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성
『공포의 권력』을 읽는다.
<아브젝시옹과 성스러움>, <감정의 문화정치>,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페미니즘의 개념들>, <쥘리아 크리스테바>에서 ‘아브젝시옹’, ‘아브젝트’ 부분을 찾아 읽었다. 마침 가족 중 한 명이 핸드폰을 교체하게 되어서 ‘밀*의 서재’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전자책의 ‘검색’ 기능을 야무지게 잘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건수하님이 소개해 주시고 다락방님이 추천해 주신 <경계에 선 줄리아 크리스테바>도 읽고 싶었는데, 그러다가는 <공포의 권력>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아 대충 이쯤에서 접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음식물에 대한 혐오’를 가장 오래되고 기본적인 형태의 아브젝시옹으로 본다. 또한 배설물, 오물, 땀 등과 같이 육체에서 발산된 것들 가운데 오물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 시체이기에, 시체가 오물 중에서도 가장 역겨운 것(24)이라 여겨진다고 본다. 음식물이나 성적인 것과 관련된 물질을 배제하고, 한편으로는 배제 행위 자체가 신성함을 수립(42)하도록 작동하는 아브젝시옹은 ‘나르시시즘의 전조건’이기도 하다.
어떤 관념이나 사조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할 때, 그 원인을 추적하고자 할 때, 시작점은 당연히 역사다. 사람들은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나. 언제부터 이런 생각들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상식으로 받아들여졌는가. 여성학 공부에서 <가부장제의 창조>라는 책이 중요한 이유가 거기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의 재생산 능력이 남성에 의해 이용되고 상품화된 이후, 여성이 ‘축적 가능한’ 사유재산으로 취급받는 일이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성서 시대를 거쳐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는지를 알아야만 현대까지 이어져 오는 여성의 성 상품화와 성매매에 대한 다층적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브젝시옹은 왜 중요한가. 아브젝트는 왜 중요한가. 크리스테바는 지금 아브젝시옹과 아브젝트 개념으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무엇을 말하기 위해 아브젝시옹을 이야기하는가.
어머니는 주체로서의 나의 존재를 보증하는 대상이자 또 다른 주체이다. 또한 내가 최초로 욕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대상이다. (65쪽)
나는 아브젝시옹과 아브젝트의 개념이 ‘미소지니’의 원료로 변용되는 기점이 여기라고 본다. 즉, 생애 초기에 자기 자신과 외부 세계를 인지하는 과정에서 어린 아이가 어머니를 욕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동안, 아이 내부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혼란과 갈등을 극복하려는 과정으로서 아브젝시옹이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건수하님의 페이퍼 일부를 옮겨본다.
아브젝시옹
- 주체는 자신의 아브젝트를 배제 · 추방함으로써 그 경계를 통해 주체로서의 특권적 위치를 구현하고, 사회 역시 경계를 설정한 뒤 반사회적 요소들을 몰아내거나 억압함으로써 질서를 확립한다.
즉, 주체가 자신의 일부라 여겼던 어머니를 외부로 인식하고, 최초로 욕망하던 존재였던 어머니를 배척하면서 주체로서의 특권적 위치를 구현하는 일을 통해 통합된 일체로서의 구별화된 개인으로 만들어져가는 과정 가운데 아브젝시옹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의 <줄리아 크리스테바, 혐오스러운 매력의 영역으로>에서 조광제는 ‘버리는 것들에 대한 관심’으로 글을 시작하는데, 개인의 삶과 사회 공동체의 삶을 위해 ‘취하는 것’과 ‘버리는 것’ 간의 구별과 실천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삶을 위해서는 ‘취하는 것’ 못지않게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데, 크리스테바의 작업이야말로 이러한 ‘분비, 배출, 배제, 축출, 유기’에 대한 의미 있는 연구였다고 평가한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와 크리스테바의 ‘아브젝트’를 비교한 것이 흥미롭다.
크리스테바의 '아브젝트'는 일체의 이분법적인 경계 전체의 바깥에 존재하는데, 이 아브젝트를 축출하는 것이 주체가 자아를 형성하는 데 필수적인 조건이 됩니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와 크리스테바의 '아브젝트’, 이 두 개념은 한 쪽은 사회적이고 다른 쪽은 개인적이라는 점에서 다르긴 하지만, 그 구조가 워낙 유사합니다. 그런데 크리스테바는 개인과 사회집단의 현존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보면서, 사회는 모성적인 내지는 여성적인 것을 아브젝트로 축출함으로써 그 현존을 유지한다고 봅니다. 크리스테바에게서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는 바로 모성과 여성성이었던 것입니다.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이북)
모성적인 것, 여성적인 것이 아브젝트로 축출된다. 왜 그럴까? 왜 사회는 모성적인 것, 여성적인 것을 아브젝트로 축출하려 하는가. 시작점은 ‘오염’이다. 오염의 대상은 두 종류인데, 그중 하나는 배설물과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월경수이다. (116쪽) 이해할 수 없는 방식, 이해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반복되는 월경은 지금도 그렇겠지만 인류 초기에는 더욱 남성과 여성의 동일성을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요인이었다. (116쪽) 다른 배설물과 달리 월경수는 여성 자신의 힘으로 조절하지 못하는 육체 활동이다. 피를 흘리는 여성에게서는 특유의 냄새가 났고, 야생동물은 멀리서도 그 냄새를 맡고 쫓아왔기에 월경 중인 여성은 사냥 활동에 참여할 수 없었다. 월경은 당연히 여성 고유의 능력인 출산으로 연결된다.
<여성 혐오가 어쨌다고?>에서 임옥희는 “여성은 힘이 없었기 때문에 혐오의 대상이었던 것이 아니라 여성이 갖고 있었던 힘 때문에 혐오와 매혹의 대상이었다.”고 말한다. (88쪽) 그 두려움과 경외감은 여성의 출산 능력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장 강렬한 욕망의 대상이었던 어머니가 출산 행위를 통해 가장 오염된 상태에 이른다. 나는, 아이는, 개인은 그런 어머니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탈출해야 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어머니와 아브젝트의 관계, 상호주체성의 문제, 여성과 글쓰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쓰도록 하자. 일단 좀 쉬고. 친구가 알려준 논문을 하나 읽고 (후기-근대 “전문엄마”의 자리에서 읽는 크리스테바의 “아브젝트” 모성/백소영). 그리고 생각을 좀 더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