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항상 낯선 나라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바로 옆 나라들의 이야기나 가장 흔하게 보고 듣는 영미권의 이야기가 아니라 더 먼 곳, 더 낯선 곳의 이야기들. 그래서 읽을 소설을 찾다 눈에 띈 것이 나이지리아의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소설 『보라색 히비스커스』였다. 


이 책을 사기 전 인터넷 서점의 미리보기를 읽을 때부터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나이지리아의 낯선 자연과 문화, 풍속이었다. 주인공네 집 정원에 피어 있는 온갖 낯선 식물들, 재료부터 낯설어 무슨 맛일지 상상도 안 되는 나이지리아 전통 음식들, 주인공의 할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이 치르는 나이지리아 전통 종교의식. 이보어(나이지리아의 주요 언어 중 하나) 단어들이 대화 중간 중간에 번역되지 않은 채로 끼어 있어 낯선 느낌이 더 강해졌다. 


하지만 깊이 없는 이해 없이 낯선 것들의 매력만 즐기는 데서 멈추고 싶지 않았다. 이 책에서 깊은 이해와 공감을 이끌어낸 건 낯익은 이야기였다. 주인공들이 겪는 가부장제, 유일신교, 독재정권의 억압은 우리가 겪었거나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이다. 왜 지금 여기에서 낯익은 이야기를 찾지 않고 먼 나이지리아에서 낯익은 이야기를 찾느냐고 한다면, 나는 더 넓은 세상의 이야기가 궁금하고, 그 사람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동질감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주인공 캄빌리와 오빠 자자는 가부장제, 유일신교, 독재정권이라는 3중의 억압을 겪고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그들을 속박하는 것은 가부장제와 유일신교였다. 가부장제와 유일신교의 권위로 아버지가 그들의 삶을 좌지우지했기 때문이다. 남들은 부유한데다 정의로운 민주화 투사인 아버지를 존경하고, 그런 아버지의 자식으로 태어난 두 남매를 부러워한다. 그러나 집안에서 아버지는 가장의 권위를 내세우며 아내와 자식들에게 자신의 규칙과 가톨릭 신앙을 강요하는 폭군이다. 아내와 자식들이 자신의 뜻을 조금이라도 거스르면 아버지는 무자비하게 그들을 폭행한다. 그러나 오랜 세월 아버지의 규율과 통제에 얽매어 있었던 두 남매는 그것이 폭력이고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그런 두 남매가 자신들의 억압적인 상황을 깨닫고 변화하기 시작하게 한 것은 이페오마 고모였다. 이페오마 고모는 국립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는 지식인이고, 가부장제와 유일신교, 독재정권의 폭력과 억압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자식들이 자신을 거역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아버지와 대조적으로, 이페오마 고모는 항상 자기 아이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아이들이 자유롭게 행동하게 한다. 이페오마 고모 덕분에 방학 동안 고모 댁에 머물던 캄빌리 남매는 스스로 생각하고, 생각한 대로 말하는 것을 점차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아버지의 억압과 폭력으로 숨 막히게 만드는 이 소설에서 이페오마 고모는 두 남매뿐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숨 쉴 틈을 만들어준다. 


고모 덕분에 변화한 두 남매가 아버지에게 반항하고 스스로 자유를 찾길 바랐던 내 기대를 저버리고, 이 소설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아버지의 권위에 흠집이 가고 무너지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아버지는 죽고 나서도 두 남매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남긴다. 군사 정권의 원수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이지리아의 모든 문제가 갑자기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부패와 불의, 억압이 가득한 나이지리아를 떠나 미국에 간 이페오마 고모네 가족도 인종차별과 가난에 시달릴 것이다. 실질적으로 문제들이 해결된 것도 아니고, 캄빌리가 눈에 띄는 성장을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두 남매의 마음속에는 “이페오마 고모의 실험적인 보라색 히비스커스처럼 느껴지는” “원하는 것이 될, 원하는 것을 할 자유.”가 주어졌다. 적어도 자유의 씨앗은 둘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렸다. 진정한 자유는 마음속에서부터 시작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소설의 시대 1 백탑파 시리즈 5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끔 소설을 쓰곤 한다. 내가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일기 대신 소설의 형식으로 쓴다. 일기도 매일 쓰긴 하지만, 일기를 쓸 때보다 좀 더 거리를 두고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나와 그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만들어가는 것이 흥미롭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큰 흐름도 잡아놓지 않고, 가끔씩 소설이 쓰고 싶어질 때마다 마음 가는 대로 몇 문단씩 써 놓는다. 나 자신을 제외한 어느 누구에게도 읽힐 만한 소설은 못 되지만 소설을 쓰는 행위에서도, 써 놓은 소설에서도 위안을 얻는다.


