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로셀라 포스토리노 지음, 김지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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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겁이 많아 독립운동은 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친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지금처럼 조용히 내 할 일을 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총독부에서 나에게 매 끼니마다 총독의 음식을 시식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 않겠다고 하면 나뿐만 아니라 내 가족들까지 다 죽는다. 나는 총독부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었을까?


  강제로 히틀러가 먹는 음식을 시식하게 된 사람이 있었다. 마르고트 뵐크라는 독일인 여성으로, 남편이 2차 세계대전에 징집되고 나서 독일 동부에 있는 시댁에서 지내고 있었다. 시댁 근처에는 히틀러의 동부 전선(독일이 동유럽 지역에서 연합군과 싸운 전역) 지휘 본부가 있었다. 1943년 나치 친위대는 마르고트를 비롯한 10여 명의 젊은 여성들을 히틀러의 시식가로 뽑아, 히틀러가 지휘 본부에 머무르는 동안 매 끼니마다 독이 있는지 없는지 먼저 맛보게 했다. 이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이다. 


  실제 이야기를 먼저 찾아보면 소설의 주요 내용을 다 알게 될 정도로 이 책은 실화에 충실하다. 이탈리아인 작가가 독일인 화자를 내세워 독일을 배경으로 쓴 소설이지만, 화자가 살았던 베를린과 독일 동부 지역의 자연, 풍습, 생활상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독일인 독자가 보기에는 고증이 맞지 않다 싶은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독일인 독자가 아닌 나로서는 거슬리는 부분이 없었다. 작가가 1978년생이니 전후 세대인데도 전쟁으로 인해 남루해지고 피폐해진 일상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덕분에 2차 세계대전 말이라는 불안한 시기의 독일에 와 있는 듯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


  작가는 실제 인물인 마르고트 뵐크를 직접 만나보지 못했지만, 그녀가 겪었을 복잡한 심리를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매 끼니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겪지만, 몇 년째 버터와 설탕을 구경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좋은 재료를 쓰고 솜씨 좋은 요리사가 만든 음식은 군침이 돌게 만든다. 친위대에서는 독살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끼니마다 여러 가지 메뉴를 짜고 시식가들에게 두 명씩 짝을 지어서 한 메뉴씩 먹게 하니, 자신과 같은 메뉴를 먹는 동료에게 운명을 함께한다는 동지 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다. 히틀러의 목숨을 부지하는 데 한 역할을 하면서 나치 장교와 사랑에 빠지기까지 했다는 점에서 죄의식을 느끼지만, 그러면서도 그 장교와의 관계는 끊지 못하고 그 관계 덕분에 얻는 이익은 다 누리고 있다. 마르고트 뵐크를 모델로 한 주인공 로자는 이렇게 피해자이면서 부역자라는 모순을 안고 있는 복합적인 캐릭터이다. 


  로자의 죄의식은 상상 속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뚜렷이 나타난다. 이미 돌아가셨지만 생전에 나치를 반대했던 아버지는, 상상 속에서도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는 로자를 호되게 꾸짖는다. 


“정치와는 상관없어요. 저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요. 게다가 1933년에는 저는 고작 열여섯 살이었어요. 히틀러를 뽑은 건 제가 아니라고요.” 그러면 아버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일단 용인하면 그 정권에 대한 책임은 네게도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각자가 속한 국가 체제 덕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은둔자조차 말이다. 알아들었니? 네게는 정치적 죄악에 대해 면죄부가 없다, 로자.”


  로자가 매일 죽음의 위험을 직면하면서 산다고 해도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어 학살당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그녀는 나치에 부역해서 매일 호의호식하고 있는 부역자다. 게다가 자신의 남편이 죽은 줄 알았다고 할지라도 나치 장교에게 처자식이 있는 걸 알면서도 그와 관계를 이어간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게다가 그 덕분에 유용한 정보를 얻었으면서도, 그와의 관계가 탄로 날까 봐 친정 부모처럼 자신을 돌봐줬던 시부모에게도 자매처럼 지내 왔던 동료들에게도 그 정보를 알리지 않고 혼자 살아남았다. 이러한 로자의 잘못들은 작품 속에서 정당화되지 않는다. 작가는 상상 속 아버지의 말, 즉 로자 자신의 죄의식을 통해 로자, 즉 평범한 사람들이 악을 뒷받침했던 것에 면죄부가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하지만 작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악에 동참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더 큰 악을 잊지 않는다. 히틀러와 나치가 아니었다면 로자를 비롯한 동료들은 히틀러의 목숨을 부지하는 데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로자는 남편과 헤어지지 않고 그렇게 바라던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갔을 것이고, 다른 동료들도 자신이 바라는 대로 살아갔을 것이다. 이들이 실험용 모르모트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들이 어느 날 식사를 하고 모두 쓰러지는 대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나치 친위대는 시식가들을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면서 이들에게서 어떤 증상이 나타났는지 지켜보기만 한다. 다행히 상한 음식 때문에 일어난 식중독이어서 아무도 죽지 않았지만, 실제로 독이 들어 있었던 거라면 주인공을 비롯한 시식가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악에 동참하면서 죽음의 위험을 직면할지, 악을 거부하고 그 대가로 죽임 당할지 선택하게 하고, 악에 동참해서 죽게 되더라도 내버려두는 거대한 악.

