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에서 "계엄령"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법적 조치가 아니라 국민의 상처를 담고 있는 검은 기억이다. 정해구의 『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은 이렇게 기록한다. “1980년 광주는 단지 지역적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 권력에 의해 자유와 생명이 유린된 참혹한 비극이었다.” 그 비극의 중심에 비상계엄이 있었다. 광주는 무자비한 계엄군의 폭력 아래 목소리를 잃었고, 민주주의는 칼날 위에 선 채 흔들렸다.
그리고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일요일은 한 주의 고단함을 씻어내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날이다. 그러나 그날 광주는 안식과 준비의 시간이 아니라, 칼끝 아래 놓인 공포의 시간이 되었다. 무방비한 일요일의 평화로움은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깊은 밤, 모든 것이 잠든 어둠 속에서 선포된 비상계엄령. 그것은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난 듯했다. 국민의 목소리를 억누르고 민주주의를 짓밟으려는 그 음험한 시도는, 분노를 넘어 경멸을 자아낸다. 하물며 새벽이라는 시간은 더욱 치졸하고 비겁하다. 모두가 방어를 내려놓고 잠든 그 순간을 노린다는 것, 그것은 단지 악한 행동이 아니라, 어둠에 숨어 흉괴를 꾸미려는 비열한 자의 전형이다. 괘씸하고도 괘씸하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는 그 시절을 지나온 이들의 상처를 이렇게 전한다. “우리는 모두 그날의 시간 속에서 멈춰 있다.” 비상계엄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진 폭력은 단지 과거의 고통으로 머물지 않는다. 역사는 언제나 반복될 가능성을 품고 있고, 그 공포는 살아남은 이들의 가슴속에 깊이 각인된다. 계엄령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법적 조치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그것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억누르며 과거의 악몽을 되살리는 암호다.
그 시절, 한 소년은 평범한 하루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광주는 점령당했고, 그는 친구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다. 도청으로 실려 오는 시신들, 빛을 잃은 얼굴들. 초를 밝히며 혼을 달래던 열흘의 시간은 단지 하루하루를 견디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년과 주변 사람들의 세계를 영원히 바꿔 놓았다.
한강은 묻는다. “왜 우리는 그 학생의 이름을 말하기 직전, 알 수 없는 망설임에 멈추는가?” 이 단순하지만 깊은 질문은 그녀가 왜 이 이야기를 써야만 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녀는 고백한다. "이 이야기를 통과하지 않고는 어디로도 갈 수 없었다"고.
『소년이 온다』는 광주라는 도시와 그곳에서 상처받은 이들의 삶을 통해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이 소설은 과거를 기록하며 동시에 묻는다. 우리가 이 비극을 잊는다면, 그날의 어둠은 다시금 우리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 나온 말처럼, "권력은 칼을 쥔 자의 것이 아니라, 그 칼을 바라보는 자들의 두려움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정국에서 다시 떠오른 계엄령의 망령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국민은 이미 한 번 그 칼끝에 당했던 경험이 있다. 우리가 두려움 속에 침묵하면, 권력은 그 칼을 휘두를 이유를 스스로 정당화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두려움은 과거와 닮아 있다. 칼끝은 여전히 우리의 눈앞에서 흔들리고 있고, 권력은 여전히 그 칼을 자신들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하려 한다. 하지만 칼을 마주 보는 이들이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김훈의 글이 강조하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두려움을 느끼더라도, 침묵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칼을 바라보는 이들의 두려움이 권력의 이유가 될 수 없다면, 그 칼은 아무것도 자를 수 없다.
한강과 김훈의 글은 다르지만, 공통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두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침묵해서는 안 된다. 두려움이 침묵으로 이어질 때, 권력은 이번처럼 가장 추악한 형태로 자신을 드러낸다. 침묵하지 않는 순간, 칼을 쥔 손은 흔들리고, 그 칼은 힘을 잃는다.
오늘의 계엄령의 그림자는 단지 과거의 반복이 아니라,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던지는 질문이다. 우리는 다시 두려움 속에서 침묵할 것인가, 아니면 그 칼끝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스스로의 목소리를 지킬 것인가?
