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리뷰를 쓰던 페이퍼를 쓰던 해야 할 텐데, 또 이렇게 책도 안 읽고 뭔가를 쓴다. 희망도서로 신청했던 책을 선물처럼 받아온 지 어언 18일. 다음 주 화요일이면 책을 반납해야 하는데 무려 희망도서로 받은 책인데 열어보지도 않아서 주말을 맞이해 책을 펼친다. 그래, 이 책도 정희진 선생님 해제만 읽자. 그래도 되겠지? 아니면 또 어쩌리.
아무튼 책을 탁 들었는데 저자 이름이 익숙하다. 나는 기억력이 워낙 좋지 않아서 이 세상 모든 일이 매일 새롭고, 항상 새로우며 마냥 새로운 사람인데, 아, 이 이름 어디서 본 듯해. 그래서 물어보았다, 구글에게.
아, 『남성됨과 정치』의 저자 웬디 브라운의 이름을 나는 주디스 버틀러의 인적 사항에서 보았구나. 연인, 웬디 브라운. 버틀러와 브라운. 브라운과 버틀러. 이건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에서 읽었던 이야기다. 주디스 버틀러는 같은 대학 정치학 교수이자 파트너인 웬디 브라운과 살고 있는데, 버틀러가 전 남편과 낳은 아이를 두 사람이 함께 키웠다고 한다. 아이가 아직 어릴 때, 버틀러가 아들 이삭에게 물었다. 여자 둘이 부부인 우리 가족이 이상하지 않니. 이삭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그건 저에게 이상하거나 어려운 게 아니고요. 진짜 어려운 건 집안에 두 명의 학자가 있다는 거예요.”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89쪽)
직업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집안에 두 명 있을 때, 그 두 사람이 부모일 때, 자식이 느끼는 공부의 압박. 지금에서야 공부를 즐거움과 연결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하지만, 어린 시절 공부란 이 세상 제일 싫은 모든 일의 총합이 아닌가. (그렇지 않은 한국의 중고등학생이 있다면, 그들에게 축복을!)
개인적인 관심이 더해지니 서문도 읽어보기로 한다. 그리고 한국어판 서문(2021년)에서 만나는 이런 문장들.
내가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갔던 1979년 당시 정치학과에는 나를 포함해 여자 동기가 셋뿐이었다. 당시 학과장은 "여자들은 박사 학위를 받아도 쓸 데가 없어. 결혼하고 아이 낳으면 그만이야"라고 말하며 내가 장학금을 못 받을 거라고 알려주었다. 프린스턴 대학교는 개교 이래 상당 기간 동안 백인 남성 프로테스탄트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이었다. 내가 입학할 무렵에는 그 지배적인 문화를 들쑤시거나 뭔가를 요구하지 않는다면, 오래도록 배척해 온 우리 같은 존재에게 입학을 허용하는 정도의 관용을 베풀고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나한테 그렇게나 까칠하게 구는 곳을 접해 본 적이 없었다. (15쪽)
딱 한국어판 서문이랑 해제만 읽고 『소설의 정치사』로 돌아가는 것이 목표다. 오늘의 목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