김탁환 작가의 『대소설의 시대』를 읽으면서, 18세기 조선에도 나처럼 소설을 읽고 쓰는 것을 즐겼던 여성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근 전체 180권이나 되는 『완월회맹연』등의 대소설이 여성들의 손으로 쓰여진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고, 김탁환 작가는 그 연구 결과를 토대로 『대소설의 시대』를 썼다고 한다. 조선 후기 여성들이 한글 소설을 즐겨 읽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소설을 직접 창작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것도 100권이 넘는 길고 긴 소설이라니. 조선 후기 여성 작가들이 이런 대작을 쓸 수 있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김탁환 작가는 지금까지 나온 연구 결과에 상상을 섞어 ‘임두’라는 필명의 조선 후기 여성 작가를 만들어냈다. 임두는 23년 동안 199권에 이르는 소설 『산해인연록』을 써 왔다. 그녀가 23년 동안 소설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소설을 좋아했던 혜경궁 홍씨와 의빈 성씨가 그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후원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그녀의 소설을 독자들이 읽기 쉽도록 깔끔하게 필사해 주는 궁녀들의 도움이 있었다. 이렇게 대소설을 만드는 여자 뒤에는 소설을 사랑하는 여자들의 연대가 있었다.


그녀들 이전에는 임두가 처음 작가로서 발을 내딛게 해준 여자들의 연대가 있었다. 시부모는 스물네 살의 임두에게 오랜만에 친정에 온 시누이를 위해 소설들을 필사하라고 했다. 임두는 단순히 필사만 한 게 아니라 자신이 보기에 필요 없는 내용을 빼고 내용을 더 지어서 넣었다, 시어머니는 임두가 더 넣거나 뺀 내용을 보고 임두의 글 쓰는 재능을 알아보았다. 그 이후로 임두는 시댁 여인들의 소설 쓰기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고, 소설을 쓰는 즐거움에서 평생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임두 같은 대작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소설을 놓았다 하더라도, 그녀들이 있었기에 임두는 작가가 될 수 있었다. 소설에 자신들이 겪는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고통을 담았던 그녀들에 대한 기억이 임두가 대소설을 수십 년 동안 계속해서 쓸 수 있게 했던 원동력이 되었다.


그녀들과 임두가 그토록 소설을 사랑했던 것은, 그 시절 그녀들이 꿈을 꾸고 욕망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소설뿐이었기 때문이다. 작은 조선의 한 집안 안에 갇혀 지내지만 그녀들은 소설 속에서 광활한 대륙과 천상의 세계, 지하의 세계를 넘나들면서 수백 명의 인물들이 그 안에서 살아 숨 쉬게 만든다. 단지 이야기일 뿐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이야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때로는 살아갈 힘을 준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에게도, 그 이야기를 읽거나 들으며 즐기는 사람들에게도.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꿈을 꾸고 욕망하고 그것을 펼쳐낼 방법이 많아진 시대를 살고 있지만, 나는 수백 년의 그녀들에게 깊이 공감한다. 내게는 그녀들이 겪었던 것과는 또 다른 현실과 제약들이 있고, 그런 답답한 현실에서 내가 버틸 수 있게 하고, 꿈꿀 수 있게 하는 건 이야기들을 읽고 쓰는 것이다. 대소설의 시대는 이야기를 만드는 여자들의 시대였고, 그 시대는 끝나지 않고 내 안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양이 임보일기
이새벽 지음 / 책공장더불어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4월 8일


이새벽 작가님의  『고양이 임보일기』를 주문했다. 이새벽 작가님을 알게 된 건 작년 가을이었다. 도서관에서 책 한 권을 더 빌릴까 해서 서가들을 둘러보다, 우연히 이새벽 작가님의 『고양이 그림일기』를 발견했다. 작가님이 고양이들과 식물과 함께 한 나날들을 일러스트와 일기로 그려낸 책이었다. 


