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내장 수술 뒤로 부쩍 시간이 많아진 엄마. 지난번에 내드렸던 피아노 숙제 검사하고 감사일기 써 보시라 했던 거 확인(나는 안 쓰면서 엄마에게는 너무 좋은 거라고 써 보시라 강제함)하는데, 한쪽 면에 영어 알파벳이 쓰여 있다. A와 a의 키가 같다. g도 q도 좀 난해한 모습이다. A와 a를 같은 크기로 그려놓은 사람은 누굴까. 알파벳 처음 배우는 사람이 쓴 것 같은데 아무래도 큰아이가 초등학생 때 쓴 게 아닐까 싶다. 뒷면에 검정 플러스 펜으로 알파벳을 다시 쓴다. 근데 이거 쓴 사람 누구죠? 하고 물었더니, 엄마가 너라고. 네가 그랬다고 하신다. 엄마, 만약에 이렇게 쓴 사람이 나라면... 나는 정말 큰일 났네요. 엄마도 이모도 활짝 웃는다.
대문자와 소문자에 대해 간단하게 (문장 맨 앞에 쓸 때 대문자로 씁니다) 설명을 하는데, 옆에 앉아 계시던 이모가 조용히 일어나 가까이 오신다. 이모와 눈이 마주치고 내가 먼저 웃었는데 이모는 내가 무언가를 물은 듯 자연스레 대답하신다. 우리는 못 배워서. 제때 못 배운 게 한이 되어서. 내가 하는 말을, 이 변변찮은 설명을 듣고 싶은 마음을 어쩌면 좋을까.
내가 이 나이 되도록 영어를 못하는 건 오로지 내 탓이다. 영어만 공부하라고 주어졌던 시간은 충분했다. 영어 교재는 말할 것도 없고 미드, 동영상 강의, 전화 영어 등 영어를 공부할 방법은 차고 넘친다. 돈 들이지 않고 공부할 수 있는 방법도 어마어마하게 많다. 오성식처럼 창경궁 지나가는 외국인 괴롭히지 않아도 오성식보다 영어를 잘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의 영어 못함은 오로지 게으름, 이놈의 게으름 때문이다.
알파벳 쓰는 내 옆에 착 붙어 앉아 지켜보는 엄마와 간단한 설명에 귀 쫑긋하는 이모에게는 내게 없는 무엇이 있는 걸까. 그분들이 갖고 있는 그 무엇을, 나는 왜 갖고 있지 못한 걸까.
하릴없이 집에 있는 원서 목록을 만들어본다. 근래에 산 책들만 추려도 한참동안 읽기만 해도 되겠다.
지금 읽는 책은 이것. 참 재미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