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요리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스탠리 엘린 지음, 김민수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별 요리』를 처음 알게 된 건 러시아 문학 속 음식들을 분석한 책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를 통해서였다. 러시아 문학 중 미식에 탐닉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소설을 다룬 부분에서, 미국의 추리 작가 스탠리 엘린의 단편소설 「특별 요리」의 내용이 소개되었다. 이 소설은 러시아 문학은 아니지만 미식에 집착하느라 더 중요한 것을 놓쳐버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소개되었다. 전체 줄거리가 다 소개되는 바람에 읽어보지도 않은 소설의 스포일러를 당했지만, 그래도 직접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특별 요리」가 수록된 동명의 단편소설집을 찾아읽게 되었다.

직접 찾아 읽어보니, 장르 문학이지만 한 편 한 편이 순수문학 못지않게 문장력과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력이 뛰어나다엘린의 문장력이 뛰어나서인지 번역가의 감각이 젊은 것인지 70여 년 전이 배경인데도 전혀 낡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번역문의 문장도 자연스럽고 깔끔하다간결한 문장만으로도 소설의 분위기를 섬세하고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특히 「성탄 전야의 죽음과 「체스의 고수」, 「브로커 특급의 마지막 문장은 그 문장 하나만으로 반전을 제시하며 전율을 일으킨다.

엘린의 단편소설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난처한 상황더 심하게는 파국으로 치닫는데안됐다 싶다가도 따져보면 거의 전부가 자업자득인 경우다또 다른 소설이나 영화를 연상시키는 부분들이 중간 중간에 보이는데작품이 쓰여진 시기를 생각하면 엘린의 소설들이 원조가 아닐까 싶다. 엘린의 소설들이 이후에 나온 수많은 스릴러 소설, 영화들의 원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 단편에 대한 단상은 이렇다.


특별요리

등장인물들은 식도락에 미학이니 예술이니 온갖 미사여구를 다 끌어들이지만 정작 이 작품의 결론은 인간들아적당히 미식에 탐닉해라.’코스테인은 식당의 비밀과 래플러의 운명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방관한 건 아니었는지 미심쩍다이미 스포일러를 당하고 읽었고스포일러를 당하지 않았어도 이런 종류의 이야기의 반전은 뻔하다그런데도 맛의 섬세한 묘사와 인물들 사이의 묘한 긴장감 때문에 긴장을 늦추지 않고 읽었다.


손발의 몫

사무 보조 아르바이트로 일한 경험이 꽤 많아서 갑자기 낯선 곳에서 사무 보조 일을 하게 된 주인공에게 공감하면서 읽었다사람을 죽이고 나서도 어떻게 계속 아무렇지도 않게 일을 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생계를 생각하면 일을 그만두기는 쉽지 않다그리고 나쁜 짓을 하고도 인간은 생각보다 더 쉽게 일상을 이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인이라는 소재는 내 생계를 위해 다른 사람에 대한 죄책감과 양심도 버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회에 대한 비유이지만, 그저 비유로 끝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을 때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아서, 자신도 그런 일을 당하기 두려워서 외면해 버릴 때가 많으니.


성탄 전야의 죽음

이 단편의 반전은 최근에 일어난 줄 알았던 의문사 사건이 무려 20년 전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 20년 동안 찰리와 실리아변호사는 같은 지옥 안에 있었던 셈이다하지만 누구 하나 빠져나올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인간의 집착은 생각보다 더 집요하고 지독하다. 매일 다른 사람에게서 받았던 상처를 곱씹어 보고, 10년도 넘은 상처를 다시 들여다보는 내 자신을 보니 남의 얘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애플비 씨의 죽음

체호프의 단편 「아내들」을 떠올리게 한 작품「아내들」의 주인공 라울 시냐보르다가 뻔뻔스럽게 사소한 이유로 아내들을 죽여온 자신의 살인 행각을 이야기하는 반면, 애플비는 이제껏 만난 적이 없던 강적을 만나 고전한다하지만 그 강적도 한 순간의 방심으로 목숨을 잃는다하지만 동시에 애플비를 지옥으로 보내버렸다. 짧은 마지막 부분만으로 효과적으로 반전을 묘사한, 깔끔한 블랙코미디.


