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여성과 남성 현대의 지성 39
조혜정 엮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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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이 쓴 글을 한국어로 읽는 기쁨에 더해, 어려운 이론을 술술 풀어주는 것에 더해, 이 책의 백미는 '정리'에 있다. 이제까지 읽어왔던 여성주의 이론과 대략적인 역사, 여성주의 운동 뿐 아니라, 이것이 우리 사회, 분단된 한국 사회에 어떤 방식으로 '접목'되어 왔는지가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잘 읽힌다는 특장점은 저자에 대한 존경심을 더욱 진지하게 만들어준다.




사람마다 공명하는 지점이 다르겠지만, 공통으로 이야기되는 부분은 역시 제주도를 다룬 6장, <'발전'과 '저발전' : 제주 해녀 사회의 성 체계와 근대화>일 것이다. 스스로가 베짱이라 생각하는 나는, 심사가 단정하지 못한 나는, 제주 여성들이 겪어온 삶의 굴곡과 어려움에 대해 느낀 분노의 감정보다 제주 남성들이 살아낸 '고귀한(?)' 삶에 대한 부러운 마음이 오히려 압도적이다. 생계를 책임지는 아내, 아이들을 건사하는 아내, 고된 물일과 끝없는 밭일, 집안일을 전담하는 아내에게 받은 돈으로 '작은각시'와 생활하는 그런 인생. 그런 삶을 정당화하는 문화. 그 문화를 당연시하면서 살아가는 삶. 그 일생. 그 인생.




텔레비전의 보급이 제주도민들의 생활 변화를 가져온 부분은 특히나 인상적이다. 섬에 고립되어 살고 있는 자신들과 다른 삶, 육지에 대한 동경이 극도로 계급화된 모습으로 그려질 때, 그것이 텔레비전이라는 권위를 등에 업고 나타났을 때, 고단한 삶을 탈출할 하나의 답으로 여기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음이 있다.





더 쓰고 싶은 부분은 '전업주부'에 대한 부분이다.




가정일을 실제로 누가 주도하든 경제적 자립 가능성이 없고 가사일이 정당한 사회적 평가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정에 고립되어 잇는 비취업 주부는 통괄권을 쥔 남편에게 궁극적으로는 종속될 수 밖에 없음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227쪽)



장기적으로 볼 때, 비취업 가정 주부의 삶의 형태는 없어지거나, 있더라도 순수한 선택에 의한 하나의 삶의 형태로 남아 있게 되어야 할 것이다. (258쪽)




2015년에 권인숙 씨가 한 팟캐스트에 출연해 간통제도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다가 '전업주부'에 대해 언급했다. 당시에 나는 전업주부였고, 그 이후로도 오랜 기간 전업주부였다. 지금은 일당제 단기 계약일을 하고 있지만, 자동으로 계약 연장이 되지 않는 일이라 내년을 장담할 수 없는 그런 처지이기는 한데, 일단 현재로서는 전업주부는 아니다. 그때의 나, 2015년의 나는, 권인숙 씨의 그 말이 조금 아쉬웠는데, 이 부분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갖고 계신 분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에 대해 좀 서운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2015년의 내 글은 그런 나를 변명하는 의미가 강했고, 그때로서는 그게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 내 삶에 대해, 나는 어떤 식으로든 이해해야 했고, 받아들여야 했으니까.




