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 리우와 군만두
댓글로 달려니 길어서 따로 글로 씁니다. 댓글이니 DADDAY님께 다는 대댓글 형식으로 쓰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기 전에 엮여진 제 글(여기: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4482137, 켄 리우와 군만두)을 읽고 오시면 좋은데 읽지
않으셔도 되고요.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바빠요 ㅎㅎ) 하지만
그 글에 달린 DYDADDY님의 댓글을 읽으시면 이 글이 왜 나오게 됐는지 쉽게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죽음이 감정의 고통보다는 신체적 고통에 대한 공포라는 지적에 동의합니다. 그 공포가 타자의 죽음을 통해 선명해진다는 주장에도요.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욕망이 불멸에 대한 갈망을 일으켰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종교의 발명으로 이어졌다는 점에 대해서도
긍정합니다. 교회에서 중책을 맡은 사람은 아니지만 이 땅에 사는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간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기독교의 패악과 특별히 한국 기독교의 죄악에 대해 부끄러움과 책임감을 느낍니다.
종교적 제의가 정교화되는 과정 속에서 계급 사다리의 최고 위치에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정복지 ‘죽음’을 향해 돌진합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가 구체적으로 그려지고 그래서 죽은 자들을 위한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게 된 것이구요. 제가 궁금한 건, 이것이 모두 거짓이라는 걸 가정한 상태에서, 그럼, 답은 무엇이 될 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ㅎㅎ 대디님이 이런 질문이
제 삶에서 기인한 것 같다고 하셔서요. 저는 특별한 삶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고요. 평범하고 보통의 삶을 살았던, 그리고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걸음마를 배우자마자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데요, 가까이 살던
육촌 언니의 손을 잡고 교회에 나갔습니다. 이 말은 제가, 모태신앙이
아니라는 뜻이구요ㅎㅎ 제가 6학년 때쯤 엄마가 전격적으로 교회에 나가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죽을 것 같은 삶 속에서 다시 살 수 있던 힘을, 엄마는 예수님에게서
얻었습니다. 엄마는 새 생명을 얻었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충실히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이고요. 남편도 아이들도 모두
교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도 성장해서도 사고나 질병 등의 이유로 갑작스럽게 가까운 사람을 잃은
경험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의 의문은 순수하게 ‘지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확실한 건, 전 그냥 교회를 ‘다니기만’ 하는
사람은 아니고, 기독교의 교리와 신념을 진심으로 믿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저는 인간이 죄인이라고 생각하고(갑자기 신앙 고백 시간이 되었네요
ㅎㅎ), 인간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걸 믿고, 나를 아시고 내 삶을 계획하시고 나랑 함께
사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인격적인 존재로서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의 이러한 믿음과 신념이 사실은 고도의 세뇌와 문화적
강제에 의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 있겠지요. 가장
세련된 거짓말에 제가 속은 것일 수도 있구요. 마음의 평화를 위해 아닌데도 그런 척, 모른 척, 속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결국에 제 물음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옵니다. 내가 가진 답, 죽음과 불멸, 영혼에
대한 답은 이겁니다. 그럼, 당신의 답은, 당신의 패는, 당신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라고
말했습니다. 진화의 과정 어디에서도 영혼의 출현을 확인할 수 없으니,
영혼은 없다고 했고요. (다만, 본인은 왜 이렇게
명상에 심취했는지 그건 좀 밝혀주시기를 ㅋㅋㅋㅋㅋ) 불멸에의 탐구, 영원에의
갈망이 인간 뇌 속에 있는 신경 세포 다발들의 ‘속임’이라면, 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믿을 수 있다고, 그렇게 결론지을 수 있다고, 전 생각합니다. ‘자아’라는 총체가 좌뇌의 속임이고, 연속적인 나, 인지하는 나, 의
존재 역시 뇌의 속임이라고 주장한다면, 전, 그건 그대로
주의 깊게 들을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질문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그것이, 당신의 소중한
삶과 그리고 분명히 닥치게 될 죽음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게 답입니까.
오늘 하루를 즐겁게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소중히 대하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내일에
대한 기대를 간직하고 살아간다는 것. 그런 태도, 그런 삶의
자세가 죽음과 불멸과 끝없는 의미 추구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습니까.
제가 저번 주부터 읽고 있는 책은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입니다. 부조리에 대한 카뮈의 사상을 마무리하면서 저자는 이렇게 씁니다.
인간의 삶이 아무리 무의미할지라도 그 속에서 행복을
찾고 그 무의미를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부조리의 영웅이 되는 길이요, 우리의 부조리한
인간 조건에 대한 진정한 반항인이 되는 길이라고 카뮈는 역설한다. (46쪽)
부조리한 인간 조건에 대한 반항이 ‘살아내는 것’이라고 카뮈는 말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의미와 무목적성이 우리 삶의 결론이라면, 그렇게 스러질 나라면, 0으로 수렴될 나라면, 우주의 먼지가 될 나라면. 나는 왜 지금, 존재하는 것입니까.
저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배불리 먹고 누워서 사라질 날만을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닐까요. 저는
영웅도, 반항인도 되기 싫거든요^^ 만약 그것이 정말 해답이라면
말입니다.
믿음이란 설득의 문제가 아니기에 이런 과정은 필요 없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고민하고 생각해 볼 공통의 주제가 있다는 것에, 그 곳이 알라딘이라는
사실에, 마음만은 즐겁습니다. 알라딘 우주에서, 저는 하염없이 즐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