체스의 고수

조지 허니커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체스에 집착한 것보다도 아내와 소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애초에 아내가 조지의 취미 생활을 존중해 줬더라면 그는 가상의 체스 상대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조지가 아내를 회피해 가짜 상대를 만드는 대신 솔직한 마음을 이야기했더라면 파국은 없었을 것이고소통과 존중이 없는 결혼생활이 이렇게 무섭다조지가 화이트에게 완전히 잠식당했음을 보여주는 마지막 문장은 소름끼친다.


최상의 것

영화 <태양은 가득히>를 떠올리게 했던 단편. 불행히도 이 단편의 배경인 1940년대 미국과 2020년대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은 그리 다르지 않다빈부 격차가 또 다른 계급 사회를 만들어냈다따져 보면 상류층들도 그렇게 대단한 인간은 아니고그들 사이의 규칙과 유행도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고 어떻게 보면 유치하기까지 하다엘린은 이 사실을 70여 년 전에 이미 간파했었다. 2020년대인 지금도 상류층에 대한 선망열등감증오상승 욕구로 가득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다그러니 아서 같은 사람들의 비극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배반자들

주인공이 한 여자의 파란만장한 삶을 추적하다 마침내 그 여자와 마주치지만그 여자가 비참한 최후를 선택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는 점에서 영화 <화차>를 연상시킨다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좀 더 애정과 관심을 기울였다면남편이 에이미를 학대하지 않았다면그리고 에이미 자신도 친구 제니의 말에 귀 기울였다면 비극을 막지 않을 수 있었을까로버트의 말대로 그들 모두가 배반자들이었다아니면 로버트가 조금이라도 용기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로버트도 배반자들까지는 아니어도 방관자였다로버트가 마지막에 의자를 부순 것은 그런 자신에 대한 분노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우스 파티

이 모든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어 오고 있다는 반전은 밝혀지지만왜 모든 일이 반복되고 있는지, 어떻게 하면 이 반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는다이 모든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에 마일스는 더더욱 진저리를 치고 벗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었을 것이다새 연인과 도망치는 대신아내와 자신의 배역에 충실하기로 선택한다면 반복의 수렁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그가 매번 도망치기로 선택했기에 아내에게 총을 맞고 다시 정신을 차리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브로커 특급

영화나 드라마에서 악당들은 항상 자기 사정 다 말하다가 망한다이 단편의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다아내는 어차피 다 눈치 채고 끝까지 주인공까지 지옥으로 끌고 갔겠지만그나저나 아내는 어차피 돈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고 남편과 결혼한 거면서 남편한테 왜 그리 당당한 건지 모르겠다.


결단의 순간

정말 사소한 자존심 싸움이 사람을 잡을 때가 있다이 단편에서는 그런 사소한 자존심 싸움과 그에 따른 미묘한 심리를 날카롭게 포착한다이 자존심 싸움의 끝이 어떻게 될지 작가는 열린 결말로 남겨뒀지만나는 휴가 레이먼드가 갇힌 방문을 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자신감 있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오지 않는다는 자신의 의견이 이미 깨졌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를 얽매고 있던 감정이 생각보다 중요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이 한 번은 꼭 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담과 이브의 모든 것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정영목 옮김 / 까치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담과 이브 이야기를 듣고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지 않았으면 이 세상에는 아직도 아담과 이브 두 사람만이 살고 있지 않을까이브가 고통스럽게 아이를 낳는 벌을 받았기에 우리가 존재하는 게 아닐까그렇다면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은 게 우리에게는 다행인 건데아주 단순한 이야기여서 군데군데 빈 곳이 많으니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런데 지금의 나뿐만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아담과 이브 이야기를 놓고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아담과 이브 이야기 자체에 또 다른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는 듯하다. “세계 역사에 이렇게 오래 지속되고이렇게 널리 퍼지고이렇게 집요하게 뇌리를 사로잡을 만큼 현실감이 있었던 이야기는 거의 없다.” 아담과 이브의 모든 것은 아담과 이브 이야기가 시작되고 이야기 이상의 권력을 가질 정도로 흥했다가 다시 이야기의 위치로 내려오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그 과정 자체가 고대의 메소포타미아부터 현대의 우간다까지 수천 년의 세월과 수만 킬로미터의 거리를 넘나드는 거대한 이야기이다.


