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자기를 생각할 때 반드시 ‘타자’를 생각한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다. 인간은 이원성의 표시 아래서 세계를 파악한다. 이원성은 처음에는 성적 특성을 띠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는 자기를 동일자로 생각하는 남자와는 자연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타자’의 범주에 분류된다. ‘타자’는 여자를 포함한다. (97쪽)
김영란법의 김영란 전 대법관은 그의 책 『판결과 정의』를 이렇게 시작한다.
가부장제는 어느 시기 어느 지역에 국한된 일이 아니고, 인류 발전단계의 한 형태였던 농경사회 이후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가장 강고한 위계 질서 중 하나인 가부장제는 가장이 강력한 지배권을 가지고 가족을 통솔하는 가족 형태를 말한다. 가부장제를 가능하게 하는 위계 질서는 이원론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이원론은 계층화를 촉발하고, 계층화는 법 체계에 반영된다. 가부장제는 성적으로 구축된 이원론으로서 남녀를 상하관계로 배열한다고 김영란은 지적한다.(22쪽) 더 구체적으로는 남성에게 상을, 여성에게 하를 배열하는 것이 가부장제다.
『여자-공부하는 여자』의 민혜영은 『제2의 성』에 대한 글에서 여자란 도대체 무엇인가란 물음에 보부아르가 제목으로 답을 했다고 말한다. 여자는 ‘제2의 성’이다.(123쪽) 여자가 ‘제2의 성’이라는 의미에 대한 은유로 저자는 김경미 시인의 시를 말하는데, 이를 다시 인용해본다.
그냥 영어로 두 번째,
첫 번째가 아닌, 순수하게 수학적인
세컨드, 그러니까 이번,이 아니라 늘 다음,인
언제나 나중,인 홍길동 같은 서자,인 변방,인
부적합,인 그러니까 결국 꼴찌
<나는야 세컨드 1> 중에서
정희진은 남성과 여성에 대한 구별, 혹은 남성과 여성의 다름이 문제가 아니라 이것이 사용되는 맥락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여성주의는, 어떤 면에서 여성이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별이라는 사회 제도를 문제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성별 때문에 여성(남성)들이 이익을 보기도 하고, 차별을 받기도 하죠. 예를 들면, 대개 남자 아이에게는 하늘색 내복을 입히고 여자 아이한테는 분홍색 내복을 입히죠.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없어요. 이런 걸 가지고 저 같은 사람이 성차별이니 인권 침해니 억압이니 하면, 정신 나간 여자가 되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가사노동을 하지 않는 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때가 쏙 비트’라든가 ‘강력 슈퍼타이’ 같은 세제의 포장지는 다 푸른색이에요. 강력함을 나타날 때는 푸른색을 쓰죠. 그런데 ‘울샴푸’ 같은 섬유 유연제들은 다 분홍색이거든요. 어린아이들에게 성별에 따라 내복을 입힐 때는 그 자체가 사회적 의미를 발생시키지 않지요. 그런데 푸른색이 힘을 상징하면서부터는 사회적 의미가 발생하기 시작하고, 그것이 남성성하고 연결되면 그때부터 문제가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다름은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맥락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의 자존심? – 자존심의 경합 : 정희진>, 227쪽)
이원론에 근거로 상대방을 ‘타자’로 인식하고, 남자가 주인공이며 주인이고, 주체가 되는 가부장제하에서 남녀를 상하로 규정한다는 것을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가장 하찮은 남자도 가장 고귀한 여자보다는 가치가 있다.
가장 비열한 남자도 가장 순수한 여자보다는 훌륭하다.
가장 무능한 남자도 가장 유능한 여자보다는 능력 있다.
가장 멍청한 남자조차도 가장 똑똑한 여자보다는 똑똑하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는다고 처음 본 여자에게 잔인한 폭력을 휘두를 수 없다. 살림을 못 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말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아내를 구타할 수 없다. 여자가 나오기만을 기다려, 여자라는 이유로 그를 살해할 수 없다.
법이 보여주지 않는가. 지적장애가 있는 친딸을 성폭행한 아버지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면서도, “합의금 명목으로 돈을 줬다고 해도 그것이 충분히 보상됐다고 보기 어려워 김씨에게 실형을 선고할 수 밖에 없다”고. 채팅앱을 통해 만난 남자에게 감자탕집에서 상대방 접시에 고기를 덜어준 행동은 “성관계를 은연 중에 동의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이원론은 계층화를 촉발하고, 계층화는 법 체계에 반영된다. 가부장제는 성적으로 구축된 이원론으로서 남녀를 상하관계로 배열한다.
남자가 상, 여자가 하. 이게 바로 가부장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