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아내 만들기 - 피그말리온 신화부터 계몽주의 교육에 이르는 여성 혐오의 연대기 걸작 논픽션 13
웬디 무어 지음, 이진옥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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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해당 책, 희곡 <피그말리온>,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 스포일러 포함


  고대 그리스에 피그말리온이라는 조각가가 있었다. 그는 현실의 여인들에 만족하지 못하고 실물 크기의 여인상을 만들었다. 그 여인상이 얼마나 완벽했는지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만든 조각상을 사랑하게 되었고,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자신의 조각상과 같은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해달라고 빌었다. 아프로디테 여신은 그의 기도에 응답해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고, 피그말리온은 사람이 된 조각상을 아내로 맞았다. 18세기 말 영국에도 피그말리온처럼 자신이 원하는 완벽한 아내를 만들려고 한 남자가 있었다. 문제는 그가 조각상이 아닌 사람을 자신의 이상에 맞는 완벽한 아내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사람은 조각상처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존재가 아닌데도 말이다.


(왼쪽) 완벽한 아내를 만들기 위한 실험을 했던 토머스 데이. (오른쪽) 토머스 데이의 실험 대상이 되었던 소녀 사브리나 시드니. 만년에 그려진 초상화다.


  토머스 데이 Thomas Day 는 18세기 영국의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다. 그가 친구 존 빅널과 함께 쓴 시 <죽어가는 검둥이 The Dying Negro>는 흑인 노예의 고통을 생생하게 그려, 많은 사람들이 노예제의 부당함에 공감하게 했다. 그는 노예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선거권을 위해서도 싸웠고, 동물의 권리를 보호하려고 했으며 아이들을 위한 동화도 썼다. 그러나 그가 보호하고 권익을 찾아주려고 애쓰는 대상에 여성은 포함되지 않았다. 믿고 의지하던 어머니의 재혼에 충격을 받고 연애에 몇 번이나 실패하면서 데이는 여성들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하고, 여성을 의심하고 혐오하게 되었다. 


  데이는 자신이 아직 제대로 된 여성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 연애에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또 다른 사랑을 찾아나섰을 텐데, 그는 제대로 된 여성이 세상에 없다면 만들어내면 되지 않겠느냐는 이상한 생각을 했다. 그가 생각하는 제대로 된 여성, 자신의 이상에 맞는 여성은 사치스럽지 않고 검소하며 거친 시골 생활을 견딜 만큼 건강하고, 자신과 말이 통할 정도의 지성을 갖추면서 자신의 희망사항에 따라 완벽하게 순종하는 여성이었다. 여성도 남성과 같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으면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당시의 남성으로서 진보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데이는 여성이 자신과 동등한 존재가 아닌, 자신의 완벽한 부속품이 되어주기를 원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이미 교육 받고 가치관이 정립된 성인 여성이 아닌 어린 소녀를 데려와 자신에게 맞는 아내로 키우겠다고 결심했다. 


  어떤 부모도 자기 딸이 미래의 남편의 손에 넘어가 그의 뜻대로 양육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데이 자신도 자신이 하는 일이 떳떳하지 않음을 알았던지, 아무 연고도 없는 고아 소녀를 고아원에서 데려왔다. '미래의 내 아내로 키우기 위해 데려갑니다.'라고 말하면 고아원에서도 당연히 아이를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 데이는 소녀를 하녀로 데려간다고 거짓말했고, 고아원은 아무 의심 하지 않고 흔쾌히 소녀를 내어주었다. 그는 예비용으로 소녀 한 명을 더 데려왔다. 둘 중 자신의 마음에 드는 소녀를 아내로 맞을 생각이었다. 나중에 꼬리를 밟히지 않기 위해 데이는 소녀들의 이름까지 바꾸었다. 앤 킹스턴에게는 사브리나 시드니라는 이름이, 도카스 카에게는 루크레티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데이는 소녀들에게조차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하지 않고, 아무런 설명 없이 두 소녀에게 교육 실험을 했다. 자신과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지성을 갖추게 하기 위해 소녀들에게 지리학과 물리학, 천문학을 가르쳤고, 사치스러운 풍조에 물들지 않도록 외출할 때도 화장을 하지 않고 검소한 옷을 입게 했다. 사교계가 겉치레만 하고 헛되다고 경멸했기 때문에 사교를 위해 악기 연주나 춤을 배우지도 못하게 했다. 집안일은 하인들이 아닌 아내가 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집안일을 두 소녀에게 모두 맡겼다. 좀 더 발랄하고 활발한 루크레티아를 내친 뒤 사브리나에게 실험을 집중하게 되면서, 실험은 상식의 수준을 벗어나게 되었다. 데이는 고통을 초연하게 견뎌내야 한다면서 사브리나를 연못 깊은 곳에 던졌고, 사브리나의 피부 위에 끓는 밀랍 덩어리를 부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고아원에서 꺼내주고 먹여주고 입혀주는 데이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했던 사브리나도,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하고 고통당하게 되자 데이에게 반항했다. 


