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소설의 시대 1 백탑파 시리즈 5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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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끔 소설을 쓰곤 한다. 내가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일기 대신 소설의 형식으로 쓴다. 일기도 매일 쓰긴 하지만, 일기를 쓸 때보다 좀 더 거리를 두고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나와 그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만들어가는 것이 흥미롭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큰 흐름도 잡아놓지 않고, 가끔씩 소설이 쓰고 싶어질 때마다 마음 가는 대로 몇 문단씩 써 놓는다. 나 자신을 제외한 어느 누구에게도 읽힐 만한 소설은 못 되지만 소설을 쓰는 행위에서도, 써 놓은 소설에서도 위안을 얻는다.


김탁환 작가의 『대소설의 시대』를 읽으면서, 18세기 조선에도 나처럼 소설을 읽고 쓰는 것을 즐겼던 여성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근 전체 180권이나 되는 『완월회맹연』등의 대소설이 여성들의 손으로 쓰여진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고, 김탁환 작가는 그 연구 결과를 토대로 『대소설의 시대』를 썼다고 한다. 조선 후기 여성들이 한글 소설을 즐겨 읽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소설을 직접 창작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것도 100권이 넘는 길고 긴 소설이라니. 조선 후기 여성 작가들이 이런 대작을 쓸 수 있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김탁환 작가는 지금까지 나온 연구 결과에 상상을 섞어 ‘임두’라는 필명의 조선 후기 여성 작가를 만들어냈다. 임두는 23년 동안 199권에 이르는 소설 『산해인연록』을 써 왔다. 그녀가 23년 동안 소설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소설을 좋아했던 혜경궁 홍씨와 의빈 성씨가 그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후원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그녀의 소설을 독자들이 읽기 쉽도록 깔끔하게 필사해 주는 궁녀들의 도움이 있었다. 이렇게 대소설을 만드는 여자 뒤에는 소설을 사랑하는 여자들의 연대가 있었다.


그녀들 이전에는 임두가 처음 작가로서 발을 내딛게 해준 여자들의 연대가 있었다. 시부모는 스물네 살의 임두에게 오랜만에 친정에 온 시누이를 위해 소설들을 필사하라고 했다. 임두는 단순히 필사만 한 게 아니라 자신이 보기에 필요 없는 내용을 빼고 내용을 더 지어서 넣었다, 시어머니는 임두가 더 넣거나 뺀 내용을 보고 임두의 글 쓰는 재능을 알아보았다. 그 이후로 임두는 시댁 여인들의 소설 쓰기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고, 소설을 쓰는 즐거움에서 평생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임두 같은 대작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소설을 놓았다 하더라도, 그녀들이 있었기에 임두는 작가가 될 수 있었다. 소설에 자신들이 겪는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고통을 담았던 그녀들에 대한 기억이 임두가 대소설을 수십 년 동안 계속해서 쓸 수 있게 했던 원동력이 되었다.


그녀들과 임두가 그토록 소설을 사랑했던 것은, 그 시절 그녀들이 꿈을 꾸고 욕망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소설뿐이었기 때문이다. 작은 조선의 한 집안 안에 갇혀 지내지만 그녀들은 소설 속에서 광활한 대륙과 천상의 세계, 지하의 세계를 넘나들면서 수백 명의 인물들이 그 안에서 살아 숨 쉬게 만든다. 단지 이야기일 뿐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이야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때로는 살아갈 힘을 준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에게도, 그 이야기를 읽거나 들으며 즐기는 사람들에게도.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꿈을 꾸고 욕망하고 그것을 펼쳐낼 방법이 많아진 시대를 살고 있지만, 나는 수백 년의 그녀들에게 깊이 공감한다. 내게는 그녀들이 겪었던 것과는 또 다른 현실과 제약들이 있고, 그런 답답한 현실에서 내가 버틸 수 있게 하고, 꿈꿀 수 있게 하는 건 이야기들을 읽고 쓰는 것이다. 대소설의 시대는 이야기를 만드는 여자들의 시대였고, 그 시대는 끝나지 않고 내 안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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