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페이드 포 - 성매매를 지나온 나의 여정
레이첼 모랜 지음, 안서진 옮김 / 안홍사 / 2019년 9월
평점 :
아무에게도 강요받지 않은 나와 같은 여성들은 우리의 목소리를 찾아 누군가 강요하지 않았다는 그 말이 아무것도 우리를 강요하지 않은 건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할 필요가 있다. 강압적인 상황에서 지구상 가장 강력한 강제성은 무형으로 존재하는데, 강제의 존재를 인식하기 위해서 주먹이나 총, 칼이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건 무척이나 인간적인 어리석음이다. 내 성매매 경험은 강요되었다. ‘자유로운’ 범주에 속하는 우리들을 강압한 건 삶이다. (343쪽)
저자 레이첼 모랜은 노숙 생활을 전전하다가 열 다섯 살에 성매매에 유입되었고, 이후 7년간 착취당했으며, 22세에 성매매에서 벗어나 24세에 더블린시티대학에 진학해 저널리즘 학위를 취득했다(책소개).
한국 독자들에게 쓴 짧은 글에서 저자는 부탁한다. 성매매를 경험한 여성들이라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자신들의 경험에 대해 말해달라고. 성매매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말할 때 주의 깊게 들어달라고. 열린 마음을 가지고 호기심을 표하며, 판단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달라고(20쪽). 정희진은 추천사에서 ‘특별한 경험’을 겪은 당사자가 문제의 ‘극복’ 뿐만 아니라 그것을 경험한 사람의 사유를 하나의 세계로서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10쪽). 쉽게 읽을 수 없고 쉽게 읽히지 않는 이유다.
행복한 창녀 신화, 성매매 여성이 성적으로 즐긴다는 신화 등은 여성을 존중과 경멸, 품위와 천박, 존경과 비난이라는 두 부류로 구별한 상태(145쪽)에서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에게 경멸, 천박, 비난이라는 굴레를 씌우기 위한 거짓말이다. 성매매 합법화와 비범죄화는 성을 구매하는 남성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성매매 여성에게는 ‘성매매 여성’이라는 꼬리표를 공식적 차원으로 수용하라고 강요하기 위한 것이다.
사회적으로 더 권력 있는 남성들에 의해 착취당하는 현실은 줄곧 수그러들지 않았고, 도망칠 수 없었기에 우리에게 실질적 혜택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착취를 경제적인 이유로 ‘선택했다’라고 표현하는 일이었다. 성매매를 ‘성적 자기 결정권’으로 표현하려는 시도가 뒷받침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성적인 이유가 아닌 경제적인 이유로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성적인 요소는 즐길 수 없었고 견뎌야 했는데 우리가 진정으로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더라면 업주에게는 빈 업소가, 성구매자들에겐 빈 필름이 남았을 테다.(127쪽)
나는 성매매의 원인과 결과, ‘성매매란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하는 뻔뻔함, 성매매로 인해 피폐한 삶을 사는 성매매 여성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지속되는 이유는 ‘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성매매는 결국 ‘돈’의 문제다.
가난하다고 해서 모두 성매매의 유혹에 쉽게 빠지는 것은 아니다. 성매매 여성에게 결정권이 있다거나, 그래도 성매매하는 여성이 시간당 벌 수 있는 돈이 다른 일에 비하면 많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당장 이 책을 읽어야만 한다. 성매매는 자신의 몸을 파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학대당했음에도 학대당했다고 말할 수 없는 ‘가장 불리한 위치’에 ‘스스로’를 가두었다고 여겨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성매매로 인한 인간성 파괴의 현실을 이 책은 가감없이 보여준다. 그 일을 스스로 '선택'하는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할 수 없다.
정도는 다를지 몰라도 우리 모두는 스스로의 가치 중 일부를 내어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다. 까다로운 고객을 응대해야 하고, 말 안 듣는 아이와 실랑이를 벌어야 하고, 무거운 짐을 옮겨야 하고, 주사를 놓아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일들 중, 어느 하나도 자신의 ‘몸’ 그 자체가 거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성매매는 몸을 내어 줄 때 돈을 받았기 때문에 침해된 ‘성적 자기 결정권’을 주장할 수 없다. 사람들은 성매매 여성들이 그 일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선택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너’ 자신이기에, 그 일로 인한 모욕과 수치, 괴로움과 고통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고 강요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이 선택일 수 있는가. 행복 대신 불행을 선택할 수 있는가. 사랑 대신 낯선 이와의 섹스를 선택할 수 있는가.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성 구매자들 중 또 한 명을 만나러 가는 길이 선택일 수 있는가. 아이의 신발을 사주기 위해 거리로 나서는 것이 선택일 수 있는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면, 그것이 선택일 수 있는가.
저자는 열 다섯 살에 성매매에 유입되었고 7년간 그 일을 해왔다. 그녀는 어떻게 탈성매매 할 수 있었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하고 충만한 경험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지옥같은 세계를 탈출하기로 결심했고 실행했으며 결국 성공했다. 자신의 존재를 사람들이 알게 되면 어떻게 할까,라는 두려움 속에서 아이를 키우고, 대학에 진학하고, 새로운 일을 찾았다. 그녀가 워드 프로세서를 통해 글 쓰는 일을 시작하게 된 대목은 특히 감동적이다.
글을 보낸 지 9개월이나 10개월 만에 받은 그 수표는 단순히 금전적으로 좋은 소식이었을 뿐 아니라 혐오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능력의 증명이었다. 그 봉투를 열면서 느꼈던 놀라움은 표현할 수 없다. 그 돈을 보낸 사람은 생각지 못했겠지만 봉투를 여는 나는 큰 기쁨, 자신감, 희망을 얻었다. (354쪽)
여성 해방의 종국은 경제적 독립이라는 점은 이 책에서도 확인된다. 여성의 가사노동은 무임금, 동일노동 조건에서 남성에 비해 저임금을 받는 현재의 상황이 이에 대한 증거다. 결국은 ‘돈’의 문제다.
성매매 여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강간하지는 않지만 강간 판타지를 실행하려고 돈을 지불하고 여성의 몸을 도구 삼아 이용하는 남성들은 다소 만족할지 몰라도 그 실행을 위해 돈을 건네야만 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돈의 교환은 그들의 통제력을 상쇄시키고 결국 강간 판타지 경험의 효력을 희석시킨다. (343쪽)
성폭행의 스릴은 통제력으로 정의되고 가장 극단적인 강간범들은 가능한 한 가장 강력한 통제력을 추구하므로 성매매 교환에서 원하는 바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년간 만난 수많은 폭력적인 변태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그들의 판타지를 실행하는 데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에 적대적이고 깊은 분노를 표했다. (343쪽)
판타지의 악랄함이 더 강해지면 이 남성들은 그 판타지를 실행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매매 여성을 강간한다. 그 남성들은 성매매 여성을 처음부터 강간할 만한 사람으로 보지 않기에 이후엔 성매매 여성의 몸으로 이 판타지를 즐기려 애쓰지 않는다(성매매 여성을 하찮게 인식하는 증거이다). 몇몇 강간범들에게는 성매매 여성의 몸에 실현한 강간 판타지가 충분할지 모르겠지만 모두에게는 아니다. (343쪽)
판타지가 충족되지 않는 다른 이들은 성매매 여성을 강간하면서도 충분히 진짜 강간이라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진짜’라고 여기는 상대로 옮겨갈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한다. 이 남성들은 성매매 여성들을 건너뛰고 비성매매 여성을 강간하는데, 성매매는 이를 막을 수 있는 구제 능력이 없다. (34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