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페미니스트라면 어떠해야 한다,는 당위와 요구에서 벗어나 있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내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 이유 5개가 있다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는 이유는 50개 정도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믿음과 페미니스트로서의 내 삶이 어느 정도 일치되는가 혹은 일치되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 나는 자유롭다. 자유롭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에서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는 스스로를 “남자를 미워하지 않으며 남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립글로스를 바르고 하이힐을 즐겨 신는 행복한 아프리카 페미니스트’라고 말했다(14쪽). 페미니스트라면 남자를 미워하고, 화장하지 않으며, 하이힐을 신지 않는 여자라는 사람들의 생각, 페미니즘은 비아프리카적이라는 판단, 페미니스트는 입만 열면 불만을 말하는 불평주의자라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남자를 미워하지 않고, 남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화장을 하고, 하이힐을 즐겨 신는 행복한 아프리카인이지만,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내가 크리스챤이라는 사실은 페미니스트가 되는 게 장애물이 되지 못한다. 물론 나는 대학 때부터 가깝게 지내온 선교 단체의 선배, 친구, 후배들과 내가 생각하고 느꼈던 바에 대해 전부 다 말할 수는 없다. 교회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신앙과 페미니스트적 지향이 닿는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고 믿는다. 기독교는 여성 혐오적이지만, 기독교만 여성 혐오적인 건 아니다. 불교의 팔경법(비구니는 비구의 지시를 받아야한다는 규율), 여인오장설(여인에게는 5가지 제약이 있어 성불이 어렵다)등과 유교의 남존여비, 칠거지악등은 일관되게 여성의 지위와 본질이 남성보다 못하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슬람은 ‘여성과 남성이 똑같은 권리가 있으나 남성이 여성보다 위에 있다’고 주장하며, 아프리카 및 중동국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여성할례, 명예살인은 여성의 생명보다 소중한 남성의 권리 옹호를 보여준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 사회, 문화가 여성에게 적대적이다. 적대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공자는 차치하더라도, 예수님과 부처님, 마호메드 원래의 가르침은 이와 다르다고 생각한다. 덧붙여진 남자들의 생각이, 그에 더해진 남자들의 설명이 여성 혐오적이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은 인간사를 이해하는데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날카로운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인간의 영혼과 우주의 신비를 밝히는데 답을 줄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내가 크리스챤이라는 사실이 내가 페미니스트가 되는 데 장애물이 되지 못 한다.
내가 기혼 여성이라는 점도 내가 페미니스트가 되는 걸 막지 못한다. 많은 수의 페미니즘 도서를 읽었다. 아주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꽤 읽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읽었다. 위대한 여성주의 선구자들이 결혼할 수 없었거나, 결혼한 경우 이혼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많이 읽었고, 많이 보았다. 하지만, 모든 페미니스트들이 비혼 상태인 것은 아니다. 박완서 선생님은 결혼해 아이 다섯을 낳고도 묵묵히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했고, 어슐러 K. 르 귄은 남편의 협조로 창작 활동을 이어갔음을 밝혔다(<『분노와 애정』). 『뒤에 올 여성들에게』의 저자 마이라 스트로버는 이혼했지만 오랜 친구였던 남성과 재혼했다. 페미니즘은, 오랜 기간 남성들이 여성들을 무시하고 미워하고 혐오해왔음을 보여주지만, 모든 남성들이 그런 건 아니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내게, 가장 큰 장벽은 ‘경제적 독립’에 관한 것이다. 이를 테면 이런 이야기. 공지영의 『딸에게 주는 레시피』에서 공지영이 딸에게 한 말. 핸드폰 요금과 추운 겨울, 네게 필요한 따뜻한 물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은 벌어야 한단다. 아니면 이런 문단.
남편 돈으로 생활하는 것이 괜찮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과 비인간 영장류에 관한 비교연구에 따르면, 그런 방식으로는 밥벌이하는 자의 권위를 살 수 없다. 이를 잘 알거나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기에, 남편의 권위와 자신의 권위 사이에 있는 심연 같은 차이를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생각 있는 여자들은 밤잠을 이루지 못할 수 있다. (<파크애비뉴의 영장류>, 243쪽)
아니면, 『행복한 여자는 글을 쓰지 않는다』에 인용된 박완서 선생님의 말씀. 여성운동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부추기셨던 박완서 선생님의 노예론. 특히 기득권층 여성들의 무관심 내지 냉소에 이렇게 일갈하셨다고 한다.
“운이 좋아 맘 좋은 주인 만나,
안방에서 주인과 겸상하는 노예가
부엌에서 밥 먹는 노예를 비웃는 격이다.” (212쪽)
정확히 이 지점이다. 이 곳이 나를 제일 절망하게 하는 지점이다. 100일간 잠을 설치며 고민하고 기도하던 중에, 나는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좋다’는 남편의 말에 동의했다. 회사를 그만뒀고, 아이를 키웠다. 아이를 하나 더 낳았고, 그렇게 아이 둘을 키웠다. 나는 전업주부였는데, 친정과 시댁에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정도의 전폭적이고 적극적인 ‘육아 도움’을 받았다. 남편도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제 아이들이 제법 자라고 더 이상은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이제 막 열리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일을 하려고 하지도 않고, 일을 알아보지도 않는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읽는다.
고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아래의 노동이 갖는 경제적, 사회적 , 정치적 기능을 명확히 하고, 동시에 세계를 구축하는 방식이 노동의 산업적 형태와 자본주의적 관계 속에 갇혀 있다는 점을 문제 삼으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노동을 공적이자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은 노동을 당연한 것으로, 사적인 것으로, 개인적으로, 존재의 조건으로 만들려는 압력, 그 결과 탈정치화하려는 압력에 맞서는 한 가지 방식이었다. (20쪽)
내가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계속 일했더라면 워킹맘으로 살았더라면, 나는 평생 이 구절을 만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이중노동 속에, 회사와 가정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이제 일할 수 있는 여건이 열려있는 지금, 나는 이 책을 읽고 있는 것이다. 일하지 않고서. 돈을 벌지 않고서.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반노동의 정치, 그리고 탈노동의 상상.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여기가 나를 제일 절망하게 하는 지점이다. 나는 일하고 있지만, 돈을 벌고 있지는 않다는 생각. 돈을 벌지 않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은 하찮은 일이라는 생각.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면 이 모든 일은 무의미하다는 생각. 자판 위에 옮겨지는 이 모든 글자들에 더해.
내가 기본소득에 희망을 걸고 있는 이유다. 일단 오늘은 돈을 벌러 나갈 수 없으니 일단 이 책을 좀 더 읽어 보는 걸로 한다. 쓸쓸한 마음에 약간의 기대를 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