아시리아의 점토판에 새겨진 길가메시와 엔키두의 모습.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몇 가지 면에서 메소포타미아 신화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저자는 아담과 이브 이야기가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맞서는 일종의 저항 서사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아담과 이브 이야기가 담긴 창세기는 모세가 썼다고 전해지는 모세 5’ 중 첫 번째 책이고, ‘모세 5은 기원전 5세기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이때는 바빌로니아에게 점령당해 바빌로니아로 끌려갔던 유대인 포로들이바빌로니아를 점령한 새로운 정복자 페르시아의 키루스 왕 덕분에 유대 땅으로 돌아가던 시기였다바빌로니아에서 수십 년 동안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종교와 신화에 노출되어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 줄 이야기가 필요했다그래서인지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메소포타미아 신화와는 몇 가지 차별점을 갖게 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영웅 서사시 <길가메시 이야기> 속 등장인물 엔키두처럼 아담과 이브는 신이 진흙으로 만든 존재이고, 길가메시와 엔키두처럼 서로 떼어낼 수 없는 한 쌍의 파트너가 된다. 엔키두도, 아담과 이브도 아무것도 모르는 야생의 존재에서 이성과 문명을 접하면서 변화되고, 죽음을 피해가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엔키두에게 문명인으로 변화하는 것이 축복이었던 반면, 아담과 이브에게는 그것이 저주였고, 엔키두에게 죽음이 정해진 운명이었던 반면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이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이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에서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와는 차별점을 만들어내면서 자신들의 서사를 완성시켰다. 

(위)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 <아담과 이브>(1504)

(아래) 얀과 후베르트 반 에이크 형제의 <헨트 제단화>(1432) 중 아담과 이브 부분.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은 인체에 대한 면밀한 연구와 뛰어난 기술을 토대로 아담과 이브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해 냈다.


이 이야기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유대의 아담과 이브 이야기였다성경을 경전으로 삼는 기독교가 유럽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종교가 되었기 때문이다.(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는 수천 년 뒤 유럽의 고고학자들이 쐐기 문자 기록들을 다시 발견할 때까지 잊혀 있었다.) 기독교 신학의 기틀을 다진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교리를 확립한 이후기독교인들에게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이자 삶의 지침이 되었다뒤러나 반에이크 같은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은 인체에 대한 면밀한 연구와 뛰어난 기술을 바탕으로 완벽하고 생생한 육체를 갖춘 아담과 이브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17세기 영국의 작가 밀턴은 자신이 이상적으로 여겼던 부부관계와 현실에서 보아온 정쟁을 반영해사탄과 하나님의 갈등아담과 이브의 복잡 미묘한 애정 관계를 생생하게 그려낸 대서사시실낙원을 완성했다이렇게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문학적으로나 시각적으로나 생생한 현실성을 갖추게 되었다.

 

문제는 아담과 이브 이야기가 이야기 이상의 권력을 갖춘 교리이자 역사적 사실의 위치에 놓이게 되면서남들을 배척하고 억압하는 수단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5세기에 아담과 이브 이야기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와 다른 견해를 주장했던 펠라기우스가 이단으로 공격받고 추방당한 것에서부터 배척의 역사는 시작되었다신의 명령을 어겨서 에덴으로 쫓겨난 데는 아담의 책임도 있는데도많은 남성들은 이브에게만 책임을 돌리며 여성들의 악덕이 이브에게서 시작되었다고 여성 혐오적인 편견을 드러냈다근대에 들어서도 아담과 이브 이야기의 허점을 지적하거나 허구라는 암시를 한 사람들은 자객의 습격을 받거나 화형당하기까지 했다한때 외세에게 점령당해 고통 받던 유대 민족에게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수단이 되어버렸다.