그 이후로 이새벽 작가님의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에서 고양이와 식물을 담은 일러스트와 글을 즐겨 보고 있다. 그러면서 작가님이 새끼 길고양이 다섯 마리를 임시보호하다 입양을 보낸 이야기를  『고양이 임보 일기』라는 책으로 낸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책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들을 때부터 읽고 싶은 책이었지만, 그 동안 많은 일들이 있어 출간한 지 세 달이나 지난 지금에야 주문을 했다. 전편인  『고양이 그림일기』도 예전부터 갖고 싶었기 때문에 함께 주문했다. 



4월 9일


주문한 지 하루 만에 책이 도착했다. 『고양이 그림일기』와 비교해 보니 그림체가 확연히 더 아기자기하고 섬세하다. 임시보호했던 다섯 아가나 『고양이 그림일기』 이후로 작가님이 키우고 있는 검은 고양이 베리나 더 작고 올망졸망해서 그런 걸까.  


그런데 그 귀엽고 사랑스러운 그림체로 그려낸 현실은 만만치 않다. "새끼 고양이가 다섯 마리면 똥도 오줌도 설사도 모두 다섯 배가 된다는 것을 몰랐다." 그 뒤의 말을 들으니 더 짠했다. "나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괜찮다. 괜찮지 않으면 큰일이 날 테니." 아이고, 작가님. 


4월 10일


마냥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길고양이들이 겪어야 하는 잔혹한 현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도 아프고 화도 났다. 어미가 잘 키우고 있는 새끼 길고양이들을 도와준다고 거두었다가 결국 어미와 생이별시키고 정작 자기는 책임도 지지 못하는 사람, 데려온 고양이를 책임지지 못하고 강제로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게 하는 고양이 공장으로 가게 한 사람. 어설픈 선의 때문에 오히려 고양이들을 더 불행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나도 그런 어설픈 선의와 부족한 지식 때문에 고양이를 제대로 구하지 못한 적들이 있었다. 내가 누굴 나무라나 싶다. 



4월 11일


표지에 나온 작가의 말대로 혼자 새끼 고양이 다섯 마리를 돌보는 것은 만만치 않다. 나도 높은 곳에서 떨어져 어미와 떨어진 새끼 고양이를 돌보긴 했지만 단 2주 동안만이었고, 사실상 고양이를 주로 돌본 건 집에 계신 엄마였다. 그런데도 먹는 대로 설사를 하고 바닥에 흘리고 다니는 새끼 고양이를 돌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작가님은 나와 달리 혼자서, 그것도 다섯 마리나 되는 새끼 고양이를 돌봐야 한다. 분유와 사료와 설사가 뒤섞인 비린내가 온 집안과 몸에 배이고, 몸 곳곳에는 새끼 고양이들이 만든 상처가 늘어간다. 


아래 컷만 봐도 다섯 아이들을 돌보느라 엉망진창이 된 작가님의 집안 상황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 와중에도 일기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아이들에게 분유 먹이고 배변 시키는 법까지 꼼꼼하게 기록하신 것이 놀랍다. 


4월 12일


작가님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을 통해 『고양이 그림일기』 의 시점 이후로 '베리'라는 까만 암컷 고양이를 길러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베리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자기도 어린데 자기보다 더 어리고 약한 새끼 고양이들을 그루밍해주고, 배변 유도도 해 주고, 화장실 쓰는 법도 가르쳐준다. 작가님이 잠시 맡았었던 또 다른 길고양이 시로에게 얻어터져 가면서도 계속 다가가서 결국은 시로의 마음을 열고. 나야 책과 블로그, 인스타그램의 사진과 일러스트로만 보는 아이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이인 것 같다. 


작가님과 베리, 임보 아기들, 든든한 흰둥이, 상처 받으면서 닫혔던 마음을 열어가는 시로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이 사랑스럽다. 우울할 때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사랑스러운 모습들이 나와, 딱딱하게 굳었던 마음도 녹아내린다. 


