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아침 메뉴는 연어 스테이크였는데, 아롱이가 싫다고 했다. 요리 못하는데 나름 곤조 같은데 있어서 소금을 많이 뿌리지 않는다. 소금을 뿌리긴 했지만, 조금 뿌려서 그런지 맛이 없다고 했다. 내가 먹어보니 괜찮은데... 나를 통째로 샅샅이 닮은 내 아들은 입이 짧고, 양이 적고, 까다롭고. 까다롭고,는 나 닮은 것 아니다. 나는 안 그런다.
『Lucy by the sea』와 『Oh, William!』에 비슷한 부분이 나온다.
두 딸 모두 에스텔이 요리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말했고, 나는 그 말을 듣기만 해도 지겨웠다. 나는 요리를 좋아해 본 적이 결코 없었다. (『오, 윌리엄』, 85쪽)
"No offense taken," I assured him. I have never been interested in food. (『Lucy by the sea』, 39p)
나는 먹는 건 좋은데, 만드는 데는 관심이 없다. 더 잘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내 요리 실력은 신혼 때의 그 실력 그대로다. 아이들에게 조금 미안하기는 한데,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고. 그래도 둘 다 나보다 더 크게 자랐으니, 여기서 뭘 바라나, 그런 마음도 있다. 소울 푸드, 영혼의 양식, 집밥이 유행하는 때가 되면 그래도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기는 한다. 나는 그런 엄마다. 맛있는 것을 해주지 않는 엄마, 먹고 싶은 맛있는 것을 만들어 주지 않는 엄마.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는 그런 엄마.
친구들의 책 선물이 도착할 때면 한 권씩, 때로는 두세 권씩 줄을 세워 사진을 찍어둔다. 곧 읽어버리리, 하는 결심은 국민의힘 단일화 과정처럼 이리저리 세파에 흔들려 새 책이 새 책에 밀리는 무색한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
나는, 새로 생긴 집 앞 스벅에서 모닝 세트 먹을 때 행복한 사람이고, 그럴 때 <바닷가의 루시> 읽는 사람이다. 나는 나에 대해서 그만큼, 딱 그만큼 기대한다. 나 자신에게 한없이 너그러운 나. 나는, 이런 나에 만족한다. 나는 한가로이 루시를, 윌리엄을, 루시와 윌리엄을 읽는 사람이다. 하지만, 책들 사이사이로 떠오르는 얼굴들을 생각하자면, 뭐랄까. 나에 대한 그들의 기대가 내 수준을 넘어설 때가 많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러니깐, 한 친구는 이름도 처음 듣는 작가의 책을, 그것도 원서로 들이민다. 항상 안 어렵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한 친구는 여유로운 시간에 읽고픈 나의 최애 소설책을 들이민다. 급하게 읽을 필요는 없지만 급박하게 읽고 리뷰를 꼭 쓰라는 말을 더해서 말이다. 한 친구는 그 소설가의 책을 3권이나 읽고도 이름 외우기에 실패한 나를 다독이며 그의 단편집을 살포시 쥐여준다. 김애란의 새하얀 신작과 함께 말이다.
나는 한가하게, 여유롭게, 무상무념의 내가 되어, 루시를 따라다닌다. 챗지피티에게 윌리엄이 그렇게나 많이 바람피운 이유를 물어본다. 루시의 다른 이야기 중 뭐를 먼저 읽을까 고민한다. 하지만, 친구들이 보내준 예쁜 책들, 근사한 책들 앞에서 하염없이 흔들린다. 읽어야 하느니. 읽어야 하느니....
엄마로서의 기대를 짐짓 모른체하는 내가, 친구들의 기대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가능할 것인가, 이 일이. 나란한 책들 위를 깨끗한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는다. 할 수 있을 것인가. 잘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