 놀랍게도 데이의 친구들과 지인들은 데이에게 완벽한 아내를 만들겠다는 계획 이야기를 들었고,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방관하거나 심지어는 협조했다. 어떤 친구는 고아 소녀를 데려오는 데 자신의 명의를 빌려주었고, 어떤 친구는 데이와 함께 직접 고아 소녀를 골랐다. 데이의 계획이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 지인까지 있었다. 데이의 실험이 점점 더 상식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고 실험을 중지하라고 당부한 지인들도 있었지만, 그들조차 실험으로 고통 받는 소녀보다는 실험을 하면서 광기에 사로잡혀가고 실험이 발각되었을 때 비난을 받을 데이를 더 걱정했다. 


  지인들에게 그렇게 무모한 실험을 하느니 다시 연애를 하라는 충고를 받고, 소녀들이 자신의 뜻대로 따라와 주지 않는 것에 절망한 데이는 소녀들을 내버려두고 연애를 몇 번 더 했다. 그러나 한 연인은 아내가 완벽히 자신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데이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부부의 행복은 두 사람의 평등 위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하며 데이의 청혼을 거절했다. 그 뒤에 사귄 연인에게는 푹 빠져 있었는지, 웬일로 자신을 바꿔볼 생각을 했다. 아내에게는 온갖 조건을 요구하면서 지저분하고 매너도 없는 자신의 모습은 고칠 생각도 안 하던 위인이 말이다. 연인의 마음에 드는 멀끔한 신사가 되기 위해 1년 동안 수업까지 받았지만, 오히려 더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그 모습에 경악한 연인에게 차인 뒤, 데이는 최후의 보루로 여겼던 사브리나에게 눈을 돌렸다. 자신의 아내 후보에서 밀어낸 뒤 시골의 기숙학교에 보내놓고 몇 년 동안 신경도 쓰지 않다, 연인에게 차이고 나서야 사브리나를 다시 아내 후보로 생각한 것이다. 사브리나는 자신의 후원자라고만 생각했던 데이가 자신을 아내 후보로 여기고 있다는 것에 경악했고, 당연히 데이의 청혼을 거절했다. 데이도 사브리나의 반항적인 모습을 보고 사브리나를 아내로 맞으려는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 데이의 혹독한 실험을 겪었지만 사브리나는 사람이었고,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처럼 호락호락하게 조물주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 인간이 평생 결혼하지 않기를 바랐건만, 안타깝게도 데이는 결국 결혼을 했다. 데이의 높은 이상에 반한 에스터 밀네스라는 여성이 데이가 연애에 실패하고, 사브리나에게 한 청혼도 실패하는 과정까지 모두 지켜보면서 끝까지 그를 기다렸다. 연애도 아내 만들기 실험도 실패한 데이는 자신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에스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에스터는 데이 못지않은 지성에 데이보다 훨씬 훌륭한 인품을 지녔는데도, 데이의 뜻대로 제일 가까운 이웃과도 십여 킬로미터나 떨어진 외딴 시골집에서 남편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했다. 인내심 강한 에스터조차 데이의 독재를 견뎌내지 못하고 종종 데이와 부부싸움을하고 가출했지만, 매번 자신이 다 잘못한 거라고 사과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데이가 41세의 젊은 나이에 낙마 사고로 사망했을 때 (나는 속이 시원했지만) 에스터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이듬해에 데이를 따르듯 세상을 떠났다.