 

  작가는 이 거대한 악의 손아귀 안에서도 서로 연대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리지만, 그 연대와 사랑이 모두를 구원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로자는 동료들과의 연대와 우정 덕분에 하루하루를 버텼지만, 로자를 제외한 모든 동료들은 목숨을 잃는다. 독일이 패전하고 소련군이 오고 있다는 소설 속 서술이나 실화에서 동료들이 맞은 운명을 생각해 보면, 동료들은 나치 부역자라는 이유로 소련군에게 처형당했을 것이다. 로자를 나치 친위대에게서 숨겨주지는 못했지만 따뜻한 가족이 되어주었던 시부모님도 전쟁 중에 돌아가셨을 것이고, 귀족이면서도 허물없이 로자를 친구로 대했던 마리아 남작부인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로자 본인은 살아남았고 남편을 다시 만났지만, 시식가로 살아가면서 남은 상처와 죄의식 때문에 남편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헤어진다. 이들의 삶이 망가진 것은 전쟁과 그 전쟁을 일으킨 인간들 때문이었다. 이 모든 일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어야 했다. 


  이런 거대한 악이 생기지 못하도록 평범한 사람들이 깨어 있어 힘을 모으는 것이 우선일까, 평범한 사람들이 악을 행하도록 강요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 우선일까. 둘 중 하나라도 제대로 실행되지 않으면 악은 평범한 사람들이 뒷받침해 지속되고 더 강해지면서 계속 악을 강요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악을 행하도록 강요당하다가 악에 무감각해져 악을 지속시킨다.『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은 이런 악순환이 평범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얼마나 뒤흔들고 망가뜨리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사랑과 연대로도 이렇게 망가진 삶을 완전히 회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이 악순환을 막는 것 자체가 최선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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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의학자 - 의학의 눈으로 명화를 해부하다 미술관에 간 지식인
박광혁 지음 / 어바웃어북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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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다른 두 분야를 접목한 책을 읽을 때 우려되는 것이 있다두 분야의 균형과 전문성이다두 분야의 전문가가 함께 만든 책이라면 두 분야가 균형을 이룰 수 있고 각 분야의 전문성도 갖출 수 있다하지만 한 분야의 전문가가 자신의 분야와 다른 분야를 접목해서 책을 쓰면다른 분야는 그냥 곁들이는 수준이 되거나 다른 분야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할 위험이 크다현직 의사가 자신의 전문 분야인 의학과 미술사를 접목한 책미술관에 간 의학자를 읽으려 할 때도 이런 우려가 들었었다.


  다행히 미술사와 의학의 비중은 적절하게 배분되어 있다페스트디프테리아수면장애도박 중독 같은 의학적 주제를 미술 작품과 엮어서 설명하는데하나하나가 그 주제에 대한 처방전과 같은 느낌이다의학에 있어서는 전문 지식을 일반 독자들도 이해하기 쉽도록 친절하게 설명하고미술사에 있어서는 교양 수준의 배경지식을 충실하게 전달한다미술 작품을 그저 의학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삽화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삶과 이력그 그림이 그려지게 된 시대적 배경기법의 특징그 당시의 미술 사조까지 미술 작품 자체에 대한 이야기도 풍성하게 담고 있다.


피터르 브뤼헐, <맹인을 이끄는 맹인>, 1568. 저자는 이 그림 속 시각장애인들을 관찰해 누가 어떤 병으로 인해 시력을 잃었는지 분석한다.


