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 정도 된 아이를 보살피던 시절에는 이 세상 두 부류의 사람들을 미워했다. 아이를 재우려고 할 때 방해하는 사람과 자고 있는 아이를 깨우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11시 20분. 아직도 둘째는 꿈나라.
인생은 딱 한 번이다. 아이의 인생도 딱 한 번이다. 아이의 3살도, 아이의 7살도, 아이의 13살도 딱 한 번이다. 8개월 갓난장이를 안고 EQ를 향상시킨다는 프로그램에 참여해 쪼르르 앉아있는 엄마들은 바보가 아니다. 아이는 그 때, 딱 한 번 8개월이다. 아이의 하루는 어른의 100일이다.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다 보면 빈둥거리는 우리집 아이들만 부모의 무관심 때문에 어디에선가 무엇에서인지 모르게 뒤처진 것 같아 갑자기 걱정이 찾아든다.
큰아이는 바빴다. 그 아이는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던, 가위질을 하던, 발레를 하던, 피아노를 치던, 책을 읽던. 그 아이는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둘째는 그냥 빈둥빈둥이다. 영어공부앱 <슈퍼팬>에 접속하면 첫 화면이 이렇게 뜬다. 영어는 빈둥대는 거야.
이게 둘째의 모토다. 엄마, 영어는 빈둥대는 거야.
그래, 빈둥대는 거야. 빈둥대면서 하는 거야.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젊은 부모들에게 당부한다. 심리적으로, 시간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내가 갖고 있는 걸 자식에게 몽땅 쏟아붓지 말라고. (80쪽)
여성학자보다는 아들 셋을 셋 다 서울대에 입학시킨 일로 더 유명한 여성학자 박혜란은 부모들이 육아에 정서적, 경제적으로 매몰되는 것을 경계했다. 만약 정서적으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면 경제적인 측면에서라도 자식의 교육을 무조건 지원하려는, 올인하려는 마음을 다잡으라고 권했다. 나로 말하자면, 가까운 언니들로부터 누구 엄마는 진짜 돈 안 들이고 애들 키우네, 애를 공짜로 키운다,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고, 사교육에 대한 생각이 남편과 일치하기 때문에 ‘경제적 측면’에서 육아평정심을 유지하는 일이 어렵지 않지만. 가끔은, 아주 가끔은, (정말) 이렇게 (공부를) 안 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면 동업자에게 ‘어떻게 할 거냐’, ‘당장 대책을 내놓아라!’라 협박하기 일쑤인데, 동업자는 큰아이가 공부하던 책 <진짜 잘 외워지는 중학 영단어 1500>을 시키겠다 했다. 아빠와 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게임으로 아는 둘째는 2-3일간의 반항을 뒤로 하고 ‘영어 단어’를 ‘드디어’ 외우기 시작했다. 잘 하고 있다는 동업자의 칭찬에 정말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어제 들어보니 방학 내내 나간 진도가 ‘D-13’라는 것이다. 잘 하고 있느냐, 정말.
하여, 이 어린이, 귀엽고 깜찍하나 이제는 콧수염 자리가 거무스름하고, 놀기를 좋아해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이 어린이를 깨워서 공부를, 영어 공부를 시켜야 할 텐데… 사실, 나는 좀 바쁘다.
다른 남자와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잭 리처, 바로 그다.
둘째는 내 인생에 정말 특별한 남자다. 나는 이 세상 어떤 남자도 내가 이 아이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사랑한 적이 없다. 그는 나와 함께 열 달을 살았고, 15개월 모든 식사 때마다 나와 붙어 있었으며, 지금도 나의 레이더 중심에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그도 나를 사랑한다.
잭 리처도 그렇다. 잭 리처는 내 인생에 정말 특별한 남자다. 나는 이 세상 어떤 남자도 내가 잭 리처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사랑한 적이 없다. 그는 나의 존재를 모르고, 나 역시 어디로 가야 그를 만날 수 있는지 알지 못 하지만, 그는 내 레이더 중심에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그는 나를 기다린다.
남자 대 남자.
아들 대 잭 리처.
나는 이미 문을 닫았다.
잭 리처.
오늘은 그의 승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