』에서는 부엔디아 가문이 고독이라는 운명적 굴레에 갇혀 서서히 무너져 간다. 우르술라는 가족을 유지하려 애쓰지만, 각 구성원은 자신의 고독과 집착 속에서 길을 잃는다. 아우렐리아노의 전쟁과 레메디오스의 초월적 아름다움은 현실과의 단절을 상징하며, 마지막에 태어난 아우렐리아노는 마콘도의 소멸과 함께 가족의 끝을 맞는다. 마르케스는 가족의 붕괴를 통해 인간 존재의 필연적 고립과 운명적 한계를 탐구한다.


반면, 『소리와 분노』에서 컴슨 가문의 몰락은 가족 내부의 불화와 외부적 변화에서 비롯된다. 퀸틴은 가족의 명예를 지키려는 강박 속에서 스스로를 파괴하고, 제이슨은 탐욕과 냉소로 가족의 균열을 심화시킨다. 캐디의 추락은 남부 전통 사회의 몰락과 맞물려 가족의 몰락을 가속화한다. 포크너는 가족의 몰락을 통해 남부 사회의 변화와 그로 인한 인간적 고통을 탐구하며, 한 개인의 실패가 가족과 사회 전체의 붕괴를 어떻게 반영하는지를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마르케스는 포크너의 가족 서사에 감탄하며, 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백년의 고독』의 부엔디아 가문은 『소리와 분노』의 컴슨 가문처럼 몰락해가지만, 마르케스는 이를 역사와 신화의 순환 속에 배치해 가족의 몰락을 더욱 운명적이고 우주적인 관점에서 그려냈다.


『백년의 고독』의 마콘도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이 마을은 부엔디아 가문의 성쇠와 함께 생성되고 소멸하는, 라틴아메리카 문명의 축소판이다. 마콘도의 공간은 기억과 시간의 저장고로, 우르술라가 지은 집은 가족의 운명과 깊이 얽혀 있다. 마르케스는 마콘도를 통해 인간이 만들어내는 문명과 그 문명이 필연적으로 겪는 붕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반면, 『소리와 분노』의 컴슨 저택은 남부 귀족 가문의 몰락을 상징한다. 황폐해져 가는 저택은 가족 구성원들의 삶과 함께 점점 쇠락하며, 남부 전통 사회가 상징적 공간으로서의 힘을 잃어가는 과정을 반영한다. 포크너는 공간의 변화를 통해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몰락을 대비하며, 인간의 행동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한다.


마르케스는 포크너의 요크나파토파 카운티에서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신화적 공간인 마콘도를 창조했다고 한다. 두 공간 모두 단순한 배경을 넘어, 시간과 기억, 운명을 담아내는 상징적 장소로 기능하며, 인간 존재의 복잡성을 탐구하는 장으로 활용된다.


이 두 작품은 독자에게 단순한 문학적 즐거움을 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 무엇을 잃고 얻는지, 그리고 고독 속에서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지 묻는다. 그들의 문학적 시선은 우리가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방식을 풍부하게 만든다. 이러한 비교는 두 작품의 문학적 유사성을 확인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인간 존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이 두 작품이 좋았다면, 아래의 책들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추천한다.


『Home』(Toni Morrison)

토니 모리슨은 『Home』에서 고향을 잃은 인물들의 상처와 치유를 탐구한다. 시간과 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지배하는 심리적 힘으로 작용한다. 『소리와 분노』처럼 모리슨의 작품도 시간을 개인의 내적 여정을 담아내는 중요한 도구로 활용하며, 고통 속에서도 생존과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페드로 파라모』(후안 룰포)

룰포는 『페드로 파라모』에서 순환적 시간과 신화적 공간을 통해 인간의 상실과 기억을 그려낸다. 『백년의 고독』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상처와 역사를 품은 상징적 세계다.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깊은 서사적 무게와 초현실적 분위기로 독자를 매혹한다.