  단순히 배경지식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의 눈으로 그림을 분석하고 있어 흥미롭다저자는 16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피터르 브뤼헐이 그린 <맹인을 이끄는 맹인속에서 묘사된 시각장애인들의 모습을 관찰하고그들이 각각 어떤 병으로 시각을 잃었는지 분석해낸다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 <디프테리아>에는 호흡 곤란을 겪는 아이를 돕기 위해 손가락으로 아이의 목구멍을 벌리려고 하는 남자가 그려져 있다이렇게 하면 목구멍의 기도 점막을 자극해 림프가 더욱 부어올라서 아이는 숨을 더 쉬기 힘들어질 수 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그림이 그려진 19세기 초의 의료 기술을 생각해 보면 그림 속 아이는 죽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의학을 잘 알지 못하는 독자들에게는 이런 의학적 해석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1889. 압생트 중독으로 인한 황시증으로 별 주위의 노란 별무리가 보였을 것이라는 통설이 있지만, 저자는 최근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그 통설을 반박한다. 


  인문 교양서 중에는 그저 대중 독자들이 흔히 알고 있는 통설만 정리하는 경우가 많은데그런 통설에만 기대지 않는 것도 장점이다. <별이 빛나는 밤>을 비롯한 반 고흐의 작품들에는 노란색별 주위에서 소용돌이치는 빛무리가 많이 나타나는데반 고흐가 즐겨 마셨던 술 압생트 때문에 사물이 노랗게 보이는 황시증을 겪었기 때문이라는 통설이 있다하지만 별 주위에서 빛무리가 보일 정도가 되려면 182리터 이상의 압생트를 한꺼번에 마셔야 한다는 1997년의 연구 결과를 이야기하면서그가 복용하던 간질약의 부작용일 수 있다는 설을 제기한다스탕달에게 스탕달 신드롬(미술 작품과 교감한 관람객이 흥분과 자아 상실을 경험하는 현상)’을 일으킨 작품이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클레오파트라가 독사가 자기 가슴을 물게 해 자살했다는 것도 동양에 대한 서양의 환상이 반영된 가설일 뿐이다라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이런 미술 작품과 의학에 관한 다양한 지식들을 경어체로 서술하고 있어 더욱 더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친절한 의사 선생님이 그림을 보며주면서 그림과 관련된 병이 어떤 것인지그 병은 어떻게 예방하면 되는지병에 걸렸다면 어떻게 치료하고 몸 관리를 하면 되는지 처방하는 것 같다그래서 독자들은 더욱 친근감을 느끼고 이야기를 듣듯 편안하게 책을 읽어나갈 수 있다.

 