계엄령 논란 속에서 어느 대형 신문사가 보여준 태도는 그야말로 "진실을 가장한 기만의 언어"였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렇게 말한다. "진실이 부정되고 거짓이 수단화될 때, 권력은 가장 추악한 형태로 존재한다." 이 신문사는 국민의 상식을 무시하고, 왜곡된 프레임을 통해 국민의 분노를 조롱한다. 그들은 국민을 똥멍충이로 보고, 진실을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왜곡하며, 허상을 마치 진실처럼 내세운다.
한편,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러한 권력과 거짓의 메커니즘을 더욱 날카롭게 꿰뚫는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단지 명령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행위가 만들어낸 참혹한 결과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회피했다. 그는 스스로의 무지를 무기로 삼아, 제도적 악의 일부로 기능했다.
오늘날, 비상계엄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권력자들은 이러한 태도를 떠올리게 한다. "나는 법을 따를 뿐이고, 나는 질서를 유지하려 할 뿐"이라는 그들의 논리는, 아이히만의 태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아렌트가 지적했듯, "악은 극악무도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평범함 속에서 자란다." 무지와 도덕적 무관심, 그리고 자기 성찰의 부재는 결국 권력의 가장 위험한 도구가 된다.
그러나 이번 계엄령이 실패한 이유는, 그나마 생각 있는 군 간부나 군인들이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변명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역사의 죄인이 되기를 거부하며, 아이히만 같은 존재로 전락하지 않으려는 결단을 내렸다. 이 선택은 단순한 거부가 아니라, 권력이 악의 도구로 작동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지였다고 본다.
그러나 아렌트의 경고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악의 평범성"은 단지 개별적 사례에 머물지 않고, 체제와 구조 속에서 반복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상황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거짓과 왜곡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작동하는 한, 국민은 그 칼끝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멍청한 권력자의 위험성은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역사가 끊임없이 경고해온 주제다. 예컨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떠올려보자. 리어는 자신의 권력욕과 판단력 부족으로 인해 자녀들과 나라를 모두 파멸로 몰아간다. 그는 자신이 옳다는 착각 속에서 자멸로 향했고, 결국엔 고통 속에서 무너졌다. 오늘날의 무지한 권력자는 마치 리어 왕처럼 자신의 판단이 나라를 파괴로 이끌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 채, 현실을 부정하며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리어 왕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가장 큰 비극은 통치자의 눈이 가려졌을 때 시작된다." 오늘날 우리는 이 경고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무지한 지도자의 결정은 단지 어리석음을 넘어선 재앙이 될 수 있다.
또한, 로마 제국의 칼리굴라 황제는 권력의 절대성을 믿으며 비이성적 결정을 남발했던 전형적인 지도자였다. 칼리굴라는 반대 의견을 "반역"으로 치부하며, 자신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이들을 제거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결국 그의 어리석음은 제국 전체를 위기에 빠뜨렸다. 이처럼 두려움 속에서 국민을 지배하려는 멍청한 권력자는 늘 같은 길을 걸어왔다.
이러한 지도자들은 공통적으로 모든 비판을 "괴담"으로 치부한다. 이는 그들이 두려움과 무지를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무지를 당당히 정당화하며 국민의 불안을 정치적 도구로 삼는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적으로 경고한다. 무지한 권력자는 끝내 자신뿐만 아니라 국민과 국가를 파멸로 몰고 갈 뿐이다.
우리는 더 이상 무지한 권력자의 배 위에 올라타 있지 않을 것이다. 그 배가 침몰한다면, 우리는 진실을 붙들고 헤엄칠 것이다. 대형 신문사가 국민을 조롱하며 내세우는 허상은 결국 부서지고, 그 잔해 위에서 진실은 다시 빛을 볼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대한민국은 여전히 "계엄령"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움츠러드는 상처를 안고 있다. 그러나 이번 비상계엄령 논란은 단지 과거의 반복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축적된 부정과 불의가 폭로되는 전환점이었다고 생각한다.『퇴진하라』에서 지적된 대로, 부패한 권력은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거짓과 왜곡을 반복한다. 그러나 국민의 분노는 더 이상 가라앉지 않는다. 이번 비상계엄령은 그 임계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다시 권력을 잡으려는 이들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절망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우리 국민은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며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온 저력을 가지고 있다. 모두가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친다면, 나라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현명한 지도자를 선택하고 더 나은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지금까지 수없이 속아왔어도, 그 희망만은 여전히 놓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