한국 착품으로는 

1970년대 한국 산업화의 어두운 면을 다룬 이 작품은 빈부 격차와 억압 속에서 가족의 몰락을 탐구한다. 『소리와 분노』가 남부 사회의 붕괴를 가족 서사를 통해 드러냈다면, 이 작품은 한국적 맥락에서의 사회적 불평등과 인간의 고통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짧지만 강렬한 서사는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김약국의 딸들』 - 박경리

박경리의 이 작품은 한 가족의 비극을 통해 한국 사회의 불평등과 전통적 가치관을 비판한다. 『백년의 고독』과 유사하게, 가족의 몰락을 통해 인간 존재의 고립과 한계를 보여준다. 깊은 통찰력으로 가족 관계와 시대 변화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탐구한다.










『채식주의자』 - 한강

한강은 이 작품에서 사회적 억압과 개인의 내적 갈등을 통해 인간 본성과 고독을 탐구한다. 채식주의자가 된 한 여성이 가족과의 갈등 속에서 소외와 정체성을 경험하는 과정을 여러 화자의 시점으로 풀어내며, 『소리와 분노』의 파편화된 서사와 유사한 문학적 실험을 선보인다.









이 책들은 각각 『백년의 고독』과 『소리와 분노』에서 다루어진 시간, 고독, 가족, 그리고 사회적 맥락 속에서의 인간 존재를 다양한 시각에서 탐구하며, 독자들에게 또 다른 문학적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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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만의 책장 - 여성의 삶을 바꾼 책 50
데버라 펠더 지음, 박희원 옮김 / 신사책방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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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만의 책장』을 펼치면서 처음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왜 우리는 여전히 이런 책이 필요한가?” 데버라 펠더는 여성 문학의 역사를 이야기하며 여성의 삶을 바꾼 50권의 책을 정리했지만, 역설적으로 이 목록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책들이 아직 그 자리에서 인정받지 못했는지를 상기시킨다. 여자만의 책장이라는 제목은 단순히 물리적인 책장이 아니라, 여성 작가들의 목소리를 모아 그 공간을 다시 만들어내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여자만의 책장』이라는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이었다. 울프가 여성 작가에게 필요한 조건으로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이야기했다면, 데버라 펠더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성만의 책장"을 제안한다. 여기서 "책장"은 단순히 책을 보관하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여성의 문학적 유산과 목소리를 보존하고, 나아가 이를 공유하고 확장하는 상징적 공간이다.


원제 "A Bookshelf of Our Own"은 "우리만의 책장"을 통해 여성 문학의 연대를 암시하며,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느낌을 준다. 이 책장은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공동체적이다. 각 여성이 자신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공간이자, 이를 다른 여성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연대의 장소인 것이다.


이러한 제목의 뉘앙스는 한국어 번역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여자만의 책장』이라는 제목은 여성 독자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고, 그것을 보관하며,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초대장처럼 느껴진다. 울프가 제안한 "방"이 창작의 독립성을 의미했다면, 펠더의 "책장"은 목소리의 축적과 공유를 뜻한다.


우리는 왜 여전히 "여자만의"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할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여성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은 오랫동안 문학사의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만의 책장』에 등장하는 수많은 작품들은 당대에 혁명적이었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서 울프는 여성 작가에게 필요한 조건으로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이야기한다. 여성에게는 경제적 안정과 창작의 독립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울프의 이 단순하고도 명확한 요청은 지금까지도 완전히 실현되지 못한 요구처럼 느껴진다. 여성 작가들은 여전히 공간과 목소리를 얻기 위해 싸우고 있다.