  다만 고유명사 표기가 정확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프랑스인이기 때문에 귀스타브Gustave’로 표기해야 하는 이름을 자꾸 독일식 표기인 구스타프로 표기하고 알렉상드르Alexandre’를 알렉상드로로 표기하며 마네트 살로몽의 원어 표기를 ‘Manette Salomon’으로 제대로 적어놓고도 계속 마네트 랄르몽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는 스페인인인데 영어식으로 프랜시스 고야라고 표기한다동성애자라고 분명히 밝혀진 사람은 20세기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인데 17세기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을 동성애자라고 적어 놓는 오류도 보인다모차르트의 사인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고 여러 가지 가설이 있는데모차르트가 매독 치료를 위해 수은을 치료제로 사용하다 수은 중독으로 사망했다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아쉬운 점들이 있지만 즐겁게 읽고 나서 머릿속에 남는 것도 많은 인문 교양서이다미술 작품에서도 의학적인 사실들의학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흥미롭고 미술사 지식과 의학 지식들을 함께 쌓아가는 것이 즐겁다미술관과 병원의 행복한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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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의 세계사 - 인류 첫 거래부터 무역 전쟁까지, 찬란한 거래의 역사
윌리엄 번스타인 지음, 박홍경 옮김 / 라이팅하우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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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백수십여 년 전에 쇄국정책이 시행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세계의 다양한 나라들과 활발히 교역하고 있다. 무역을 활발히 하는 정도가 아니라 무역 없이는 살 수 없는 정도다. 자동차들은 석유가 없으면 굴러가지 않고, 중국산 생활용품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빠듯한 살림을 꾸려나가는 데는 값싼 외국 먹거리들을 사는 게 유리하니까. 우리만 외국의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먼 외국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한국산 전자제품이나 자동차를 사용하는 모습이 종종 보이기도 한다. 전 세계는 어떻게 이토록 가까워졌을까. 『무역의 세계사』의 저자 윌리엄 번스타인은 물건을 운반해 와서 다른 물건과 교환하는 인간의 본능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책의 머리말에서 저자는 타인과 물건을 교환하려는 인류 행동의 기원이 1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문자가 생기기도 전부터 인류는 자기 지역의 물건을 다른 지역으로 가져가서 그곳의 물건과 교환해, 자신에게 필요하지만 자신에게는 없는 물건을 얻어 왔다. 저자는 무역은 인간의 거부할 수 없는 본능이고, 무역을 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인간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다. 무역만큼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는 것은 없기에, 저자는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무역이라는 주제로 세계사를 살펴보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보통 한 가지 주제로 역사 전체를 보는 책은 미시사의 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이 책은 거시사와 미시사와 성격을 모두 지니고 있다. 무역이라는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하고 무역이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살펴본다는 점에서는 미시사지만, 무역의 주도권을 잡는 자가 세계의 주도권을 잡아 왔다는 것을 감안하면 무역의 역사는 세계사의 큰 흐름을 살펴보는 거시사가 될 수밖에 없다. 미시사는 역사의 큰 흐름으로 정리되지 않고 잡다한 이야기들의 모음으로 그칠 수 있고, 거시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역사를 움직여 온 작은 요인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나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세계 역사의 큰 흐름에 따라 무역이 사람들과 세계를 변화시켜 온 모습들을 엮어나가면서 거시사로서도 미시사로서도 제 역할을 다해낸다.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수천 년의 시간과 고대 중동 지역부터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까지 전 세계, 역사학, 경제학, 생물학, 지리학 등 다양한 분야를 ‘무역‘이라는 주제 하나로 아우르는 저자의 역량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스인들이 곡물이 풍부한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는 데 열심이었던 이유를 알려면 그리스의 척박한 풍토를 알아야 하고, 무역풍이 어떻게 무역선의 항해에 도움이 되기도 장애가 되기도 했는지 알려면 코리올리의 원리를 알아야 한다. 워낙 많은 시대와 지역, 인물, 사건이 등장하는 데다 역사 외의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의 배경 지식까지 겹쳐 따라잡기 벅차다고 느껴질 정도다.(본문에 있는 지도들만으로는 모자라 고등학생 때 쓰던 사회과부도, 역사부도 교과서, 구글 지도까지 동원하면서 읽었다.)


이 모든 것은 저자가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세계 무역의 역사는 자유무역을 향해 진행되어 왔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저자의 의도는 근대의 무역사를 다루는 부분부터 뚜렷이 보인다. 산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한 근대 이후, 많은 나라들은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높은 관세 등의 수단을 동원해 보호무역을 진행해 왔다. 그러나 자유무역주의자들과 보호무역주의자들 사이의 치열한 논쟁과 여러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세계의 많은 나라들은 자유무역이 주는 이점을 인정하게 되었다. 1947년 23개국이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에 서명한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수만 건, 수천억 달러 규모의 관세 인하가 이루어지며 역사는 자유무역을 향해 흐름을 돌리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자유무역을 해야 할까? 자유무역은 인류에게 전반적으로 이익을 안겨줘 왔기 때문이다. 관세와 운송비 부담이 사라지면서 전 세계에서 화물은 보다 자유롭게 운반되었고, 소비자들은 다양한 나라의 물품들을 저렴한 가격에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 선진국들은 더욱 부유해졌고, 외국에 개방적인 개발도상국들은 폐쇄적인 개발도상국들보다 높은 성장률을 보이며 선진국과의 격차를 빠르게 좁히게 되었다.