4월 13일


임보 아기들이 한 명씩 입양되는 이야기를 보면서 안도감이 들면서도 아쉬워진다. 한 마리씩 입양 갈 때마다 안도하면서도 허전함을 느끼는 작가님의 마음이 느껴진다. 베리도 돌보던 아기들이 한 마리씩 사라질 때마다 허전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섯 아이들은 모두 좋은 곳에 입양을 갔고,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삼색이의 새 이름 홍시를 마지막으로 다섯 개의 이름을 모두 수집한 날엔 배부르고 행복한 용이 된 기분으로 잠자리에 누웠다. 그런 날에는 악몽을 꿀 리 없었다. 용이 고양이를 모두 구했으니까." 이 마지막 문단에서 나도 안도했다. 지금까지 한 마리의 고양이도 구하지 못했던 나는 다섯 마리의 새끼 고양이를 모두 구한 용에게 그 동안 정말 수고 많았다고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양이 임보일기
이새벽 지음 / 책공장더불어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작보다 더 아기자기하고 촘촘해진 그림체가 새로운 캐릭터들(임시보호하고 있는 아기 고양이들, 베리)의 사랑스러움을 잘 살린다. 다섯 마리 아기 고양이를 키우는 고충과 보람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데도 그 감정이 그대로 전해진다. 길고양이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도 잊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기왕이 온다 히가 자매 시리즈
사와무라 이치 지음, 이선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포물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보기왕이 온다』의 책 예고편을 보고는 호기심이 생겼다. 주인공 히데키는 어린 시절 외갓집에서 '그것'을 처음 만났다. 초인종 소리가 울렸고, 현관문 너머로 키가 큰 회색 형체가  보였다. 외할머니를 찾던 '그것'은 외할머니가 지금 집에 없다고 하자 외삼촌을 찾았다. 그런데 외삼촌은 수십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히데키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외삼촌도 없다고 하자 '그것'은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세 번이나 불렀다. 그러자 가만히 누워있던 외할아버지는 현관문 너머의 존재에게 돌아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서 히데키에게 말했다. 문을 열어서도, 대답해서도 안 된다고. 그리고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한 히데키에게 '그것'이 다시 찾아온다. 그 뒤에 어떤 이야기가 이어질지 궁금해졌고, 도서관에서는 항상 대출 중일 정도로 인기가 많은 책이라 어떤 책일지 더 궁금해졌다. 그러다 드디어 이 책을 손에 넣어 읽게 되었다. 


​  첫 장에서 느낀 공포는 비현실적인 공포다. 히데키를  위협하는 '그것'은 '보기왕'이라는 괴물이다. 자신에게 대답한 사람을 산으로 끌고 가 버린다는 보기왕은, 수십 년에 걸쳐 히데키를 찾을 정도로 집요하다. 안심하고 있으면 다시 돌아와 히데키와  그의 가족들을 노리기 때문에 안심할 수 없다. 보기왕과 접촉했던 사람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공포는 점점 더 커진다. 보기왕이 존재하고 자신에게 점점 더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의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어 더 두려운 것이다. 


​  공포가 가장 극대화되는 순간은 마침내 히데키가 보기왕과 대면하게 되었을 때이다. 히데키가 자신을 도와주는 퇴마사 코토코의 지시대로 가족들을 집에서 내보내고 보기왕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집 전화에 코토코가 남긴 음성 메시지는 정반대다. 당신을 집으로 오게 한 건 보기왕의 함정이고, 지금 당장 집에서 빠져나와야 된다는 것이다. 음성 메시지를 믿지 말고 자신의 지시를 계속 따르라는 핸드폰 속 코토코의 목소리와 집에서 나와야 한다는 음성 메시지 속 코토코의 목소리. 도대체 둘 중 어느 것을 믿어야 할까? 히데키는 핸드폰 속 코토코를 선택한다. 