 에스터는 데이의 죽음(또는 자신의 죽음)으로 데이가 씌워놓은 굴레에서 해방되었지만, 사브리나는 데이의 아내 후보에서 탈락된 이후로도, 심지어 데이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도 고통 받았다. 데이는 사브리나의 삶에 계속 간섭해, 성실한 젊은 약사가 사브리나에게 청혼했을 때도 사브리나 대신 그에게 거절하는 답장을 보냈다. 그러면서 정작 사브리나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브리나는 그 약사 대신 데이의 친구인 빅널과 결혼했지만, 빅널은 무절제하고 방탕하게 살다 빚과 두 아들만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사브리나는 주변 지인들의 호의 덕분에 어느 사립학교의 관리인이 되었고, 수십 년 동안 성실히 일하면서 학생들과 아들들 모두를 훌륭하게 키워냈다. 그러나 데이의 친구들이 회고록을 출간하고, 그 회고록들에 사브리나의 이야기가 실리면서 사브리나는 만년에 남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물론 이런 비인간적인 실험을 한 데이도 큰 비난을 받았지만, 사브리나는 아무 잘못도 없이 남 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안줏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사브리나는 끝까지 자신의 존엄을 잃지 않고 가족들과 학교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살다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 완벽한 아내를 만들겠다는 데이의 실화에서 영감을 받은 문학 작품들이 나왔다. 그 중에서도 아일랜드의 희곡 작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은 오드리 헵번 주연의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로 영화화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피그말리온>의 주인공 일라이저는 자신을 우아한 숙녀로 교육시킨 히긴스 교수가 자신을 실험대상으로만 대하는 것에 반발해, 다른 사람과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마이 페어 레이디>는 일라이저가 히긴스 교수와 맺어지는 것으로 결말을 바꾸어, 피조물이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가는 당당한 결말에서 한참이나 퇴보했다. 그리고 피그말리온 신화가 낳은 환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1990년대 많은 인기를 얻었던 게임 <프린세스 메이커>는 아버지로 설정된 이용자가 여자아이를 입양해서 한 사람의 성인으로 성장시키는 것이 기본 설정인데, 경악스럽게도 딸이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와 결혼하는 결말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결말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게임을 진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게임이 아닌 현실에서는 이러한 결말이 이루어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한다. "완벽한 아내를 창조하겠다는 것은 이루지 못할 목표다. 물론 갈라테이아(후대 사람들이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에 붙인 이름이다.)도 신비의 존재일 따름이다."


  우리는 완벽한 상대방을 창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이 약자를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것 자체를 경계해야 한다. 데이가 완벽한 아내를 만들겠다는 이유로 사브리나에게 비인간적인 실험을 했는데도, 데이는 부유한 귀족에다 지식인 남성이라는 이유로 친구와 지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비호를 받았다. 데이의 친구들은 사브리나에게 연민을 가졌지만 데이가 사브리나에게 비인간적인 실험을 하고 사브리나의 삶을 통제하는 것을 방관하고 있었다. 사브리나는 고아, 가난한 사람, 여성이라는 삼중의 굴레를 쓰고 있는 약자였기에 보호받지 못했고, 피해자였는데도 온갖 소문에 시달렸다. 자신의 뜻과는 상관 없이 실험 대상이 되고 고통 당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개척한 사브리나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게임이나 문학 작품 속 캐릭터가 아닌 실제 사람에게 자신의 환상을 투영하고 자신의 뜻대로 통제하려는 일이 또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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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창과 쿤팬의 이야기 지만지 고전선집 581
라마 2세 외 지음, 김영애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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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친숙한 영미권과 일본, 중국어권, 그리고 비교적 인지도가 큰 서유럽권을 제외한 지역의 문학을 접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도서관에 갈 때마다 문학 도서 서가 중에서도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제3세계 지역 문학 코너를 유심히 보게 된다. 『쿤창과 쿤팬의 이야기』도 그렇게 발견한 책이었다.『쿤창과 쿤팬의 이야기』는 16-17세기경 태국에 실제 살았던 쿤창과 쿤팬, 완텅이라는 세 인물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태국의 고전문학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판소리처럼 소리꾼과 소리의 박자를 맞춰주는 반주자가 장편 서사시를 낭송하는 '쎄파' 라는 형식의 작품인데, 태국에서는 우리나라의 <춘향전>만큼이나 잘 알려진 작품이라고 한다. 


