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의 세 번째 책이다. 이런 거 다 부질없지만 굳이 매겨보는 나만의 고닉 랭킹. 1. 상황과 이야기 2. 사나운 애착 3. 짝 없는 여자와 도시 4. 멀리 오래 보기(읽는 중). 이 책은 사나운 애착의 다음 이야기 같은 느낌이기는 한데, 워낙 『사나운 애착』이 사나워서, 나름 순한 맛으로 느껴진다. 제일 좋았던 부분은 우정에 대한 글이다.
깐깐하고 까칠하고 쉽게 곁을 줄 것 같지 않고, 아무튼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사람은 아닌데, 고닉이 진짜 좋다. 점점 좋아진다.
2.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그럼 오빠는 왜 싸우는데요?"
세상을 바꾸려고, 라고 그는 말했었다. 학생 시절에 그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모든 조직에 속해서 가장 험한 현장에서 가장 격렬하게 싸웠던 이야기를 그는 자주 들려주었고 그래서 내가 언젠가 물어보았다. 세상을 바꾸려고. 그래서 그렇게 싸운 끝에 세상이 바뀌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게 그가 현장에서 30년을 보낸 지금, 그는 세상이 바뀌었다고, 자신이 세상을 아주 조금이나마 바꾸었다고 말할 수있을 것이다. 30년이나 지나서, 눈가에는 주름이 생기고 손목과 어깨와 허리가 수시로 아프게 된 지금에야 말이다. 싸워서 세상을 바꾼다는 건 그런 것이다. 주로 허리와 어깨가 아픈 작업이다.
"안 싸울 수는 없잖아요."
남편이 돌아누워 나를 쳐다보았다.
"열받으니까"
그건 그렇다. 남편이 팔을 뻗어 나를 품에 안았다. (67쪽)
이 책은 쓰고 싶은 말이 참 많았는데, 느낌과 감상과 생각들이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출퇴근의 위력은 가장 큰 변명거리이고, 나는 2주간 감기약을 먹었으며, 2시간 전에도 멈추지 않는 기침, 콜록콜록! 그럼에도 리뷰/페이퍼는 책을 읽는 '중'에 써야 하나보다. 한 가지는 기억이 난다.
사람은 모두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산다. 역사와 상황과 처지가 각 개인을 구속하는 양상과 현실을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아무튼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산다. 내 삶의 주연은 나일 수밖에 없고 (이 무슨... 자꾸 자기계발서 도입부와 같아지는..... ?) 결국 내 삶은 내가 꾸려나가는 거다.
글쓰기/책읽기 책들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을 세 권 고르라 하면, 나는 이렇게 3권을 꼽는다.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장강명의 『책, 이게 뭐라고』 그리고 이만교의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 이만교의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종종 나를 소설가라고 소개하면,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으니 행복하겠다고 부러워하는 회사원이나 주부들을 자주 만난다. 그때마다 나는 심히 의심스럽다.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고 있단 말인가? 어떻게 원하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지? 당신이 무의식 중에 정말로 원하는 것은, 회사원이나 주부로서 안정된 삶을 살면서 소설가나 화가를 보면,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으니 행복하겠어요!”라고 말하는 바로 그 삶이 아닐까?’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 19쪽)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고 있단 말인가?
원하지 않은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남성에게도 있겠지. 여성에게는 더 많다. 결혼을 하면 원하지 않아도 해야 하는 일이 3배, 9배 많아지지만, 결혼하지 않아도 여성은 남성보다 '원하지 않은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럼에도 이 질문은 그것 그대로 내게 큰 충격을 안겨줬다.
내가 원하는 삶이란 뭘까. 내가 바라는 거.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뭘까. 나는, 내가 그걸 원한다고, 그걸 바란다고 '말'하지만, 실제의 나는 그보다는 '그게 안 되는 변명 만들기'에 전력을 다하지 않는가. 안 될 이유를 먼저 찾는 나. 원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는 나. 내가 원하는 '진짜' 삶은 저기 저 멀리, 다른 곳에 있다고 말하는 나.
그래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거였던 거 같다. 사람은 각자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산다. 변명하기도 하고(변명 1), 또 다른 변명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변명 2), 결국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산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택한 그 삶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위한 사람을 위한 것일 때 나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을 숭상한다. 스스로 '희생'을 선택한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다른 사람을 돕기로 결정하는 사람. 열받으니깐. 짜증 나니깐. 이건 잘못된 거니깐. 자신의 삶을 보태서라도 이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나서는 사람. 그 일에 자신의 어깨와 허리를 내놓는 사람. 난 그런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러니깐, 외계인이 나오는 이 SF 소설, 정보라의 삶이 촘촘히 보이는 이 소설, 환경 소설이라 불러도 좋을 이 소설을 읽고 내가 내린 결론이라고 한다면, 나는 정보라를, 정보라의 남편을 존경한다는 거다. 나는 그들을, 그런 종류의 사람들을 숭상한다.