 

세상에 아담과 이브그들의 자식밖에 없었다면 맏아들 가인은 왜 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벌할까 두려워했을까가인이 고향을 떠나 결혼했다는 여자는 누구고가인이 만든 도시의 주민들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어떤 억압도 이런 의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성경에서 언급한 세상의 역사보다 훨씬 더 오래된 지층이 발견되고다윈의 진화론을 통해 인간이 단 한 번의 창조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면서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역사적 사건이라는 절대성을 잃게 되었다


이제 아무도 아담과 이브 이야기의 허점을 지적했다는 이유로 생명을 위협받지 않는다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아담과 이브 이야기가 오히려 이야기의 위치로 돌아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그리고 아담과 이브 이야기가 다시 이야기로 돌아왔다고 해서 그것이 가치를 잃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그 이야기는 여전히 인간의 연약함과 책임의 문제인간의 성과 노동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한 이야기가 어떤 절대적인 것으로 굳어버리는 것의 위험성을 깨닫게 된다그렇게 되면 그 이야기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까지 막혀 버리면서 이야기 자체의 생명력을 잃게 된다단순히 이야기의 매력과 생명력을 잃을 뿐만 아니라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억압하고 해치는 데 이용되기까지 한다이야기를 이야기 자체로 즐길 수 있는 것 자체도 많은 사람들이 탄압당하는 것을 무릅쓰고 의문을 제기해서 얻어낸 축복이다아담과 이브 이야기의 흥망성쇠는 우리에게 이야기의 힘과 위험성가능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한다.


P. S. 이 책의 모든 도판은 책 한가운데 몰려 있다도판이 있는 페이지는 텍스트만 있는 나머지 페이지와 재질이 다른데도판이 있는 페이지들만 도판을 찍어내는 데 최적화된 재질의 종이로 해서 비용을 절감하려던 게 아닌가 싶다하지만 텍스트가 설명하는 도판이 그 텍스트 바로 옆에 있었다면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책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이 점이 아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방관의 선택 - 생사의 순간,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법
사브리나 코헨-해턴 지음, 김희정 옮김 / 북하우스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방관의 선택은 영국의 현직 소방관이자 심리학자인 저자가 20년간의 현장 경험과 연구 결과를 토대로, 생사를 가르는 위급한 순간에 소방관들이 더 나은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책이다. 소방관들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저자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소방관보다는 나 자신을 위해 이 책을 읽었다. 어느 때보다도 삶이 위태롭게 느껴지는 지금, 올바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책이 필요했다. “이 방법은 어떤 분야에서든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이 책의 띠지에 적힌 문구처럼 내 삶, 내 분야에서도 저자의 방법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작은 힌트 하나라도 얻고 싶었다.


 한 터널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나 구조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런데 15분 후에 두 번째 폭발물이 터져 터널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죽거나 중상을 입을 것이라는 정보가 들어왔다. 터널 안에는 소방관 20명과 구급대원 6, 최소 30명의 구조 대상이 있다. 이 정보를 믿고 구조대원들을 철수시킬 것인가, 아직 터널 안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끝까지 구조하게 둘 것인가. 이건 가상의 시나리오지만, 소방관들은 언제라도 이렇게 어느 쪽도 쉽사리 택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일 수 있다.


 나는 지금 네가 아니어도 일할 사람은 많다. 나는 언제든 네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할 수 있다고 끊임없이 경고하는 사람, 자신의 뜻에 조금만 어긋나도 소리를 지르고 윽박지르면서 내가 창조적인 의견을 내지 못하게 하는 사람과 일하고 있다. 내가 이 일을 이렇게 처리하면 비난을 받지 않을까, 이렇게 말하면 불손하고 불성실한 사람으로 낙인찍혀 해고당하지 않을까, 자꾸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 앞에서 이야기한 소방관의 의사결정에 비하면 내 의사결정은 아주 가벼운 문제다. 그러나 나와 내 가족의 생계가 달렸다는 점에서 내게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버거운 문제다.