이 책에서 조한혜정 선생님의 비슷한 표현을 읽고 난 후에도, 나는 그때처럼 발끈하지는 않았는데, 그건 나의 위치가 바뀌어서라기보다는, 내 생각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여성의 노동, 재생산 노동을 위시한 각종 돌봄노동이 돈으로 환산되지 않았을 뿐이지 엄밀하고 적확한 의미에서의 '일'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노동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계약 관계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할찌라도, 이 사회를 작동케 하는 강력하고 의미 있는 활동임에는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어떤 여성이 '남편을 살뜰히 보살피고, 아이들을 잘 건사하고, 부모님에게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는 일'에 기쁨을 느낀다면, 그 와중에 자기 자신을 보살피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그런 삶이 행복하다고 한다면, 나는 그러한 삶, 그러한 결정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순간순간의 작은 생각들과 자기만의 것이라 여겨지는 소소한 판단과 결정을 지배하는 문화의 힘과 자본의 거대한 압력 속에서 어느 영역에서 타협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건, 결국 본인이라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나는 마리아 미즈의 마지막 충고를 기억하고야 만다. 여성성에 대한 중산층적인 이상화를 비판해야 한다. 네, 그럼요. 비판해야지요. 일단 저는 저를 좀 비판하고, 저의 게으름을 한탄하고, 저의 배고픔을 달래야겠습니다. 그 담에 제가 야무지게 중산층적인 이상화를 비판할게요. 진짜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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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8-05 0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각의 변화에 닿기까지 치열하게 사유해 오신 단발님께 박수를 짝짝짝! 내 감정에 적합한 분석 섞인 말들을 만드는 과정에서 가끔 감정이 변하기도 해요. 그러니까 고급스럽게 말하면 내가 나의 조건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는 것일텐데….

저는 그게 어떤 해방감을 주는 것 같고…. 그래서 여성주의 읽기가 참 좋아요!

2015년의 글을 읽어봐야하겠는데… 졸립니다… 베짱이를 꿈꾸는 개미는 뚠뚠 노동하다 열두시 알람이 울려 댓글달고 갑미다 :)

단발머리 2024-08-06 12:29   좋아요 0 | URL
저는 여전히 전업주부에 대한 그런 시선이 불편하고 또 기분 나쁘지만... 네, 예전보다는 덜 기분 나쁘네요. 제가 현재 일을 하기 때문이라고는 생각지 않고요. 쟝님 말대로 조건에 대한 해석이 바뀐건데..... 온 세상이 그렇게 보고 있다는 걸 받아들인 거니까 일종의 체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성주의가 주는 해방감을....... 누려할 시간입니다. 허나 그럴려면 먼저 읽어야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4-08-05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읽기를 잘한 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특히나 제주도 여성들에 대해서라면 막연하게 제주도 여생들이 억세다, 강하다는 말을 듣는 그 배경에 대해 알게된 게 좋더라고요. 억세다, 강하다 라는 말로는 감히 다 담을 수 없는 그들의 삶이요.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단발머리 님!

단발머리 2024-08-06 12:31   좋아요 0 | URL
제주도 여성들 어떻게 살아왔던건지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놀라울 뿐입니다.

함께 읽을 수 있어서 저도 많이 기쁩니다. 다락방님이 계셔서 이 모임이 이렇게 오래 착착 야무지게 진행되고 있네요!!

2024-08-05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8-05 1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4-08-05 15: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마지막 두줄 왜 이리 귀여우십니까? ㅋㅋ
이 책 정리가 잘 되어 있다고 많이들 칭찬하시는 거 보니 다시 페미니즘 책 읽을 때 읽어봐야겠군요..
그런데, 커피 두 잔 다 단발님 거예요?

단발머리 2024-08-06 12:37   좋아요 1 | URL
이 와중에 저의 귀여움을 발견해주시는 독서괭님은 진정 매의 눈이시며, 안목의 여왕, 이 시대의 참 알라디너되십니다!!
이 책 정리 잘 되어있어서 전 강추이고요. 아쉬운 점은 편집과 디자인이 많이 올드하다는 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른쪽 바닐라라떼가 제것이고요 ㅋㅋㅋㅋㅋ 왼쪽은 머스캣 피치 아이스티인데 큰아이꺼입니다. 전 한 번에 한 잔 마시는 사람이오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4-08-06 14:21   좋아요 2 | URL
안녕하세요? 한 번에 두 잔 주문도 마다않는 다락방 입니다!!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4-08-06 14:23   좋아요 1 | URL
☕️🍺🍷🍹🍾🍸🍵🥤🍶🧋 두 개만 고르세요ㅋㅋㅋㅋㅋ

독서괭 2024-08-06 14:40   좋아요 1 | URL
🤣🤣🤣🤣🤣 책 읽으며 두잔 마실 수도 있죠 뭐!! ㅋㅋㅋ

단발머리 2024-08-06 14:42   좋아요 0 | URL
☕️🍺🍾🍷🍹🥂🍸🍵🥤🍶🧋중에서 세 개 고르세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