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댓글 없어져서 먼댓글 형식으로 씁니다. 제 페이퍼는 [가면으로서의 여성성]입니다. 쟝쟝님의 댓글을 옮겨 놓습니다.
하.................... 오늘 나도 라캉 알튀세르 정신분석 유물론자들 칸 정리하다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한 숨 쉬면서 루티 언니 (맨 윗칸에 바나나 위용 당당하게 위치해있음) 째려보고 왔기에. 이 페이퍼에서 찌지뽕을 왕창 누릅니다. 두번 세 번 두 번 ㅅ ㅔ 번 누르다가 눌렀나요? 눌러졌지요?
˝라캉은 이를 ‘주체성 그 자체의 특권‘이라고 부른다.(112쪽) 그건 또 대체, 무슨 말인가.˝
저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주체성 그 자체의 특권. (아직 단발님이 읽으신 거기까지 못 읽었어요.) 다 걷어차버린 존재 자체에 대한 존재 스스로의 불안이요. 단발님은 예외입니다. (깊게 숙고된 종교는 거기를 메꾼다는 것이 제가 가진 일종의(?) 이론입니다) 계속 베끼고 베끼고 베끼면서도 대타자를 계속 걷어차야하거든요. 실존주의 냄시 나게 말하자면 계속 기투해야하는 건데. 그 불안... 그 밑바닥에서 고고한 불안... 그게 일종의 특권이라는 말로 저는 이해됩니다. 합니다. 그 뒤에 그 속에 그 안에 본질. 혹은 어떤 무언가가 작용할 거라는 것은 타자들의 환상일 뿐 주체 스스로는 인식하고 있죠. 내 얼굴에 찰싹 달라 붙어 있는 내가 연기하고 있는 가면을. 젠더 관점 쫌 더 섞어보면, 자기가 떨고 있는 그 허세를 똑바로 볼 줄 아는 여성의 도전에 대한 일종의 신경증적 반응일까요? 철학에 도전하는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반응은? 거기에 대한 안심까지 시켜주시는 넓디 넓은 루티의 헤아림이 하이힐?
좀 멀리 갔는 데... 카사노바 호텔에서 아니 에르노가 본인의 섹스를 그렇게 묘사하는 장면이 있어요. 기억이 잘 안나는 데 일종의 수행성. 시뮬라시옹? 섹스-쾌락 저도 잘 모르지만. .. 거기에 무엇이 있다고 혹은 없다고 그것이 억압되어 있다고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지 않고 또 말하지 않는.성기 결합외의 그 입과 눈과 귀들이 행하는 일련의 모든 것.을 섹슈얼리티라고 한다면. 왓이즈섹스. 는. 너무도. ‘지성적‘인 질문이다. 저급하지도 더럽지도 역겹지도 혹은 수치스럽지 않은.
그러나 왓 이즈 섹스 를 존재론적으로 질문하는 여자는 얼마나 부담스러우며 그것의 실재에 닿고자 하는 여자는 또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이 댓글을 읽자마자 『만화로 읽는 3분 철학 3』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이 사진을 가져오려고 이 글을 쓰는 겁니다. 투비처럼 댓글에 사진 첨부 가능하면 댓글로 썼을 듯 합니다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라캉이 말한 '주체성 그 자체의 특권'을 쟝님은 '다 걷어차버린 존재 자체에 대한 존재 스스로의 불안'이라고 쓰셨는데, 그 말은 이 그림과 딱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아요. 주체성 그 자체의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됐지만, 항시, 항상, 1년 365일 24시간,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죠.
존재 스스로에 대한 불안을 숙고된 종교가 메꾼다는 쟝님의 문장에 동의합니다. 인간이 삶의 주인으로, 더 구체적으로는 '신 없는' 삶 속에서 살아가고자 할 때 여러 분투가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신 '없는' 시대, 신이 없다고 믿는 시대이긴 하죠. 이성애 가부장주의가 오랫동안 그 자리, 신의 자리를 차지했다면, 이 시대의 주인공은 '돈'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구요.
저는 신심이 깊은 사람도, 종교에 깊이 침잠된 사람도 아니어서 잘은 모르지만요. 삶의 주체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신을 자신의 삶 속에 받아들인다는 그 '상태'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강신주의 이 말이 떠오릅니다. 이전에 제가 애정했던,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는 강신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의 인문학적 잣대, 철학의 잣대로 ‘네가 주인이니 예수가 주인이니?’ 이걸로 몰아가야 하는 거예요." (『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113쪽)
저는 강신주의 저 문장을 읽고, 인본주의 사상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정의로서의 인본주의, '인간의 존재를 중요시하고 인간의 현재적 소망과 행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인본주의의 핵심이 아니라는 거요. 핵심은 누가 네 삶에 주인이냐,고 묻는 거죠. 예수가 주인이라고? 예수가 네 삶의 주인이야? 그럼 너는 노예야. (강신주가 이렇게 말했다고 저는 추측합니다) 네가 주인이어야 해. 네가, 네 삶의 주인이 되어서 이 불안과 고뇌에 맞서야해. 감당해야해. 하지만, 그렇게 할 때, 너는 주인이야. 너의 삶의 주인. 너는 어른이야. 네 삶의 최종 결정권자가 너야. 의지하지 않는, 기대지 않는. 혼자의 힘으로 서 있는.
그럴 때. 그렇게 살아가겠다고 할 때. 혼자만의 고뇌, 혼자만의 고독, 분투, 버둥거림은 모두 '특권'으로 이해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유롭고 괴로운 주인의 삶, 순종이 요구되지만 불안은 덜할 것이 분명한 노예의 삶. 그 사이의 결투 혹은 혈투가 '주체성'을 획득하려는 인간 모두에게 숙제로 주어진다고 보고요.
노예의 삶을 선호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누구나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아주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구멍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그 구멍을 채울 다른 '인간적인' 방법이 존재하지 않음을 발견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항복'을 선언합니다. 그냥 선언만 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부릅니다.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부릅니다. 크게도 부릅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 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