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시 자본을 읽자
4년 전쯤 고병권님을 멀리서 봤을 때, 그리고 마이크 없이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느꼈던 감상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시인 같다”는 것이었다. 철학자를, 철학자들을 가까이에서 보기는 쉽지 않다. 아무렴 철학자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시인도 그렇다. 시인을 가까이에서 보는 일은, 만나는 일은 흔하지 않다. 간단히 설명할 수 없어 나조차 그 이유를 모르겠지만, 맨 뒤에 서서 고병권님을 보며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가 ‘시인 같다’고 느꼈다. 음성이나 말투가 차분해서 그럴 수도 있고, 그의 모습이 착해 보인다는 뜻도 되겠다. 목소리가 크지도 강렬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음성에는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의 말은 옳을 것 같다는, 믿어도 되겠다는.
도서관 책이라 줄을 그을 수 없어 인덱스를 붙여가며 읽었다. <다시 자본을 읽자>는 사야 할 테고, 그리고 이 책은 반납해야 하기에 인덱스를 다 떼어야 한다. 책을 미리 사 놓지 않아 한 번 할 일을 두 번 하고 말았다. 괜찮다. 어차피 한 번 더 읽어야할 책이다.
에티엔 발리바르(E.Balibar)에 따르면 <자본>에서 마르크스의 문제 설정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마르크스는 이제 정치경제학자들이 추론해낸 결과가 아니라 원리들 자체를 겨냥합니다. 발리바르는 아주 중요한 점을 지적했는데 그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착취를 경제적 메커니즘(이를테면 불평등한 분배)의 결과[귀결]로 정의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경제적’ 형태들을 임노동 착취의 전체적 과정의 계기들과 효과들로 정의한다”라고 했습니다. ‘착취’는 메커니즘의 결과가 아니라 메커니즘의 전제라는 것이죠.
만약 착취가 ‘결과’, 즉 생산된 가치를 분배하는 문제였다면 우리는 재분배를 통해 이를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제’가 문제라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자본주의적 경제형태가 작동하기 위해 착취가 전제되어 있다면, 다시 말해 상품 생산과 가치증식이 착취에 입각해서만 가능하다면 이야기가 아주 달라져요. 이렇게 되면 잣대를 대고 비뚤어진 것을 바로 잡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교정’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잣대 자체를 바꾸는 것입니다. 불법이 문제가 아니라 법 자체가 문제인 상황인 거죠. 마르크스의 비판이 요구하는 게 이것입니다. 체제의 원리에 입각한 교정이 아니라 체제 자체의 역사적 이행! (60-61쪽)
불법이 문제가 아니라 법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은 요즘 표현대로 하자면 ‘뼈를 때린다’. 판단의 근거가 되는 틀 자체를, 잣대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 교정이 아니라 체제 자체의 역사적 이행을 말하는 주장. 소파에 등을 대고 책을 위로 펼쳐 들고 한가히 책을 읽던 독자 1인은 벌떡 일어나 앉아 다시 이 문단을 읽는다. 찌릿찌릿하다. 맞다. 고병권님은 시인이 맞다. 시인이다, 고병권은.
2.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3
영어책으로는 7권이고 한글로는 총 21권인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의 마지막권을 읽었다. 뒤로 갈수록 전개에 힘이 실리지 않는 이유가 인물들의 매력이 부족해서라는 평이 있던데, 그렇다면 로마 시대 전체를 아우르는 ‘매력의 끝판왕’ 카이사르편은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나는 젊은 카이사르인 옥타비아누스의 매력을 감당하기에도 쩔쩔맸는데 말이다. 그래서 이 시리즈 중 몇 권을 더 읽게 된다면 카이사르가 주요 서술 대상이 되었을 4부 <카이사르의 여자들> 또는 5부 <카이사르>을 읽게 될 듯 싶다.