 『쿤창과 쿤팬의 이야기』도 <춘향전>처럼 사랑 이야기이다. 쿤팬과 쿤창이라는 두 남자와 완텅이라는 한 여자의 삼각관계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두근두근 설레거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기대하고 봤다가는 실망할 것이다. 이 이야기의 장르는 멜로가 아니라 막장드라마다. 


 삼각관계를 다룬 이야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두 남주인공 중 누구를 응원할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갈리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을 때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쿤창과 쿤팬 둘 다 인성이 막하막하여서 응원할 마음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쿤팬은 잘생긴 외모 덕분에 여주인공과 서로 사랑을 나누는 메인남주이다. 하지만 여주인공 완텅이 잠든 사이에 완텅의 몸종과 성관계를 가지고 이후에도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한다. 여기까지는 일부다처제여서 그렇다 치자. 자신이 전쟁에 나간 사이 쿤창의 속임수로 완텅이 쿤창에게 시집가게 된 것을 알았을 때, 완텅에게 "이년아, 넌 죽어라, 살아 있지 마라, 이 칼을 뽑아 네 머리통을 내리쳐 죽이겠다."고 폭언을 하면서 칼을 빼어들고 죽이려고 한다. 완텅이 쿤창의 속임수로 어쩔 수 없이 시집을 가게 된 거라고 하소연을 했는데도. 아내를 빼앗긴 분노 때문이라고 해도 완텅 또한 쿤창에게 속은 피해자다. 무엇보다 쿤팬이 저지른 가장 끔찍한 짓은 수호 정령을 만들기 위해 자기 자식을 죽인 것이다. 태국에는 인간이 부리는 '꾸만텅'이라는 귀신이 있는데, 반드시 출생 직전의 태아로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쿤팬은 꾸만텅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아이를 잘 낳을 만한 여자에게 접근해 아내로 맞는다.(완텅이 아니라 다른 여자다.) 그리고 임신한 지 여러 달이 되자 잠든 아내의 배를 갈라 뱃속의 아이를 꺼내 꾸만텅으로 만든다. 꾸만텅이 된 아이는 성불도 하지 못하고 작품 내내 자기를 죽인 아버지와 이복동생들의 심부름꾼 노릇을 한다. 이 얼마나 끔찍한가. 