 저자가 소방관들에게 제시한 방법은 결정 제어 프로세스. 사람들은 소방대 지휘관이 보고받은 정보들을 치밀하게 분석한 뒤 의사결정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연구를 통해 소방대 지휘관들이 내리는 결정의 80퍼센트가 직관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빠른 대응이 필요한 상황에서 분석적인 결정을 내리면 시간을 낭비하게 되지만, 직관적인 결정을 하다 보면 큰 그림을 보지 못할 수 있다. ‘결정 제어 프로세스는 결정을 내릴 때마다 이 결정으로 내가 달성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결정으로 어떤 결과를 얻을 것이라 예측하는가?’, ‘이 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이 일로 초래될 수 있는 위험을 얼마나 능가하는가라는 질문을 머릿속에서 재빨리 검토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의사결정의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서 상황을 더 분석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내 분야의 업무를 할 때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여기에 내게는 더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팁 하나 더. 우려를 내려놓고 행동하되, 큰 그림을 생각할 것. 잘못될 수 있는 모든 요인들을 걱정하다 보면 결정을 내리는 능력이 마비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결정을 아예 내리지 않거나 다른 사람에게 결정을 떠넘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막연한 걱정으로 아무것도 못하고 있기보다는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생각이 너무 많고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추정하는 경향이 있는 내게 특히 유용한 팁이다.


 일이 잘못될 수 있다는 걱정은 스트레스를 불러오는데, 저자는 스트레스가 올바른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 악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생명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소방관들에 견주는 것 자체가 죄송한 일이지만, 나 또한 나 자신을 계속 의심하고 검열하게 만드는 곳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저자가 스트레스를 이기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우리 삶을 정말 행복하게 하는 세 가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그 부분을 읽자마자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을 적어보았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나쁜 것을 잊어버리게 할 만큼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다. 내가 과도하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느껴질 때마다 이 방법을 사용해야겠다.


 이렇게 내게 필요한 팁들을 얻는 것에 더 정신이 쏠린 것이 저자를 비롯한 소방관분들에게 죄송스럽다. 소방관들이 몸과 마음을 다치거나 심지어 죽는 것도 각오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구할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더 나은 방법들을 찾아내고 익히는 데 온 정성을 기울인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심지어 이 글에서도 마지막에 짧게만 언급해 버렸다. 위급한 상황에서 내가 그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길, 내 분야의 일이나 사소한 친절로라도 그분들에게 보탬이 되길 바란다. 그렇게 해서 이 책을 써서 삶의 지혜를 알려주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고 있는 저자와 그녀의 수많은 동료들에게 조금이라도 보답이 되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화어 수업 - 다음 세대를 위한 요즘 북한 말, 북한 삶 안내서
한성우.설송아 지음 / 어크로스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고등학교대학교에서 공부했던 영어 교재나 제2외국어 교재는 주요 인물을 설정하고 그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그 대화에서 사용된 단어와 표현들을 익히는 형식이었다문화어 수업은 수업이라는 제목에 맞게 이런 외국어 교재와 비슷한 형식을 하고 있다평양에 1년 동안 체류하게 된 남한의 방언학자 한겸재와 그의 가족(저자 자신과 가족들을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인다.)들이 북한의 미대 교수 리청지’ 가족과 함께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더 자세히 보면 식사 시간’, ‘교통수단’, ‘학습 용어’, ‘두음법칙’ 등 20개의 주제에 대한 단어와 표현그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다외국어 교재처럼 대화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고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문화어에 대한 설명이 녹아 있는 모습이다.

 

이 책의 저자인 방언학자 한성우 교수의 전작 우리 음식의 언어노래의 언어를 재미있게 읽었는데앞의 책은 우리 음식과 관련된 우리말을뒤의 책은 우리 대중가요 가사 속 우리말을 탐구해 보는 책이었다이 책들에서 한성우 교수는 우리말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풀어나갔는데문화어 수업에서도 특유의 이야기 솜씨를 발휘한다앞의 책들과 달리 각자의 개성을 가진 인물들이 서로 대화하고 같이 뭔가를 하며 이야기들을 만들어가니 더 흥미롭다공저자인 북한 출신 설송아 기자는 상자 글에서 본문을 읽는 데 참고할 만한 지식을 전하고 있다북한 사람들의 언어 습관뿐만 아니라 밥상 구성주택 상황교육 제도 등 북한의 현재 상황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문화어가 남한의 언어와북한 사람들이 우리와 그렇게 많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제의 각을 뜨자’ 같은 과격한 북녘 언어는 구호나 뉴스에서나 쓰이지 일상생활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다북한 사람과 남한 사람이 대화를 하면 대부분은 서로 이해할 수 있으며가끔 귀에 걸리는 낯선 어휘들도 맥락을 살피면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다북한 사람들은 남한에서 들어온 옷가지들을 장마당에서 사 입고젊은이들은 몰래 남한 아이돌의 노래를 듣는다심지어 남한 젊은이들처럼 남자친구를 오빠라고 부르는 젊은이들도 있다.

