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험으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말에 회의적이다. 다른 경험이 다른 생각과 느낌을 전해줄 수는 있지만, 그것이 변화에까지 이르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좋은 양육 환경에서 행복하게 자랐던 어린 시절은 인생 전체를 돌아볼 때, 너무나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가난의 수모와 무언가의 결핍과 쓸쓸함과 고적함과 외로움이 인생 어느 순간에 자신을 만들어 가는 좋은 재료가 될 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좀 순진한 편이고, 아직도 세상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만약 경험이 그렇게나 중요하다면, 경험되지 않은 경험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게된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경험의 최대치가 상당히 축소된다. 이를 여성주의의 주제로 가져오면 더 복잡해진다. 당사자 혹은 피해자만 말해야 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너는 몰라, 너는 내 사정을 몰라, 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하지만, 세상 속에는 직접 경험한 사람들만 말할 수 있는 그런 일들이 있다. 소중한 사람을 갑작스럽게 사고로 잃은 일이 그렇고, 꽃같이 예쁜 어린 자식을 먼저 보내는 일이 그런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겪지 않은 사람이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그런 일들이 세상에 있기는 하다.

 


페이드 포의 저자는 7년 동안 성산업에 종사하였다. 글쓴이의 포지션, 누가 말하는가는 페미니즘의 중요한 이론적 주제이다. 모든 글쓰기는 자기재현이지만, 경험이 저절로 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경험은 정치적, 인식론적으로 선택되고 구성된 기억이다. 체험과 글쓰기는 또 다른 영역이다. 경험과 지식, 독서량과 무관하게 글에는 소재의 제한이 '있다'. 당사자이기 때문에 쓸 수 있는 글도 있지만, 실은 당사자이기 때문에 쓸 수 없는 혹은 쓰기 어려운 글이 훨씬 더 많다. (<추천사> 정희진, 글쓰기의 정치학과 윤리를 생각한다, 9)

 


이번에 두 번째로 읽는데도 참 힘들다. 나는 여성이라면 누구든 이 책을 읽는 일이 힘들거라고 추측한다. 그렇게 힘들게 한 줄, 한 줄 이 글을 써 내려갔을 저자를 생각하며 읽는다. 이 책은 그렇게 힘들게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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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0-19 11: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힘들면서도 짜릿하기도 해요. 한 여성이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이런 성찰을 하고 그걸 보여주는 글쓰기를 한다는 것이 너무 좋은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이 글쓰기를, 말하기를 멈추지 않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힘들면서도 짜릿하게 읽고 있어요. 저는 레이첼 모랜의 이 책이 너무 좋아서 가슴이 벅찹니다.

자, 힘냅시다, 단발머리 님!!

단발머리 2023-10-19 11:31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어쩌면 이럴 수 있을까. 어떻게 경험으로부터 이런 통찰을 얻었을까, 그런 생각을 해요. 힘들면서도 짜릿하다는 다락방님의 그 말을 저도 쪼금은 이해할 거 같아요. 마치 근력운동과 같은 느낌 아닐까요. 힘든데 시원하고, 다 끝나면 개운하고요 ㅋㅋㅋㅋㅋㅋ(운동 1도 안 하는 사람의 상상)

독서괭 2023-10-19 1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힘들어요. 아까 잠깐 읽는데 다시 읽는 부분인데도 숨이 턱 막혀서 멈췄어요 ㅠㅠ 열다섯은 아이임이 분명하다는 부분. 너무 속상해요.

단발머리 2023-10-19 18:42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이에요. 우리 힘드니깐요. 든든히 먹고 힘내서 읽자구요. 저도 이제 막 저녁 먹고 이어서 읽으려고 합니다!

책읽는나무 2023-10-19 1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앞장들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읽기 시작했는데요.
그냥 숙연해지더군요.
뒷부분으로 넘어갈수록 읽는다는 행위가 만만치 않겠구나! 어쩌나...싶은 마음이 들었구요.
그래도 이 책을 읽는 시간이 무엇보다 값진 시간이 될 것이란 예상도 듭니다.
늘 그러했듯 말이죠.^^

단발머리 2023-10-19 20:29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쉽지 않은 책인데 그래도 꼭 읽어야하는 책이라서.... 우리 서로를 의지하며 이렇게 읽고 있네요.
책나무님도 간식 준비해두시고 든든한 상태에서 찬찬히 읽으시길요. 저 지금도 읽고 있어요^^

유수 2023-10-20 1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신 없어서 미뤄뒀는데 역시 읽어봐야겠어요. 고맙습니다

단발머리 2023-10-21 10:19   좋아요 1 | URL
읽기가 힘들어요, 유수님.... 근데 읽어야 되고 알아야 되서 읽습니다. 우리 같이 힘내서 같이 읽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