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여성은, 크리스테바의 관점에서, 배설물과 월경이라는 두 가지 점 때문에 오염시키는 대상과 관계가 깊다. 이것은 여성으로 하여금 비체와 특별한 관계를 맺도록 한다. (37쪽)
월경은 여성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다. 출산 역시 여성만 가능하다. 하지만 생명체로서 이 세계에 존재할 때, 남성이든 여성이든 인간은 ‘동물’로서 존재한다. 먹고 마시고 잠자고 숨 쉬고 땀 흘리고, 그리고 배설하는 존재이다.
폴 로진은 원초적 혐오의 모든 대상은 동물이거나 동물적 물질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일부 사람들이 혐오스럽다고 느끼는 오크라 같은 끈적끈적한 식물은 예외적이다.) 혐오의 대상은 ‘동물성을 상기시키는 것’, 즉 우리 자신의 동물성과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상기시키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타인에 대한 연민』, 141쪽)
폴 로진의 주장에 따르면, 동물성에 대한 인식, 죽음에 대한 예지가 원초적 혐오를 불러온다. 동물에 불과한 인간이 자신의 ‘동물성’을 용인하지 못하는 것이다. 죽음을 예상케 하는 존재에 대해 인간은 혐오감을 느낀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지속적인 혐오를 수용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 남성은 그런 혐오의 감정을 투사할 집단을 찾게 되었고, 다수이며 대척점에 선 인간으로서 여성을 ‘타자화’했다.
이처럼 형이상학이라는 인식 체제는 여성 혐오를 필연적으로 내포합니다. 여성 혐오는 몸이나 육체성에 대한 혐오, 죽음이라는 유한성을 상기시키는 것에 대한 공포와도 밀접하게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형이상학의 이분법적 인식틀은 여성이라는 항에 몸, 감정, 정념, 쾌락, 가변과 사멸의 요소들을 응축해 넣어 여성을 허위이자 믿을 수 없는 것, 동물성, 표피성, 천박함과 미천함, 오염 등으로 열등 가치화합니다. (『지워지지 않는 페미니즘』, 134쪽)
몸, 육체성에 대한 혐오가 여성에게 속한 것으로 단정될 때, 여성이 감정적일 뿐만 아니라 동물에 가까운 존재로 폄하될 때, 인간이라는 카테고리에 부족한 종이라는 점이 계속해서 강조될 때, 혐오는 자연스럽게 믿어지고, 거부감 없이 반복된다. 혐오스러운 존재를 미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다. 혐오하는 대상을 조롱함으로써 자신이 그와 같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대 산업으로까지 확장 중인 ‘화장실 몰래카메라’가 그에 대한 가장 명확한 실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