클레오파트라가 저지른 근본적인 실수는 자신이 외국인이라서 그들이 반감을 품었다고 지레짐작한 것이었다. 성별이 원인이라는 건 그녀에겐 믿을 수 없도록 터무니없는 일이었기에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 (36쪽)
그 지휘관이 정답을 알려줬는데도 클레오파트라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문제는 그녀가 외국인이라서가 아니었다. 여자의 입으로 상스런 말을 쏟아내고 여자의 몸에 군장을 걸친 게 문제였다. 여자는 남자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 않는 법이었다. 그것도 직접, 남자들 면전에서라니 안 될 일이었다. (37쪽)
저자 콜린 매컬로는 살아있는 신이며 이집트의 공동통치자인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인들에게 무시당한 이유가 그녀가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물론 로마의 최고 권력자 둘을 차례로 애인으로 삼은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로마시민들의 증오와 분노를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안타까운 건 클레오파트라다. 그녀는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듯 싶다. 그녀가 외국인이라서가 아니라 여자였기 때문에 로마인들이 이집트의 최고권력자 클레오파트라를 무시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3. 시스터즈
명백하게 존재하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유리 천장’ 같은 단어로 표현될 수 있는 건, 그간 페미니스트들이 싸워왔던 안건 중 먼저 두 개의 안건, 교육을 받고 직업을 가지며 재산을 소유할 권리, 정치인을 뽑는 선거에 투표할 권리가 성취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실제적인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고려를 별도로 하면, ‘정치적 영역’에서의 여성의 평등은 실현되었다. 여성이 구의원, 시의원, 국회의원, 장관, 국무총리, 대통령이 되는 데에는 남성보다 다섯 배, 열 배 혹은 백배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여성이 그러한 지위에 오르는 것을 ‘방해하는 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혁명적 선구자들의 희생과 투쟁의 결과로 여성의 지위는 이전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견고해졌다. 오늘, 바로 이 시점에서 가장 극렬한 전투가 일어나는 지점은 여성의 ‘몸’에 대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임신 중절 불법화, 여성 신체에 대한 몰래 카메라의 불법적인 촬영, 상업적 목적의 유통에 더해 여성의 역할을 어머니로서 한정하는 것, 출산을 여성의 의무로 규정하는 것, 아름다운 육체의 여성만을 ‘진정한’ 여성으로 인정하는 것. 남성과 여성의 차이점을 여성 억압의 근거로 주장할 때, 그 시작점은 항상 여성의 ‘몸’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싸움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난한 싸움이 분명하다. 하지만 억압과 협박, 방해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몸은 여성의 것이다.
여성의 몸은 여성의 것이다.
4. 문명의 붕괴
나는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책은 『총, 균, 쇠』 한 권이면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나와 세계』를 읽게 되었고, 그래서 그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문명의 붕괴』를 시작하게 됐다. 나의 정확한 공략 지점은 ‘이스타섬의 비밀’과 ‘마야 붕괴’여서 <1장 : 몬태나의 드넓은 하늘 아래에서>는 건너뛰었다. 왜 아니겠는가. 나는 불혹의 나이를 넘겼다. 이제 읽다가 지루한 장면은 뛰어넘을 수 있다. 읽다가 궁금하면 맨 뒷장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나는 내 마음대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환경에 따른 붕괴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반드시 고려해야 할 다섯 가지 요인을 찾아냈다. 그중 네 가지, 즉 환경 파괴, 기후 변화, 적대적인 이웃 그리고 우호적인 무역국은 한 사회의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섯 번째 요인, 즉 환경 문제에 대한 사회의 대응은 언제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25쪽)
달리 말하면 기후 변화로 자원 고갈의 속도가 빨라지지 않는다면 스스로 자초한 자원 고갈은 그런대로 이겨낼 수 있었다. 결국 어느 한 가지 요인만으로 사회가 붕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환경 훼손과 기후 변화가 겹치면 그 결과는 거의 언제나 파국이었다. (27쪽)
이번 여름은 폭염과 에어컨으로 갈음할 수 있다. 예상보다 전기세가 많이 나오지 않아 이 정도면 뭐, 에어컨 틀 수 있겠네, 라는 어처구니 없는 결론에 이르기 전, 환경 훼손과 기후 변화가 겹치면 그 결과는 거의 언제나 파국이라는 재레드 다이몬드의 경고가 귓가에 울린다. 현재 상황에 대한 절박한 인식이 어떤 대책을 준비하게 하는지는 조금 더 읽어보면 알 수 있을 듯 싶다.
가을이다. 완연한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