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벌새」를 읽을 생각을 한 건 아니고, 정희진 선생님 글만 읽으려고 했다. 예약한 사람들이 많아 한참을 기다렸다가 오늘 대출해 왔는데, <작가의 말>을 읽고는 바로 읽기 시작해서 그 자리에서 다 읽었다. 내일 구역예배 차례가 우리집이어서 거실 빨래건조대 치우고 여기저기 쓸고 닦아야 하는데, 책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이런 구절에서는 잠깐 책을 덮었다. 끓어오르는 이 느낌은 커피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그 무엇 때문인가.
탈코르셋 주장이나 『82년생 김지영』은 중년 여성의 젠더 이슈가 아니다. 여성의 계급은 나이와 외모다. 나이 든 여성이나 장애 여성,이주 여성이 겪는 세계는 젠더로 환원되지 않는다. 한국의 기혼 중년 여성은 무엇으로 사는가. 남편이 출세하고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 ‘완벽한 가정‘은 드물다. 아니, 무엇보다 그것은 남편과 자녀들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이지, 타인이 대신할 수 없는 불가능의 영역이다. 엄마는 비난만 받을 뿐이다. 여성이 나이가 들면 전업주부든 여배우든 경력 단절 여성이든,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는 이들을 돕는 인프라가 전혀 없다. ([지금, 여기의 프리퀄 <벌새>], 정희진, 245쪽)
내가 한국의 기혼 중년 여성이어서 그런가. 단어들이 하나하나 분리 되어서는 성큼성큼 걸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