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156쪽까지 읽었는데, 이만큼 읽은 바로는 이 책은 페미니즘 ‘비평’ 보다는 페미니즘 ‘이론’을 정리하는 데 더 도움이 되는 듯싶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이라면 역시나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를 빼놓을 수 없겠다. 페미니즘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 이 책은 내게 정말 중요한 텍스트였는데, 그건 내가 처한 상황과도 관련이 있었다. 대학 교육을 받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결혼 후 아이를 낳고 전업주부가 된 케이스. 육아와 살림에 전념하고 다른 사회적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혹은 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의 여성. 나의 첫 페미니즘 도서였던 <빨래하는 페미니즘>도 이와 비슷한 스탠스를 가지고 있다. 저자 스테퍼니 스탈의 ‘페미니즘 각성’을 불러온 책도 바로 그 책 <여성성의 신화>다. 혹 이 책의 내용이 너무 오래되었다거나, 우리에겐 이미 다른 어젠다가 훨씬 더 중요하다, 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정희진 선생님의 해제 <베티 프리단, 우리를 출발선에 다시 세우다>를 권하고 싶다. 우리는 아직도 멀었다.
이 책에서는 프리단의 <두 번째 단계>를 더 중점적으로 다루는데, <여성성의 신화> 출간 이후, 20년이 지난 상황에서 프리단의 생각이 많이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변절 혹은 변심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 측면이 상당하다. 앨리슨 루리의 <테이트 가족의 전쟁>을 읽지 않은 상황에서 루리와 프리단의 생각(구체적으로는 <두 번째 단계>에 나타난 생각)의 비교를 이해하는 게 쉽지 않았다.
『여성성의 신화』에 나타나는 계급, 인종 이성애적 편견은 늘 비판의 대상이다. 프리단의 아젠다는 백인 중산층 이성애 여성이 가정에서 벗어나 중산층 백인 이성애 남자의 가치와 생활양식을 따르는 것이다. 프리단은 노동자 계급 흑인 여성의 경험은 교외의 가정주부의 경험과 같지 않고, 집밖에서의 일, 육체 노동이나 비전문직의 일은 남녀 모두에게 착취적이며 육체적으로 고단하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또한 프리단은 양쪽 부모가 모두 밖에 나가서 일하면 어린 아이들은 누가 돌보고, 집안일을 누가 할지에 대해서도 모호하다. 또한 동성애에 대해서도 인지하지 못하고, 핵가족 이외 생활 양식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여성성의 신화』 에서 프리단은 페미니즘이 초래하는 최악의 결과는 남성 동성애의 증가라고 지적한다. 마치 남성 동성애는 명백하게 회피해야 할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109쪽)
다만, 이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풀어 보자면, 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 비판의 상당 부분이 ‘사실’이기는 하되,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이를테면, 여기에 마이크가 100개가 있다. 마이크 100개를 서구 유럽 백인 이성애자 비장애인 ‘남성’이 독점하고 있다. 서구 유럽 백인 이성애자 비장애인 ‘여성’이 앞으로 나서서 그 마이크 중 ‘하나’는 내가 갖겠다고 말했다. 그에 대한 반응이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비판과 같은 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여성주의 운동사에서 백인 여성들의 ‘선점권 경쟁’이 과한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백인 남성이 흑인 남성을 억압하듯이, ‘자매애’를 부르짖던 백인 여성도 흑인 여성과 유색 인종을 억압했다. 그것 자체는 사실이다. 다만, 마이크가 한 개인데, 잡고 있는 그 마이크를 왜 너만 갖고 있느냐, 왜 너에게 먼저 발언권이 주어지는 거냐, 라고 묻는 건, 좀 안타까운 일이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다. 그건 잘못된 일이고, 비판받아야 하는 측면이 분명 존재하지만, 일단 마이크를 가져와야, 가져온 쪽에서 가위바위보라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지식이라는 건, 결국 중산층의 것이다. 너무 많이 가진 사람은 ‘고민’할 필요가 없고, 생활에 찌든 사람은 고민할 ‘시간’이 없다. 약간의 경제적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 여분의 시간에 ‘고민’하고,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 아닌가. 지식의 발명에 대한 위의 세 문장은 정희진쌤이 강연에서 여러 번 강조하신 말씀이다. 출처를 정확히 책으로 불러오면 좋을 텐데, 지금은 기억이 안 나는 관계로.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개인이 사회/이데올로기와 갖는 관계에 있어서 문화적으로 용인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고, 젠더 차이에 대해 규범적인(모순적이지만) 모델에 따르고 있으며, 정치적 행동과 진보와 변화에 대해 전통적인 입장을 고수한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우리 사회의 현재 있는 그대로의 구조를 유지하는데 노력을 투자하고 있으며, 그 구조 밖으로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이 점이 가장 큰 한계다. 그래서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페미니즘 이론이나 정치적 운동에서 가장 인기 있고, 동시에 가장 덜 위협적인 이유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그들의 아젠다를 전략적으로 동등권 법안을 통과하는 캠페인과 같은 특정한 페미니즘 목적을 위해 활용될 수 있다. (116쪽)
‘가장 인기 있고, 동시에 가장 덜 위협적인’이 중요 포인트다. 남자와 결혼해 남자와 살고, 아들을 낳아 키우는, 가부장제의 일부인 나 같은 여성에게 ‘먹힐 수 있는’ 페미니즘이다. 기혼 여성들을 포섭할 수 있는, 그들에게 접근 가능한 방법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생각을 소유한 여성들이 발견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한계’가 여기에 있다. ‘소수자 운동’으로 전락해서는 결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는 내 말을,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젊은 여성은 듣지 않는다. 듣지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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