​  히데키가 이제는 괜찮다고 안심하고 읽는 독자도 마음을 놓았을 때,  작가는 뒤통수를 친다. 핸드폰 속 코토코는 사실 보기왕이었고, 핸드폰 속 코토코가 내린 지시도 보기왕을 퇴마하는 것이 아니라 히데키를 유인하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속임수였다. 보기왕은 히데키 앞에서 무시무시한 이빨을 드러낸다. 그래도 주인공이자 서술자이고, 영화판에서는 츠마부키 사토시가 연기하는 캐릭터인데 이렇게 빨리 죽을 줄 몰랐다. 이제 겨우 작품의 3분의 1 지점인데. 설마 정말로 죽었을까 싶었는데, 다음 장에서 무언가에 머리의 반을 먹힌 처참한 모습으로 히데키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히데키가 정말 죽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  비현실적인 존재 보기왕이 불러일으키는 첫 장의 비현실적 공포와 달리, 두 번째 장에서 느끼는 공포는 매우 현실적인 것이다. 두 번째 장에서 서술자가 히데키에서 그의 아내 카나로 바뀌면서, 그들의 결혼 생활이 히데키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행복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난다. 히데키는 자신이 누구보다 헌신적인 아빠이고 적극적으로 육아에 동참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카나가 생각하는 히데키는 자신이 좋은 아빠라는 생각에 도취된 사람이었다. 카나는 죽을 힘을 다해 아이를 낳았는데, 히데키는 속 편하게도 카나가 순산했다고 이야기한다. 아이를 돌보느라 책 한 페이지 읽기도 힘든데 히데키는 온갖 육아 서적을 사와서 읽어보라고 강요한다.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용변을 치우는 일처럼 정말 힘들고 귀찮은 일은 하지 않으면서 아이와 함께 노는 자신의 모습을 블로그에 올리고, 아빠 모임에 참여하는 데만 열중한다. 


​  여기에서 내가 느낀 공포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여자로서 느끼는 공포다. 연애할 때는 누구보다 자상하고 다정했던 사람이라도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기는 힘들다는 것. 출산과 육아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도와주는 것은 '남'의 일에 힘을 보탠다는 것이지 자신의 일로 여기는 것은 아니다.) 같이 하려는 사람을 만나기 참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육아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운데 남편은 아이와의 행복한 모습만 블로그 포스트로 올려놓은 것을 보고 카나는 폭발해 버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그녀와 같은 모습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두려워졌다. 사회와 제도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 한 카나나 나뿐만 아니라 모든 여성들이 이런 공포를 느낄 것이다. 


​  또 하나는 관계에서 느끼는 공포다. 히데키는 카나와의 결혼 생활이 완벽하다고 생각했지만, 카나는 히데키가 처참하게 죽었는데도 아무런 슬픔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감정의 골이 깊어져 있었다. 나는 상대방에게 잘하고 있고 나와 상대방의 관계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상대방은 나 때문에 상처를 받았고 둘의 관계는 겉보기에만 괜찮지 속으로는 곪을 대로 곪아 있었다. 내게도 그런 관계가 있을까 두려웠다. 그리고 히데키처럼 '상대방에게 잘해주는 나'의 모습 자체에 도취되어 정작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는 배려하지도 않고 상대방을 더 힘들게 하지는 않았는지 두려워졌다. 


​  보기왕이 만들어내는 비현실적인 공포도 피부로 와 닿을 만큼 생생하게 구축되었지만, 내 마음 깊은 곳까지 뒤흔드는 것은 이런 현실적인 공포였다. 히데키 가족을 돕는 퇴마사 일행은 말한다. 보기왕은 사람 마음의 빈 틈을 파고 든다고. 보기왕이 히데키를 죽이는 데 성공한 것도 히데키와 카나 사이의 감정의 골을 교묘하게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마음에 틈이 생기면 어떤 슬프고 끔찍한 것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 결국 모든 공포의 근원은 사람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이 소설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  그러나 세 번째 장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인 전개는 이런 주제의식을 흐려놓는다. 수십 년 동안이나 히데키와 가족들을 쫓아다니며 자신과 접촉한 사람들을 끔찍하게 죽이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내서 속일 정도로 교활하고 악랄한 보기왕은 정말 무시무시한 존재다. 그러나 퇴마사 코토코는 그렇게 무서운 존재인 보기왕을 너무나 쉽게 제압한다. 코토코가 진작에 나섰으면 히데키가 죽지도 않았을 것이고 딸 치사가 보기왕에게 끌려가지도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코토코를 의심하던 형사가 코토코가 경찰청의 높으신 분과 친분이 있는 관계라는 것을 알고 굽신거리는 모습은 일본 만화에서 너무 많이 보아왔던 클리셰라, 진지했던 소설의 분위기가 한 순간 우습게 느껴졌다.  


  코토코의 활약으로 보기왕에게 끌려갔던 치사가 무사히 엄마 품으로 돌아오는 결말에서 이제까지의 어두움과 공포가 모두 걷혀 개운했다. 하지만 보기왕이라는 존재가 자아내는 공포와 그 공포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돌아보는 주제의식을 끝까지 끌고 나가는 뒷심이 부족했다. 그것이 이 소설의 결정적인 단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