자유무역이 불러오는 이익은 경제적 이익뿐만이 아니다. 19세기 영국의 경제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상업의 경제적 이득보다 중요한 것은 상업을 통해 유발되는 지성적, 도덕적 효과라고 말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자신의 조국 말고 다른 나라들이 잘 되지 않길 바랐지만, 상업이 발달한 현재에는 다른 나라의 부와 진보가 자기 나라에 부와 진보를 가져올 원천이 될 수 있기에 상대방의 부와 번영을 선의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밀의 말대로 무역이 인류의 폭력적 성향을 줄이고 인류의 평화를 불러오고 있다고 보고 있다. 21세기 초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1950년대에 비해 30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이웃을 죽이는 것보다는, 서로의 경제적 필요를 인식하고 그 필요를 서로 채워주며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이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자유무역이 불러오는 폐해도 간과하지 않는다. 자유무역으로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으며 그들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분명히 말한다. 그러나 복지 정책이나 지원 정책이 자유무역의 피해자들을 모두 구제하거나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지나치게 낙관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에 한계와 문제가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우리에게 최선의 방안인 것처럼 자유무역 또한 우리에게 최선의 방안이라고 저자는 보고 있다. 그는 “수메르에서 시애틀까지 우리는 자유무역을 향해 나아왔고, 그 흐름을 되돌리는 것은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지금 우리는 강대국들의 무역 전쟁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내부로 눈을 돌리면 외국 농산물 때문에 우리 농업이 위태롭다고 호소하는 우리 농민들을 보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세계 무역의 큰 흐름에서 살아남고 이익을 얻을 수 있을까? 이 책의 원서는 2008년에 출간되어 있기 때문에 선사시대부터 2008년까지 세계 무역의 흐름이 정리되어 있다. 이 책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2008년 이후, 지금의 세계 무역의 흐름에 대해 스스로 공부하고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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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페르시아어 수업
마리암 마지디 지음, 김도연.이선화 옮김 / 달콤한책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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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서울과 인천에서 보냈고, 평생 동안 표준 한국어로 말하고 쓰면서 살아왔다. 두 개의 언어를 병행해서 써야 했을 때는 해외여행을 갔을 때뿐이었고, 그 여행에서도 대부분의 시간은 일행과 한국어로 이야기하면서 보냈다. 그러니 혼혈이라든가, 이민을 갔다든가 해서 두 언어, 두 나라, 두 문화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사람들의 마음은 책이나 방송을 통해 간접 경험할 수밖에 없다.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은 두 개의 언어와 문화 사이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게 해주는 책이다. 


 이 책은 이란계 작가가 이란과 프랑스, 페르시아어와 프랑스어 사이에서 혼란을 겪다 모국어인 페르시아어를 버리지만, 성장해서는 자신의 뿌리인 페르시아어, 이란과 화해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기승전결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기보다는,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과 상념들을 털어놓고 있기 때문에 소설이라기보다는 환상적인 요소들이 섞인 에세이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찾아간다는 큰 이야기 줄기 아래 있지만, 이란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프랑스에서 보낸 소녀 시절, 성인이 되어 이란에 돌아왔을 때의 이야기가 시간의 순서와는 상관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더욱 혼란스럽다. 게다가 시와 산문, 현실과 환상, 비유와 상징이 뒤섞여 있어,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인 모국어 찾기 이야기를 기대했던 사람들로서는 당황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머릿속을 들여다 본다고 생각하고 그 안의 상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작가의 부모님이 어린 딸(작가)을 데리고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정치적 억압이었다. 1979년 부패한 팔레비 왕조를 몰아낸 이슬람 근본주의 정권은 서슬 퍼런 독재 정치를 펼치기 시작했다. 작가의 어머니는 임신한 몸으로 대학교 학우들과 시위를 하다 학생들이 경찰들에게 무참하게 살해되는 것을 목격하고, 자신도 경찰에게 쫓기다 3층에서 뛰어내려 유산할 뻔했다. 작가의 생일날마다 꽃을 선물하던 다정한 외삼촌은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전단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로 8년 동안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어야 했다. 이런 정치적 억압은 우리에게도 낯선 것이 아니다. 


 고국을 떠나 망명한 프랑스도 작가 가족에게 마냥 따뜻한 곳은 아니었다. 같이 놀아주지 않는 학교 아이들에게 말도 못 붙이고 외로워하던 작가는 프랑스에 적응하기 위해 모국어인 페르시아어를 버린다. 부모님이 집에서는 페르시아어를 쓰라고 해서 여전히 페르시아어로 말할 수는 있지만, 페르시아어보다는 프랑스어로 읽고 쓰는 것이 더 편해져 버렸다. 그렇게 수십 년 동안 프랑스어를 사용하면서, 처음에는 낯설기만 했던 크루아상이 고향 음식으로 느껴질 정도로 프랑스가 또 하나의 고국이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민자라는 이유로 작가가 '진짜' 프랑스인이 아니라고 한다. 두 개의 언어와 문화를 누릴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는 이야기는, 평생 두 언어, 두 문화 사이에서 헤매면서 살아온 작가에게 속 편한 소리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다시 이란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21세기가 되어서도 종교 경찰들이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게 옷을 입었는지, 정숙하지 못하게 외간 남자와 함께 있는지 감시하고 있는 곳이니까. 누구보다 손녀가 보고 싶었을 외할머니조차, 작가가 이란에 남겠다고 하자 만류할 정도다. 수십 년을 살았어도 온전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프랑스와, 민소매 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탈 자유도 없는 이란. 어느 곳도 작가를 온전히 받아주지도, 이해해 주지도 않는다. 책에 실린 온갖 기억과 상념의 파편들은 두 개의 정체성 사이에서 분열돼서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갈 수 없었던 작가의 혼란스러움을 보여준다. 


