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의 부친 살해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이론적 살해의 고전적 이야기들이 모호하게 남겨둔 것을 그가 명시적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형제들의 집단적 행동의 동기는 단순히 그들의 자연본성적 자유와 스스로 통치할 권리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자들에 대한 접근을 얻기 위해서이다. 고전적 이론가들의 자연 상태에서 ‘가족’은 이미 실존하고 남자들의 부적 권리는 자연적인 권리로 여겨진다. 프로이트의 원초적 아버지, 그의 파트리아 포테스타스는 무리의 모든 여자들을 자신을 위해 남겨둔다. 부친 살해는 아버지의 정치적 권리를 제거하며, 그의 독점적인 성적 권리 또한 제거한다. 형제들은 그의 가부장적, 남성적 권리를 물려받고 자기들끼리 여자들을 공유한다. (77쪽)
프로이트 이론에 따르면, 아들들이 부친 살해를 저지른 이유는 ‘여자들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다. 아들들의 반란으로 절대적인 권위를 가졌던 아버지는 쫓겨나고, 아들들은 각각의 ‘여자들’을 배분받는다. 여자들에 대한 평등한 접근을 보장하는 규칙. 아들들은 더 이상의 충돌을 막기 위해 그런 규칙에 동의하고, 이를 사회계약의 일부로 만들면서 프로이트가 족외혼 또는 친족의 법이라 부르는 것을 제도화한다(78쪽).
『가부장제의 창조』는 여성이 종속화되는 과정의 두 가지 요인으로 첫째, 남성과 여성의 성별 분업화, 그리고 여성의 ‘사유화’를 꼽는다. 성별 분업화는 전적으로 재생산능력의 차이, 특히 여성이 아기에게 젖을 먹일 수 있었기에(77쪽) 가능했다. 척박한 환경 속의 인류로서는 철저히 ‘기능’에 의한 분업이었고, 남성과 여성 모두 받아들일 만한 제안이었지만, 시간이 얼마간 흐른 후 ‘육아’는 ‘모성’이라는 형태로 탈바꿈했고, 이는 여성에게 선택이 아닌 ‘운명’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여성의 사유화’는 초기 인류 사회에서 중요한 여성의 재생산능력을 부족의 자원으로, 후에는 특정 친족집단의 재산으로 ‘소유’하면서 이루어졌다(88쪽). 남성 집단은, 같은 종족의 여성을 사유화한 경험을 통해 다른 민족의 여성, 그리고 남성을 사유화, 노예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 거다 러너의 주장이다.
『엄마라고 불러도 될까요?』의 원제는 『Sarah, plain and tall』이다. 190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자전적 소설로, 동생을 낳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빠, 동생과 함께 외롭게 살고 있는 애나라는 여자아이 이야기다. 애나의 아빠는 신문에 ‘아내 구함’ 광고를 내고, ‘사라’라는 여성이 답장을 보내온다. 키가 크고 수수해요. 사라가 그들을 찾아온다. 따뜻한 엄마가 그리운 아이들에게, 아내가 필요한 남성에게 그녀가 찾아온다. 작품 전체에는 아직 사랑이 필요한 아이들의 마음이 너무나 애달프고 간절해서, 사라가 떠나지 말고 그들과 함께 남아, 아이들의 착한 새엄마가 되어 주기를 나도 모르게 바라게 된다.
프로이트의 부친 살해 문단에서 사라를 떠올리는 내가, 나도 싫다. 이 가정에는 엄마가 필요하고, 여자의 손길이 필요하다. 사라도 마찬가지다. 남편이 필요하고,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아이들이 고맙다. 사라는 어떻게 오게 되었나. 그녀는 ‘아내 구함’ 광고를 보고 그들에게 왔다. 그 숱한 우편 주문 신부 중에서, 사라는 가장 행복한 그리고 행운의 신부임에 틀림없다.
한 명의 남성에게 한 명의 여성이 ‘배분’되었던 시대,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로 인식되던 시대를 지나 이제 여성의 권리가, 정확히는 여성의 생존권과 재산권이 인정받는 시대가, 바야흐로 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직장 내에서, 가정 내에서 온전한 인격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성적 자기 결정권을 위협받고 있다. 여자도 사람이다, 라는 주장이 그렇게도 과격하다면, 다른 말로 풀어 쓸 수도 있다. 여자의 주인은 여자다. 남자의 주인이 그 자신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