  쿤창은 못생긴 외모 때문에 쿤팬과 완텅과 어울려 놀던 어린 시절부터도 완텅에게 "너는 못생겨서 같이 놀기 싫어."라는 말을 듣는다. 그런 취급을 당하면서도 한결같이 완텅을 좋아한다. 그러나 쿤팬이 전쟁에 나간 사이 쿤팬이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막대한 재산으로 완텅의 어머니의 마음을 사 완텅과 결혼하는 비열한 인간이다. 완텅이 낳은 아들 프라와이가 자기 자식이 아니라 쿤팬의 아들이라는 걸 알았을 때 아이의 간이 터질 정도로 심하게 폭행한다. 그랬으면서도 위기에 처했을 때 프라와이에게 길러준 은혜를 생각해 보라고 뻔뻔하게 말한다. 이후로도 쿤팬과 완텅을 갈라놓기 위해 끊임없이 쿤팬을 모함한다. 그나마 쿤팬과 달리 완텅에게 폭언이나 폭행을 한 적이 없고, 자신 때문에 완텅이 음탕한 여자 취급을 당하고 죽은 것에 대해 후회하고 반성하지만, 독자들이 응원해 줄 만한 주인공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 막장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들에게는 인권이 없다. 완텅은 쿤팬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데도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쿤창과 결혼해 원래 남편인 쿤팬과 헤어져야 했다. 그런데도 국왕은 완텅이 음란한 여자라고 낙인을 찍고 당장 처형하라고 한다. 완텅의 아들 프라와이가 자신과 아버지가 나라에 세운 공을 참작해 용서해 달라고 해 왕의 사면령을 받았지만, 사면령이 도착하기 전 이미 완텅은 처형됐다. 다른 여성 캐릭터들도 결혼하고 나면 남편의 폭력에 시달린다. 한 나라의 공주였던 여자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도 여성 캐릭터들의 친정어머니들은 한결같이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을 받들라고 가르친다. 『쿤창과 쿤팬의 이야기』가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정리될 시기에 서양인들과 서구 자본주의가 태국에 막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백성들의 놀이 문화에서도 여성의 전통적인 성 역할을 강조하고 규범화했을 것이라고 한다. 태국 전통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가 단지 남자의 부속물 정도였다는 것이 뚜렷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다른 전통설화와 달리 캐릭터나 서사가 단순하지 않다는 장점이 있다. 많은 설화 속에서 주인공은 선하고 잘생기고 능력이 뛰어나고, 악역은 악하고 못생기고 능력도 주인공보다 부족하다. 그런데 쿤창과 쿤팬은 선한 면과 악한 면을 모두 갖고 있어 누가 주인공이고 악역이라고 구분할 수 없다. 서사도 전래동화처럼 단순하지 않고 때때로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 긴장감과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던 시절에 『쿤창과 쿤팬의 이야기』는 태국의 백성들에게 흥미진진한 드라마였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잘 모르고 있던 태국의 풍습들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근대 이전 아이들은 학문을 더 깊이 공부하기 위해 절에 들어가 스님들에게서 여러 가지 학문을 배웠다. 승려가 출가할 때, 집들이할 때, 먼 길을 떠나거나 먼 길에서 돌아왔을 때 등등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집안의 어른이나 초청해 온 승려가 복과 장수, 평안을 기원하는 '탐콴 의식'을 올린다. 거미가 가슴을 치며 우는 것은 태국에서 흉조로 여겨진다. 태국은 인도와 힌두교에게서도 많은 영향을 받아,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가 태국에서는 <라마끼엔>이라는 이름으로 정착했다. 태국에서는 <라마야나>의 주인공 라마를 프라람, 라마의 아내 시타를 씨다, 시타를 납치해 간 악당 라바나를 톳싸깐이라고 부르고, 이 작품 속 인물들도 스스로를 <라마끼엔> 속 등장인물들에 비유하기도 한다. 같은 아시아에 있는 나라인데도 정말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아쉽게도 이 책은 줄거리 요약에 원문 일부를 발췌했다. 이 책은 주인공들 위주로 요약한 것이고 원문은 아주 방대하다던데, 언젠가는 『쿤창과 쿤팬의 이야기』가 완역되었으면 좋겠다. 완역된 『쿤창과 쿤팬의 이야기』에서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태국의 전통 문화, 풍습을 만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쿤창과 쿤팬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2002년 태국 영화 <쿤팬-전쟁영웅의 전설>의 포스터.


P. S. 『쿤창과 쿤팬의 이야기』는 2002년 <쿤팬-전쟁영웅의 전설>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태국에서 유명하고 인기 많은 고전문학이니 이 영화 말고도 드라마나 영화로 여러 번 만들어졌을 것 같은데, 영어로 검색해서 나오는 건 이 영화 하나니 더 자세히 알 수 없다. 줄거리 소개를 보니 쿤팬의 영웅담과 완텅과의 사랑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영화 같다. 쿤팬은 정의롭고 로맨틱한 남주인공으로 나오고 쿤창은 쿤팬을 위기에 빠뜨리는 악역으로 나오는 듯 싶다. 원전을 읽어보면 어느 한 쪽이 더 착하고 더 나쁘다고 말하기도 힘든데. 더러운 외모지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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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9-14 0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콕에 여행와 미술관에 들렀다가 이들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어요. 궁금해서 책이 있나 검색하다 리뷰 재미있게 읽고갑니다. 전문을 다 읽어보고 싶어요.

바스티안 2019-09-14 16:33   좋아요 0 | URL
방콕 여행을 갔다 오셨다니 좋으셨겠네요. 아직까지 이 책의 완역판이 없는 게 안타까워요. 번역자 분이랑 출판사에서 더 힘내서 완역판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래주의 요리책
필리포 톰마소 마리네티.필리아 지음, 이용재 옮김 / 마티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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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주의 Futurismo, Futurism 는 20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현대 예술 운동으로, 예술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에서 기존의 가치와 문화를 혁신하려고 했던 운동이었다. 미래주의자들은 과거의 것과 전통을 현대화의 걸림돌로 여겼고, 현대화된 도시와 기계 문명의 속도감과 역동성을 찬양하며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키려 했다.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산업화가 늦었던 이탈리아에서, 미래주의자들은 삶과 예술 모두를 현대화시키고 싶어했다. 삶과 예술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현대화되는 것이 미래주의자들이 꿈꾸는 혁명이자 미래였다. 미래주의자들이 혁신시키려고 하는 대상에는 미술, 음악 같은 예술뿐만 아니라 요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래파의 창시자이자 수장인 마리네티 Filippo Tommaso Marinetti, 1876-1944 는 동료 미래주의자인 화가 필리아(Fillia, 1904-1936, 본명은 루이지 콜롬보)와 함께 1930년 <미래주의 선언>을 발표하고, 2년 뒤에는 미래주의가 창안한 음식 레시피와 새로운 식사법을 소개하는 책 『미래주의 요리책』을 펴냈다. 


