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한 세상의 모든 책들』의 저자 제인 마운트는 책등을 1만 5000권쯤 그렸는데, 여러 번 반복해 그린 책들이 있다고 말한다. 사진 위에서부터 자주 그린 순서로 나열했는데, 이 책들은 진짜 고전이라고 소개한다. 맨 위의 책이 이 책, 『앵무새 죽이기』이다.
1991년 미국 국회 도서관 선정 <성경 다음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책> 1위, 1960년 출간 직후 미국 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지금까지 40개 언어로 번역되어 4천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으며, 하퍼 리에게 풀리처상의 영예를 안겨준 책.
메이콤에 사는 6살 스카웃의 천진난만하고 당당한 모습은 마야 안젤루를 떠올리게 한다.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캐럴라인 선생님은 입학생 스카웃이 이미 글자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실망하면서, 부적절하고 온당치 못한 선행학습을 근절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스카웃은 당당하다. 아무렴, 이 정도면 당당해도 되겠다.
“아빠가 저를 가르쳐 주신다고요?” 놀라서 내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아빠는 이제까지 저한테 아무것도 가르쳐 주신 적이 없어요. 그러실 만한 시간이 없거든요.” 그랬더니 캐럴라인 선생님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으시기에 덧붙여 말했습니다. “글쎄, 아빠는 밤이면 너무 피곤하셔서 거실에 앉아 책만 읽고 계신다니까요.” “아빠가 가르쳐 주지 않으셨다면 도대체 누가 가르쳐 준 거니?” 캐럴라인 선생님이 상냥하게 물었습니다. “누군가 가르쳐 준 사람이 있을 거 아니야. 태어나면서부터 『모빌 레지스터」를 읽을 순 없으니까.” “젬 오빠 말로는, 저는 태어날 때부터 글을 읽었대요. 제가 핀치가 아니라 불 핀치 집안 애로 나오는 책에서 본 거래요.” (41쪽)
남매는 흑인을 변호하는 아버지를 관찰하고, 흑인을 멸시하는 백인들의 수근거림을 듣고, 그들을 공손히 대하는 흑인들을 본다. 결국 우는 건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허위와 가식의 그 아래 바닥을 본다. 그 이면을 꿰뚫어 보고, 인간답게 행동한다. 아이들만 운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고통 때문에 우는 거지. 심지어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말이야. 흑인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일부러 생각한 것도 아닌데 백인이 흑인에게 안겨 주는 그 고통 때문에 우는 거란 말이다.” (373쪽)
방학친구 딜은 재판 과정을 지켜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리고, 억울한 판결에 오빠 젬도 눈물을 흘린다. 가장 앞장서서 제일 치열하게 싸웠던 아버지가 오히려 담담하다. 세상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착한 사람들조차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잠자리에 든다. 다음을 기약하고, 내일을 준비한다.
성경의 요셉 이야기와 똑같은 톰 로빈슨 사건을 따라가면서 스스로를 흑인 여성으로 위치시키는 나를 발견하고 여러 번 놀랐다. 강간 사건이 발생했을 때 여성 피해자에게 쏟아지는 어리석은 질문들과 남부에서 흑인 남성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가, 쉬지 않고 치고 받았다. 이토록 무겁고 진지한 주제를 이처럼 발랄하고 명랑하게 풀어냈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작가의 역량에 감탄하고 만다.
황금 주간은 이렇게 지나갔다. 아침에는 푸코를, 오후에는 까뮈를 읽다가 어느 밤에는 엘리자베스 길버트를 펼쳤다. 몇 달 전에 사두었던 책이고, 저번주부터 뜨문뜨문 읽고 있는데, 책 속에서 엘리자베스가 하퍼 리를 언급한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책들이 있을까. 내가 그 존재를 아는 책들은 얼마나 될까. 너무 당연하게도(?) 나는 구입한 책들을 다 읽지 않는 사람이고, 겨우 지난주부터 읽기 시작한 이 책에는 지금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이름이 나온다. 그의 작품에 대해 말한다. 창조성에 관한 이야기라, 직접적인 것은 아닐지 몰라도, 작가의 존재와 작품 자체는 더 이상 직접적일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일이 흔할 수 있겠지만, 내게는 아직도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다. 내가 읽는 책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고, 한 쪽으로의 화살표가 아니라 양방향의 화살표로 서로가 서로를 가리키고 있다. 여기에서 저기로. 그리고 다시 여기로.
『앵무새 죽이기』 때문에 관심이 생긴 다른 책들을 골라본다. 또 다른 시간, 공간에서 나를 반길 책들이다. 출연 예고 및 개봉 박두.
"참, 너희 아빠와 난 당분간 너희들하고 같이 머물러 있기로 결정했단다." 메이콤에서 <당분간>이라는 말은 짧게는 사흘에서 길게는 30년을 뜻했습니다. 오빠와 나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습니다. - P240
우리는 아빠를 따라 나갔습니다. 부엌 테이블에는 가족 모두를 파묻고도 남을 만한 음식이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며, 토마토며, 콩이며, 심지어는 머루까지 있었습니다. 아빠는 소금에 절인 족발 한 그릇을 보시고는 빙그레 웃으셨습니다. "너희들 고모가 이걸 먹는 걸 허락할까?" 캘퍼니아 아줌마가 말했습니다. "오늘 아침에 와보니 뒤쪽 계단 주위에 놓여 있었어요. 저들은, 변호사님께서 하신일을 고마워하는 겁니다. 저들이 주제넘은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니죠?" - P394
아빠는 두 눈에 눈물이 글썽거려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하셨습니다. "그 분들께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 그 분들께 전해 줘요. 꼭 전해 주세요. 다시는 이러지 말라고요. 요즈음처럼 너무나 어려운 때에……" - P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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