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위 “여성성”이 생물학적 운명이라는 미명하에 노동력의 생산을 은폐하는 노동기능으로 구성된 것이라면, “여성의 역사”는 “계급의 역사”이다. 이 때 주목해야 할 것은 여성성이라고 하는 그 특정 개념을 만들어 낸 성적 분업이 사라졌는지 여부다. (35쪽)
여성, 재생산, 자본주의 관한 담론을 크게 바꾸어 놓은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의 『여성권력과 공동체의 전복』The Power of Women and the Subversion of the Community(1971)과 셀마 제임스의 『성, 인종, 계급』 Sex, Race & Class(1975)에서 달라 코스타와 제임스는 ‘여성이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상품인 “노동력”의 생산자이자 재생산자였던만큼 여성 착취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 왔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성착취의 뿌리를 성적 분업과 여성의 무임노동에서 찾았다. (21쪽)
이러한 논의에 더해 저자는 시초축적을 분석하는 중심에 16세기와 17세기의 마녀사냥을 놓고 새로운 성적 분업 발달과 임금노동에 대한 여성배제를 통해 새로운 가부장적 질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논증한다.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에서 임승수는 말한다.
『자본론』에 따르면, 임금은 노동의 대가가 아닙니다. 임금은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노동력의 대가라고 분명하게 구분해 얘기하죠. 만약 임금이 노동의 대가라면 빵 8개를 만든 노동자는 30,000원이 아니라 80,000원을 받아야겠죠. 그런데 현실에서 그렇게 임금을 주면 자본가 입장에서는 이윤이 나지 않아요. 이윤이 나지 않으면 회사를 운영할 이유가 없겠죠. 이런 조건에서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습니다. 요컨대 자본주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착취가 필수’라는 의미입니다. (103쪽)
자본주의의 작동을 위해서는 ‘착취가 필수’적이다. 기업의 이윤은 노동자의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에 대해서’만’ ‘임금’을 제공함으로써 발생한다는 설명이다. 문제는 여성의 노동에는 임금이 지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출산, 육아, 감정을 동반한 각종 돌봄 노동과 정리정돈, 청소, 빨래, 장보기, 식사준비, 설거지 등의 가사 노동을 포함하여 여성의 모든 노동은 비가시적이다. 임금이 지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의 이러한 노동에 임금이 지급되는 경우는 여성이 자신의 ‘가족’이 아닌 타인을 위해 이런 일을 수행했을 때이다.
1인의 노동자 혹은 미래의 노동자가 일터에서 돌아와 다음 날 노동 현장에서 건실한 노동자로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일터를 떠나 가정으로 돌아왔을 때 육체적, 정신적인 위안과 충전, 휴식이 필요하다. 내일의 노동을 준비하기 위한 노동의 수행이 여성의 ‘본성’으로 다뤄지고, 자연적인 여성의 ‘성역할’로 이해될 때, 그것이 노동이 아닌 ‘희생’과 ‘사랑’으로 불리워질 때, 여성의 이중노동은 ‘보이지 않는다’. 존재함에도 보이지 않는다. ‘했을 때’가 아니라 ‘하지 않았을 때’ 표시가 나는 집안일은 모두 그런 일들이다.
내 평생 소원 중의 하나가 책에 줄을 반듯하게 긋는 거라는 걸, 비연님은 알고 있다.
반듯하게 긋고 싶다. 반듯하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