3. 가야트리 스피박, 타자로서의 서구
가야트리 스피박을 읽으려고 『타자로서의 서구』를 먼저 읽었다. 참, 잘한 선택이었다. 그전에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를 읽었다. 참, 좋은 결정이었다. 그럼에도 이 두 권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가야트리 스피박은 참으로 어려웠고 또 어려웠다. 이건 단순히 내 문제가 아니라 이 시리즈, 이 저자, 이 출판사, 이 번역가의 잘못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매우(?) 강하게 들었다. 한편으로는 이래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서발턴이 말하지 못한 거 아닐까. 이래서 어떻게 서발턴이 당신의 말을 이해하겠냐고요! 라는 공허하고 서글픈 외침이 거실 한 가득 메아리쳤다. 스피박에게는 닿지 못하겠지. 이런 순.
타자비판에 전제되어야 하는 자기비판에 대해 쓰고 싶기는 한데.... 아... 어렵다. 어려운건 패쓰. 내가 주워온 문단은 여기 두 군데다.
페미니즘 이론가에게는 무슨 일이 남아 있는가? 스피박의 대답은 교육에 있다. 만약 문학 교사가 미국 대학에서 학생들의 욕망을 비강압적으로 바꿀 수 있다면, 서발턴 여성의 정신극장을 비강압적으로 재배치하는 방식이 있어야만 한다(Mor-al Dilema' 참조). 스피박이 적극적으로 시골의 교육에 개입하기 훨씬 전에 <국제적 틀에서 본 프랑스 페미니즘>이 규정하듯이, 그녀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다. '젠더 훈련'의 대안은 상상이 가능하다. (168쪽)
어쨌든, 그녀는 제가 가르치는 일을 돕도록 했습니다. 당신이 인도에서 느낄 수 있는 특징 중 하나는 많은 수입니다. 따라서 채점해야 할 시험지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어머니는 진짜로 저에게 등수를 매기는 법, 채점하는 법, 심지어 그는 서명을 위조하는 법까지 가르쳐주셨습니다. 어머니와의 공모를 통해 어머니의 서명을 위조해가며 가르치는 법을 배우면서 관련 주제론은 아주 풍요로워집니다, 그렇죠? 그게 열한 살 때였습니다. 그 후 열일곱 살에는 돈을 벌기 위해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영어 과외를 했어요. 저는 오래전부터 가르쳐왔던 겁니다. (217쪽)
스피박의 어머니는 극빈층 과부들이 취업 자격을 갖출 수 있도록 돕고 있었는데, 11살의 스피박은 어머니에게 등수 매기는 법, 채점하는 법, 서명 위조하는 법을 배운다. 17살부터는 돈을 벌기 위해 가르쳤다. 그 어머니에 그 딸이다. 극빈층 과부를 도와주는 어머니의 딸이 말하는 전지구적 리터러시.
스피박을 더 읽긴 읽어야 한다. 읽어야 하는데, 하는데, 는데, 데......
4. 테일러 스위프트
아껴 읽는 책은 테일러 스위프트가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남긴 말을 정리한 이 책이다. 여기에도 심상치 않은 10살 아이 등장한다.
열 살 때는 밤에 말똥말똥 눈을 뜨고 누워서 우레처럼 환호하는 군중을, 무대로 걸어 나가는 저를, 조명 불빛이 처음으로 비추는 저를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때 전 늘 계산했어요. 그러면 어떤 기분일지가 아니라 정확히 어떻게 해야 그 자리에 설 수 있을까 곰곰 궁리했어요.
-2007년 12월 3일, 《컨트리 위클리 Country Weekly> (33쪽)
타고났구나 이런 생각보다는, 이런 사람이야말로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 감동은 대부분 그런 사람에게서 온다. 과하다, 하는 정도의 집착과 한결같은 끈질김, 그리고 성실함. 뭘 했어도 성공할 게 분명한 사람들에 테일러를 더한다. 진작에 고닉을 더했고, 2주 전에 정보라를 더했다. 저번 주에 스피박을, 어젯밤에 잭 리처를 더했고, 오늘은 테일러를. 테일러를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