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괜찮은 칼럼을 읽었다. <대통령 부인도 피하지 못한 ‘테이블 성차별’>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는데, 다 읽고 나서야 그 칼럼을 쓴 사람이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의 저자 이라영이라는 걸 알았다. 성차별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을 상품으로 대하는 현실을 지적하며 인용된 책이 『레이디 크레딧』이어서 더 관심이 가기도 했다. 칼럼의 한 대목을 인용하자면 이렇다.
사실상 이 사회는 잠재적으로 모든 접객원이 여성이라고 여긴다. 식품위생법에서 유흥종사자를 “손님과 함께 술을 마시거나 노래 또는 춤으로 손님의 유흥을 돋우는 부녀자”라고 정의했듯이, 유흥업소의 접객원은 곧 여성이다. 달리 말하면 여자는 유흥의 한 요소다. 공식 만찬장에서 보이는 우아한 차 대접과 어두침침한 뒷골목 업소에서의 유흥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시중을 필요로 한다. (한겨레신문, 2022년 6월 4일, <대통령 부인도 피하지 못한 ‘테이블 성차별’>)
긴 글보다 사진 한 장으로 훨씬 더 직접적인 설명이 가능하기는 한데, 사진은 이렇다.
남편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왔다면 내가 왜, 차 한 잔 대접하지 못하겠는가. 내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면 남편이 커피 내려 주는 일을 왜 마다하겠는가. 그건 평범하고 사소한 일이다. 하지만, 바이든은 일본 총리의 친구가 아니다. 바이든은 일본에 놀러 간 게 아니다. 바이든은 미국 정부와 국민을 대표하는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한 것이고, 일본 총리는 일본 정부와 국민을 대표해서 바이든을 응대한 것이다. 정확히는 “일본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싶다”는 일본 총리의 권유를 아내가 받아들여 바이든을 접대한 것이다. 일본 언론은 이것이야말로 “오모테나시(일본식 정중한 환대)”라며 일제히 보도했다.
이 사진을 볼 때 내가 느끼는 불편한 감정은 일본인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끝을 맺는다. 아, 너희는 아직도 이러고 사는구나. 이렇게 살고 있구나. 이런 사진이 당연한 문화, 이런 접대가 격려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구나. 하지만 당혹스러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유럽 혹은 미국의 여성들이 이 사진을 볼 때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아, 너희는 아직도 이렇게 살고 있구나. 이 나라는 아직도 여성이 이런 대접을 받고 있구나. 라고 말할 때, ‘너희들’의 범주에 검은 머리, 노란 피부의 내가 포함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일본은 유럽이에요. 일본이 그래요. 자기들은 유럽이라고, 동양의 유럽. 우리는 아니야. 우리는 이렇지 않아. 이건 일본의 얼굴이야. 이게 바로 일본의 국격이야. 라고 말하려다가.
한미 정상회담 후 가진 공동기자회견에서 미국의 워싱턴포스트 기자는 “지금 (한국의) 내각에는 여자보다는 남자만 있다”면서 “한국 같은 곳에서 여성 대표성 증진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남녀평등을 이루기 위해 어떤 일을 하려고 계획하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윤 대통령은 “지금 공직사회에서, 예를 들어서 내각의 장관이라고 하면, 그 직전의 위치까지 여성이 많이 올라 오질 못했다”고 답했다. (경향신문, 2022년 5월 22일)
이런 사람이 우리나라 대통령이다. 이 답변이 우리의 수준을 보여준다. 일본의 사진이 현재 일본의 얼굴인 것처럼, 이 대답이 우리의 생각이다. 이게 우리의 국격이고, 우리의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