 서문에서 마리네티는 미래주의 요리 혁명을 통해 이탈리아 민족의 식습관을 바꾸고, 실험과 상상력이 가득한 새로운 음식과 인간다운 식사법을 제안하겠다고 패기 넘치게 선언한다. 그런데 그 제안이 황당하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음식인 파스타를 추방하자는 것이다. 그가 파스타를 추방하려는 이유는 이렇다. "입에 맞을지는 몰라도 파스타는 구시대 음식입니다. 비만을 초래하고 짐승처럼 먹게 합니다. 영양이 많다고 착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인간을 회의적이며 굼뜨고 비관적이게 만듭니다." 파스타를 이탈리아인의 식탁에서 영원히 추방하자는 제안에 많은 사람들이 반발했다. 마리네티가 파스타를 게걸스럽게 먹는 사진이 찍혔지만 마리네티 본인은 자신을 모함하기 위해 만들어진 합성사진이라고 일축했다. 


 미래주의자들이 꿈꿨던 식생활은 비만을 불러일으키는 음식을 몰아내고 신체에 필요한 열량을 빨리 공급하며, 음식의 맛과 색, 형태, 촉감, 음식을 먹을 때의 주변 환경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들은 현대 기술을 적극 활용해 오감을 동시에 자극하며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요리들을 개발해, 사람들에게 미래적인 감성을 일깨우려고 했다. 그런데 이 요리들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다. '항공음식', '탄성케이크', '이혼한 계란', '입체파 채소밭', '당근+바지=교수', '직관적인 전채', '깜짝 바나나' 등등. '최강정력'이라는 요리 이름에서는 풋 하고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 뒤로 이름만큼이나 정신 나간 레시피들이 이어진다. 강철의 맛을 느끼기 위해 강철 볼베어링을 닭고기 안에 넣고 오븐에 10분 구워 볼베어링의 맛이 닭고기에 배게 한다. 공감각적 맛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향수에 재료를 재워두는 레시피들도 여럿 있다. 심지어 다양한 향수를 풍선에 채우고, 풍선 입구 가까이에 불붙인 담배를 가져다대고 빠져나오는 향을 들이마시는 것도 요리라고 한다. 그럭저럭 먹을 만해 보이는 레시피조차 재료의 양은 대략적으로만 적혀 있고, 아예 적혀 있지 않을 때도 있다. 조리 시간은 아예 적혀 있지 않다. 그런데 재료의 양과 조리 시간이 적혀 있지 않아서 오히려 요리사의 창의력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한다. 


  식사법도 레시피만큼이나 독특하다. '항공음식'은 검은 올리브와 회향 구근, 금귤을 아무 조리 없이 그냥 먹는 간단한 요리이지만, 먹을 때 왼손으로 사포, 비단, 우단을 엮어 만든 천을 만지고 종업원이 식사를 하는 손님의 목 뒤에 카네이션 향수를 뿌리고 비행기 모터 소리와 바흐의 음악을 틀어 공감각적인 식사로 만든다. '미래주의 항공시 저녁 식사'는 고도 3000미터 높이에 오른 비행기 조종칸에서 아래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면서 하는 식사다. '지리학 저녁식사'에서 종업원이 몸에 두른 아프리카 지도 중 한 군데를 손님이 가리키면 손님이 가리킨 지역과 관련된 요리를 내어온다. 