 

그래서 저자는 20강 내내 줄기차게 이야기한다남과 북은 다른 점보다 같은 점이 많고다른 점마저 온전히 이해해야 한다고한겸재 교수의 딸 슬기와 리청지 교수의 딸 예리는 서로가 사용하는 단어나 맞춤법이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웃거린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가 사용하는 단어의 뜻을 맞춰보는 놀이를 할 정도로 편안하게 서로의 언어를 받아들인다한겸재 교수는 이런 아이들의 모습에서 우리 언어의 미래를 본다통일이 된 이후 무조건 한쪽을 기준으로 삼아서 거기에 모든 것을 끼워맞출 수는 없으니우리도 북한의 어문 규정을 어느 정도 수용해야 할 것이다맞춤법을 잘 알아야 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새로운 어문 규정을 다시 배우는 게 번거롭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하지만 내가 불편하다고 다른 사람에게 내 것에 맞추라고 강요할 권리는 내게 없다한겸재 교수(의 입을 빌린 한성우 교수)의 말처럼 남한 사람들과 북한 사람들이 언어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살아남는 말들사람들이 언어생활을 편안하게 할 수 있게 하는 규칙들을 잘 활용하면 될 일이다.

 

이 책은 왜 남한에서는 두음법칙을 쓰고 북한에서는 쓰지 않는지, 남한과 북한에서 한글 자음, 모음을 부르는 명칭이 왜 다른지, 남한의 이 단어가 북한에서는 어떤 다른 뜻으로 사용되는지 같은 남북 언어에 대한 다양하고 흥미로운 지식들을 전달한다. 하지만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태도임을 책 전체에 걸쳐 강조한다. “남북의 말 차이를 가장 크게 보여주는 사례가 뭔가요?” 북한말 중 재미있는 사례 몇 개만 들어주시겠어요?”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런 질문이 사라지게 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라고 저자는 맺음말에서 이야기한다. 저자의 바람처럼 남북 사람들이 서로의 언어를 우스꽝스러운 흥밋거리로 여기기보다는, 같은 점을 바탕으로 서로의 다른 점들을 수용하고 조화시켜 갔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디어 개츠비 웬일이니! 피츠제럴드 X시리즈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맥스웰 퍼킨스 지음, 오현아 옮김 / 마음산책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친애하는 H군 


코로나 때문에 요새 도서관엔 못 가고 있어. 대신 사 놓기만 하고 읽지 않았던 책이 여덟 권이나 돼서, 두 달 정도는 이걸로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얼마 전 피츠제럴드의 여정을 따라가는 책을 읽고 났더니 피츠제럴드와 담당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가 나눈 편지를 모은 서간집도 읽고 싶어졌어. 작가와 편집자가 나눈 이야기니 이제 막 편집자가 된 나로서 더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래서 사 놓은 지 몇 달 만에 이 책을 읽게 됐지. 


그런데 의외의 진입 장벽이 나를 가로막았어. 바로 돈 이야기. 피츠제럴드는 한때 작가로서의 명성과 부를 누렸지만, 사치스러운 생활과 아내의 병 때문에 자신이 번 돈을 탕진하고 평생 빚에 허덕여야 했어. "편집자님, 돈 좀 빌려 주세요.", "편집자님, 돈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책 전체에 걸쳐서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피츠제럴드가 아무리 재치 있는 문장으로 이야기해도 돈 빌려달라는 얘기는 유쾌하지 않아. 텍스트로만 보는 나도 짜증이 나는데 퍼킨스는 한 번도 짜증내거나 꾸짖지 않고 돈을 빌려주더라. 그걸 보면서 편집자의 중요한 자질 중 하나는 인내심이 아닐까 싶었어.  