 하지만 작가는 두 언어, 두 나라, 두 문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법을 익힌다. 다시 페르시아어를 익히면서 페르시아어의 아름다움을 다시 느끼고, 이란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면서 이란과 프랑스 두 곳에서의 삶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 연습하게 된다. 이란도 프랑스도 아닌 곳들에서 몇 년 동안 살아가는 것에도 익숙해진다. 테헤란의 교통 체증 속에서도 택시기사가 읊어주는 하페즈(14세기 이란의 시인으로, 페르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다.)의 시에서 행복을 느낀다. 마침내 묵묵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국어와 화해한 것이다. 


 그냥 모국과 지금 살고 있는 나라 모두의 언어와 문화를 누리며 살아가며 되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고국을 떠나 낯선 나라와 언어, 문화에 던져졌던 작가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의사에 따라 어디서든 살 수 있는 지금에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두 개의 언어, 문화 사이에서 나름대로 균형을 잡았다 해도 다시 흔들리고 헤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묵묵히 그녀를 기다려준 모국어와 그녀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 많은 어려움과 시간을 겪으면서 단단해진 그녀 자신이 있기에 다시 굳건히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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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얼에 집중하라 - 세대 갈등을 넘어 공감과 소통을 이야기하다
심혜경 지음 / 북스고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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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레니얼(millennial)’은 천 년의라는 뜻으로, ‘밀레니얼 세대는 새 천 년인 2000년대, 21세기에 중심 소비층으로 등장한 세대를 말한다보통 198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출생한 세대를 밀레니얼 세대라고 한다이들이 최근 주 소비층으로 등장하면서 밀레니얼 세대를 분석하는 책들도 많아졌다밀레니얼 세대는 소비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직장에서 기성세대와 함께 생산의 주체로 활약하고 있기에 어떻게 하면 밀레니얼 세대와 성공적인 직장 생활을 할 수 있는지 분석하는 책들도 나오고 있다이 책은 그런 책들 중 하나다.

 

 나도 밀레니얼 세대 중의 한 사람이니 밀레니얼 세대를 어떻게 분석했을까 궁금했는데다른 밀레니얼 세대 관련 책들과 크게 내용이 다르지 않다밀레니얼 세대는 회사라는 집단의 발전과 번영보다는 자신의 행복과 발전을 중시한다열심히 일하면 성공이 보장된 시대는 이미 지났기에 미래를 위해 저축하기보다는 지금의 작은 행복을 위해 소비한다불필요한 절차는 생략하고 핵심적인 내용을 자유롭고 즉각적으로 소통하는 것을 원한다등등공감은 되지만 이미 들어본 이야기들이다.

 

 밀레니얼 세대와 슬기로운 직장 생활을 하기 위해 이 책에서 제시하는 해결책들도 다소 원론적이다. ‘요즘 젊은 것들은 노력이 부족하다고 단정 짓지 말고 밀레니얼 세대가 불러일으키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자기성세대가 먼저 밀레니얼 세대에게 다가가서 이해하며 공감해야 한다밀레니얼 세대도 기성세대의 장점을 배우면 도움이 된다등등다른 경제경영서들이나 기업 교육에서도 많이 제시하는 해결책들이다.

 

 딱히 새로운 이야기는 없지만 기업 교육을 하는 저자가 쓴 만큼 실제 직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예로 들어 깔끔하고 이해하기 쉽게 잘 설명해 놓았다기성세대인 상사들이(물론 밀레니얼 세대인 부하 직원들도 노력하고 실천해야 하지만책에 나오는 것만큼만 이해하고 실천해도 직장 문화는 훨씬 더 나아질 것이다기성세대뿐 아니라 밀레니얼 세대 안에도밀레니얼 세대와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젊은 꼰대는 있으니 그들도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다른 밀레니얼 세대 관련 책들과 비교했을 때 독보적으로 뛰어나다고 하기는 어렵지만밀레니얼 세대는 어떤 세대인지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더 성공적인 직장 생활을 하려면 어떤 마음가짐과 노력이 필요한지 알고 싶을 때 가볍게 입문서처럼 읽기에는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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