  이 모든 정신 나간 소리를 아주 진지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들의 요리가 식생활의 혁명이라고 240페이지 내내 자화자찬하고 있는데, 역시 맨 정신으로 프로파간다를 읽는 것은 쉽지 않다. 자신들의 요리 혁명에 전 유럽의 주요 언론들이 주목했다는데, 과연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관심을 가져주었을지 모르겠다. 기계 문명을 느끼기 위해서 쇳덩어리를 음식에 넣고, 빵을 비행기 모양으로 만들어낸다는 것도 1차원적으로 느껴진다. 게다가 외국인과 연애하거나 외국 음악을 즐기고 외국 제품을 쓰면 해외병 환자로 매도하는 국수주의에, "감성적인 여성 화장실에 있는 암컷 침팬지처럼", "뱃사람 애인만큼이나 뚱뚱한 양파" 등 여성을 대상화하고 비하하는 표현, 흑인을 항상 "검둥이"로 지칭하고 식사 분위기를 돋우는 도구로 취급하는 인종 차별까지 미래주의자들의 편견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솔직히 말하면 본문보다 본문을 패러디하면서 미래주의자들을 풍자하고 놀리는 번역자 후기가 더 재미있다. 번역자는 마리네티에게 현대의 레스토랑들을 보여주면서 파스타가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준다. 심지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 사람들도 파스타를 즐겨먹고 있다. 탄수화물과 면이여, 영원하라. 파스타의 당당한 기세에 기가 죽은 마리네티는, 미래주의 요리는 현대적인 요리라기보다는 충격을 주고 주의를 끌기 위한 일종의 장난이었다는 냉정한 분석에 더욱 더 의기소침해진다. 그러나 아이팟으로 재생되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해산물 요리를 먹게 하고, 꽃 향기가 나는 캘빈 클라인의 향수 '이터너티'와 어울리도록 오렌지꽃 젤리, 바질, 바닐라 크림을 곁들인 귤 그라니타(granita, 과일과 설탕, 와인을 혼합한 뒤 얼려서 만든 디저트)를 만드는 등 공감각적 맛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21세기 요리사들의 모습을 보면 흡족해할 것이다. "마리네티를 비롯한 미래주의 일당에게 미친 구석이 있는 것만은 확실하지만, 그렇게 미친 자들 기운데 일부가 결국은 선구자가 되는 게 아닐까." 번역자의 말처럼 미래주의자들의 장광설에도 미래를 내다보는 선구안이 숨어있기는 하다. 미래주의자들의 방식 그대로 미래주의자들을 풍자하면서도 미래주의자들의 주장에서도 가치를 찾아내는 멋진 번역자 후기다. 이 후기가 이 책을 읽는 노고에 대한 보상이 되었다. 


미국의 요리사 맷 바인가르텐이 재현해낸 미래주의 요리 '직관적인 전채'. 오렌지 속을 

파내고 그 안에 살라미 소시지, 버터, 버섯절임, 앤초비와 녹색 파프리카를 채운 뒤 

미래주의 격언을 적은 쪽지를 넣는다. 


P. S. 2009년 미국의 요리사 맷 바인가르텐은 자신의 레스토랑에서 미래주의 요리들을 재현한 정찬을 열었다. 바인가르텐의 말에 따르면 미래주의 요리들의 맛은 훌륭하다고 한다. 그러나 바인가르텐의 미래주의 정찬을 기사로 쓴 기자는 여전히 미래주의 요리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했고, 네티즌들도 기사 댓글에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기사에 실린 요리 사진만 보면 그럴 듯한 요리 같긴 한데. 


참고 기사: https://dinersjournal.blogs.nytimes.com/2009/02/23/the-future-arrives-on-park-ave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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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모델, 미국 - 미국의 인종법은 어떻게 나치에 영향을 미쳤는가
제임스 Q. 위트먼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미국이 히틀러의 모델이라니, 선뜻 납득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스스로를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의 수호자, 세계 모든 민족에게 개방된 땅으로 자부해 왔다. 히틀러에게 미국은 최대의 적이었고,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은 미국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인 민주주의와 평등을 혐오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이 책은 나치 독일이 반유대주의 법인 '뉘른베르크 법'(1935년 발표)을 제정할 때 미국의 인종 차별적인 법들을 참고했다고 이야기한다. 미국의 법학자인 저자는 미국이 겉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을 역사의 어두운 면을 파헤친다. 