그래서 도통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었는데, 결국에는 나도 퍼킨스처럼 피츠제럴드의 돈타령에 익숙해지더라. 내가 지금 출판사에서 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고민을 이 사람들도 하고 있으니 공감도 됐고. 표지는 어떤 색으로 하고 어떤 그림, 어떤 홍보 문구를 넣을 것인지. 어떤 단편을 싣고 어떤 단편을 싣지 않을 것인지. 어떤 장면을 살리고 어떤 장면을 버려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일지. 책의 제목은 무엇으로 할 것인지. 피츠제럴드는 이 표지 그림은 등장인물을 정말 정확히 표현했다, 이 홍보 문구는 너무 식상해 보인다, 이 제목보다는 저 제목이 좋겠다, 이 장면은 작품의 주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에 절대 삭제할 수 없다는 식으로 자기 작품에 대해 퍼킨스와 함께 고민해 왔어. 서로 의견이 충돌할 때도 있지만 둘은 서로의 의견을 존중해. 피츠제럴드는 퍼킨스의 글 보는 눈과 작품에 대한 통찰력을 신뢰하고, 퍼킨스는 작가의 소신을 자신이 꺾는 일이 없도록 하려고 노력해. 편집자로서 이렇게 함께 좋은 책을 만들어갈 수 있는 작가를 만나고 싶어. 


그런데 이들이 이야기하는 작품 중 내가 읽어 본 거라곤 '위대한 개츠비'와 '벤자민 버튼'밖에 없으니,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어. 아무래도 내가 읽어 봤기에 잘 알고 있는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부분에서 집중도가 높았지. 이들이 '위대한 개츠비'를 놓고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있었고.(특히 '위대한 개츠비'의 제목을 둘러싼 둘의 의견 차이가 흥미로웠어. 피츠제럴드가 제안한 제목('트리말키오', '웨스트에그로 가는 길', '높이 뛰어오르는 연인' 등등)들은 정말 무슨 책인지 감도 안 오고 어려운데, 퍼킨스가 제안한 '위대한 개츠비'는 지금까지도 '개츠비가 정말 위대한가, 정말 위대한 거면 왜 위대한 건가'를 놓고 독자들이 끊임없이 토론하게 만들었거든.) 내가 영문학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지만, 피츠제럴드와 퍼킨스가 이야기했던 피츠제럴드와 당시의 다른 미국 작가들의 작품을 직접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특히 피츠제럴드의 단편들. 피츠제럴드는 단편보다 장편이 가치 있다고 느끼고 단편을 생계 수단으로 생각하긴 했지만, 장편과는 다른 독특한 매력이 있을 것 같아. 그리고 헤밍웨이의 에세이집 '호주머니 속의 축제'도 읽어볼 생각이야. 인터넷 서점에서 미리보기로 몇 페이지 읽었다 반해서 사 뒀거든.)


작품을 읽지 않았어도, 둘의 편지에서 서로와 동료 작가들에 대한 감정이 엿보여서 흥미로웠어. 출판사에 불만이 있을 때 퍼킨스에게 툴툴거리긴 했어도 피츠제럴드는 자신과 헤밍웨이, 토머스 울프를 퍼킨스의 '아들들'이라고 할 정도로 퍼킨스를 믿고 따랐어. 다혈질이고 욱하는 성격의 헤밍웨이와 자기중심적이고 제멋대로인 토머스 울프에 대한 마음의 앙금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래도 둘의 문학적 재능을 인정하고 아끼는 피츠제럴드의 마음이 느껴지더라. 퍼킨스는 그들 중간에 서서 그들 모두를 존중하면서 그들에게 굳건한 버팀목이 되어주었고. 내가 볼 수 있는 건 편지 속 그들 인생의 단편들이지만, 그 단편들을 가지고 그들의 삶과 관계를 엿볼 수 있는 게 흥미로웠어.


나는 앞으로 어떤 작가들을 만나고 어떤 글들을 만나게 될까? 이렇게 좋은 작가들을 만나고 그들과 좋은 관계를 이어가기는 쉽지 않겠지. 그들이 살고 있던 당시의 미국 출판계와 내가 몸 담고 있는 한국 출판계는 정말 많이 다를 거고. 환상을 가지지는 않으려고 해. 그래도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이렇게 치열하게 함께 고민해 온 사람들이 있었고, 나도 함께 좋은 책을 만들어갈 작가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소망해. 좋은 편집자가 될게. 너도 좋은 작가가 되어줘.언젠가 좋은 편집자와 좋은 작가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너의 친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