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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 ㅣ 오늘의 젊은 작가 9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평점 :
은영이 상상하기 어려운 두 사람의 시간은, 은영과 인표가 함께 보냈던 시간과 닮아 있을지 전혀 다를지 궁금했다.
마음속에서 부실한 선반 같은 것들이 내려앉는 소리가 났다. 어두운 곳에서 낡은 나사에 매달려 있던 것들이 결국에는 내려앉는 그런 소리였다. 여기 계속 있을 수 있을까. 아무렇지도 않게 있을 수도 있을 듯한데,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247쪽)
외국소설과 한국소설의 ‘좋음’ 지점이 다르다. 외국소설의 경우는 시대나 배경, 주인공의 성, 인종 등의 점프를 통한 ‘새로운 경험’이 소설 읽기의 중심이 된다. 나는 흑인이고, 남자아이고, 고아이다. 나는 미혼모의 딸이고, 그 동네에서 제일 가난한 집 막내딸이며, 그리고 워킹맘이다. 여기는 대학교 캠퍼스이고 여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이고 여기는 미국이어서, 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나를 상상한다. 한국소설은 다르다. 한국소설을 읽는 나는, 작가가 말하는 ‘경험’을 이미 경험한 사람이다. 나는 작가가 뭘 말하고 싶은지 알(것 같)고, 이상한 일인지 알면서도 왜 그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는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작가가 말하는 ‘마음속의 선반이 내려앉는 소리’가 뭔지 안다. 그래서 좋다. 언제 만나도 어색하지 않은 고등학교 동창과 통화하는 그런 기분이다.
넷플릭스 예고편과 유튜브 클립을 몇 개 보았는데 안은영 역에 정유미가 너무 잘 어울려 이 책은 정유미 때문에라도 영화화 됐어야 했다, 는 생각이 들었다. 한문 선생님이 좋아하는 배우인 건 감사한데 소설을 읽으며 상상했던 한문 선생님과는 많이 달라서 영화에서는 어떻게 그려졌을지 그것도 궁금하다. 안은영이 힘이 딸릴 때마다 충전하는 게 좋았다. 충전 방식이 뽀뽀나 키스, 섹스가 아니라 한문 선생의 손을 잡는 것이어서 더 좋았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을 키워가는 시간 속에서 손을 잡는 것만큼 매력적인 접촉방식이 있을까 싶다. 가장 떨리고 가장 충격적이고 가장 오랫동안 사용 가능한 사랑 충전 방식, 손잡기. 손잡기를 애용하자.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자. 그 손을 잡고 내 삶을 충전해가자. 이상 안은영식 손잡기 캠페인.
결말이 너무 안전한 선택 아니었나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 같다. 일부러 뺀 것처럼 로맨스적 장치를 뺀 듯했지만 마지막 그림은핑크빛 사랑이 담뿍 담긴 커플이었으니 말이다. 한 사람만을 위한 심장을 믿지 않았고 좋아하지도 않지만, 가끔 폭풍우가 불어닥칠 때는 어깨를 파묻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인간이 필요하다. 모든 사람에게 내가 그 사람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듯 내게 필요한 사람도 딱 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한 사람, 딱 한 사람. 바로 그 사람.
요즘 고딩 사이에서는 곱창이 유행이다. 먹는 곱창 아니고 굵은 머리끈 곱창이다. 20년 전 유행이 다시 돌아온 듯하다. 아니다, 어쩌면 20년 내내 유행했는데 나만 몰랐을 수도 있겠다. 하여튼 유행에 민감한 우리 집 패션 리더에게 곱창을 몇 개 사줬는데 생각보다 가격이 비싸서 놀랐다. 검색 전문가 패션 리더는 링크를 보여주며 여기에서는 곱창 30개에 11,000원이라 굳이 알려주기에 심기 관리 차원에서 주문해줬다. 30개 중에서 내가 고른 게 이렇게 4개다. 며칠 전만 해도 나는 정세랑 덕분에 신비한 능력을 소유한 초강력 곱슬머리였는데, 이번 문단을 지나오면서 세련되지 못하고 정신없이 산만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결론적으로는, 이상한 능력을 소유한 초강력 곱슬머리의 정신없이 산만한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인표는 꽃무늬를 싫어했다. 꽃에 반감이 있다기보다는, 그게 너무 쉬운 선택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꽃무늬를 고르는 사람들은 대체로 세련되지 못하고 정신없이 산만한 편이라는 게 인표의 속생각이었다. 꽃무늬 원피스도 꽃무늬 가방도 싫다. 신발이라면 더더욱 싫다. 은영에겐 열대의 꽃이 다홍색으로 크게 번지는 블라우스가 있었고, 잔꽃들이 바랜 색으로 가득한 어정쩡하게 긴 원피스도 있었고, 복주머니처럼 힘없이 생긴 인조가죽 가방 안쪽은 뜬금없이 꽃무늬 안감이었고, 지갑조차 낡은 꽃무늬의 비닐 코팅 장지갑이었다. 별로 여성성을 강조하는 타입도 아니면서 은영은 늘 꽃무늬를 골랐다. (239쪽)
은영은 다른 종류의 보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가, 어느새부터인가는 보상을 바라는 마음도 버렸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해서 자신의 친절함을 버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은영의 일은 은영이 세상에게 보이는 친절에 가까웠다. 친절이 지나치게 저평가된 덕목이라고 여긴다는 점에서 은영과 인표는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만약 능력을 가진 사람이 친절해지기를 거부한다면, 그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치관의 차이니까.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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