이 책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여성 작가를 기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전히 왜 "여자만의 책장"이 필요하며, 여성의 문학적 목소리가 여전히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는지를 묻기 때문이다. 문학사 속에서 여성 작가들은 종종 익명으로 작품을 발표하거나, 남성 필명을 사용해야 했고, 심지어 그들의 목소리가 사회적 위협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제인에어』의 샬럿 브론테는 "커러 벨"이라는 가명을 사용해야 했고, 그녀의 자매 에밀리와 앤 역시 필명을 사용했다. 이러한 역사는 문학이라는 공간마저도 여성에게 얼마나 닫혀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지금은 과연 얼마나 달라졌는가? 오늘날 여성 작가들은 여전히 출판계에서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다.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 남성 작가들의 작품보다 문학적으로 덜 평가받는 경향이 있다는 주장은 여러 연구를 통해 제기되어 왔다. 


예를 들어, 미국의 여성 소설가 아만다 필리파치(Amanda Filipacchi)는 2013년 뉴욕 타임스 기고문에서 위키백과가 여성 소설가들을 '미국 여성 소설가'라는 별도의 분류로 나누는 방식을 고발했다. 그녀는 이러한 분류가 여성 작가들을 문학의 중심에서 주변부로 밀어내는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다고 지적했다. 이는 여성 작가들이 남성 작가들보다 문학적으로 덜 진지하게 평가받는 문화적 태도의 일환이라는 비판으로 이어진다. (출처: 뉴욕 타임스, 2013)


또한, 페미니스트 문학 비평 연구에 따르면, 여성 작가의 작품은 종종 남성 작가의 작품에 비해 "개인적"이고 "감정적"이라는 편견 속에서 평가 절하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남성 중심적 문학 평가 체계가 여성 작가들의 작품 가치를 축소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출처: Feminist Literary Criticism)


이와 같은 연구들은 여성 작가들이 여전히 문학 평가와 시장에서 구조적 불평등에 직면해 있음을 시사한다. 다만, 이러한 경향은 주로 미국과 서구권의 문학 시장을 기반으로 한 결과들이라는 점에서, 다른 문화권, 특히 한국 문학계에서도 유사한 패턴이 나타나는지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여자만의 책장』은 단지 과거의 역사를 조명하는 책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열려야 할 문과 공간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내 책장은 어떤가? 『여자만의 책장』을 읽고 나서야 나는 내 책장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 안에는 남성 작가의 이름이 훨씬 많았고, 여성 작가들의 작품은 몇몇 특별한 예외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이것은 나의 독서 습관이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아마도 내가 접할 수 있는 환경 자체가 여성 작가의 작품을 주류로 제시하지 않았던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결국, 여자만의 책장이 필요한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는 여성의 목소리가 가득한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여성의 이야기를 기념하는 차원이 아니라, 문학의 균형을 회복하고 목소리의 다양성을 확장하기 위한 작업이다.


『여자만의 책장』은 여성 작가들의 이야기를 한데 모아 놓은 출발점이다. 그러나 이 책장이 완결된 작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목록에 포함된 많은 작가들이 한국 독자들에게는 낯설다. 이는 한국 문학 시장이 여전히 여성 작가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조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더 많은 여성 작가들의 이야기가 번역되고 출판될 때, 한국 독자들은 새로운 시각을 발견하고 자신의 책장을 더욱 풍성하게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여자만의 책장』이 시리즈로 이어진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현대 여성 작가들만을 다룬 후속작이 나온다면, 더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여자만의 책장』은 단순히 과거를 정리한 책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를 위한 청사진이다. 더 많은 여성 작가들이 그들만의 방과 책장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이 책장을 만들어가야 한다. 책장은 단순히 책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라, 목소리를 담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남성 작가의 작품이 포함된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나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뿐만 아니라,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자』나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역시 당대 여성의 억압과 고통을 다룬 작품들로, 여성 문제를 문학적 주제로 삼아 큰 영향을 미친 사례로 평가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만의 책장』이라는 제목이 주는 상징성과 메시지를 고려할 때, 모든 책이 여성 작가의 작품으로 구성되었다면 보다 명확하고 일관된 주제 의식을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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