  수많은 인종이 섞여 있는 미국이지만 건국 당시부터 인종주의(인종의 생리학적 특징에 따라 민족 사이의 불평등과 억압을 합리화하는 비과학적인 사고방식)는 미국 법에 스며들어 있었다. 미국 초대 의회에서 제정된 법 중 1790년의 귀화법은 "자유로운 백인 외국인"에게만 귀화를 허용했다. 남북전쟁 이후 노예제도에서 해방된 흑인들에게 미국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1868년에는 "미국 영토에서 태어난 사람은 부모의 시민권 여부와 관계 없이 미국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보장 받는다"는 수정헌법 14조가 헌법에 추가되었다. 그러나 문맹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법, 노예 해방 이전에 조상이 투표권을 가졌을 경우에만 투표권을 주는 "조부조항" 등 흑인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으려는 교묘한 인종 차별법들이 생겨났다. 1898년 미국이 스페인에게서 필리핀의 식민 지배권을 넘겨받았을 때 필리핀 사람들은 법적 권리를 가진 미국 시민이 아니라 단순한 "비(非)시민 국적자"가 되었다. 


 나치의 법조인들과 입법자들은 이러한 미국의 인종차별적인 사례들을 꼼꼼히 검토하고 연구했다. 독일에서는 시민권을 취득하는 것이 동호회에 가입하는 것만큼이나 쉽다고 비꼬았던 히틀러가 미국의 인종차별적인 꼼수를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나치 독일은 뉘른베르크법에서 유대인의 국적과 참정권을 박탈해 단순한 체류자로 전락하게 했다. 나치 법률가들은 미국인들의 출중한 법적, 정치적 재능과 교양을 보여준다며 미국의 인종차별적인 법들을 찬양하기까지 했다. 


 '인종의 순수성'을 지키는 점에서도 나치 독일은 미국을 모범사례로 보았다. 나치 독일에게 미국은 게르만 족의 친족이자 아리아인의 한 갈래인 노르딕 인종이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세운 국가였다. "백인과 흑인의 혼인, 백인과 위로 3대 이내에 흑인 조상이 있는 자의 혼인, 또는 백인과 말레이 인종의 혼인, 또는 흑인과 말레이 인종의 혼인은 영구히 금지되며 무효다. 이 조항의 규정을 위반하는 자는 18개월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메릴랜드 주의 혼혈금지법, 한 방울만 흑인의 피가 섞여 있어도 흑인으로 간주한다는 "한 방울 법칙(one drop rule)"은 나치 법조인들조차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진저리 치게 만들었다. 다만 미국이 유대인을 백인으로 취급하는 것만은 못마땅하게 여겼다. 혈통이나 배우자의 인종, 과거의 노예 신분 등 다양한 기준으로 인종을 규정했던 미국의 법들을 참조해, 뉘른베르크법에서는 조부모 중 두 명이 유대인이고 유대인과 혼인하거나 유대교 공동체의 일원인 사람을 유대인으로 규정했다. 


 나치가 뉘른베르크법을 제정할 때 미국의 영향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은 독일 외에 인종주의를 법에 적용했던 유일한 나라였고, 그러한 나라가 세계에서 강대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 나치를 자극했다. 미국이 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독일에 맞서게 되면서 둘은 완전히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고,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서 세계의 평화를 지키는 데 크게 공헌한 것도 사실이다. "이게 다 미국의 잘못입니다. 미국을 탓하세요."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국의 과거에는 우리(미국인)가 잊고 싶어하는 측면도 담겨 있고, 그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계 인종주의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미국의 위치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미국인 학자인 저자나 미국 독자들에게는 이 책이 뼈 아프게 다가올 것이다. 게다가 현재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는 2016년 대선 출마 당시 출생시민권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올해 10월 30일에도 "외국인이 미국에 들어와서 아이를 낳으면 시민으로 인정하고 그들에게 모든 혜택을 주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미국뿐"이라며, 출생시민권을 반드시 폐지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그는 미국에 들어오는 다양한 국가 출신의 이민자들에게 인종차별 발언을 일삼고 있고, 백인우월주의 단체 KKK의 대표였던 극우 인종주의자 데이비드 듀크는 그런 트럼프를 지지한다. 인종주의의 역사가 다시 반복되려는 이 시기가, 미국인들이 교묘한 인종차별법을 최근까지도 시행하고 있었던 자국의 역사를 되돌아봐야 할 때다.


 그런데 이것이 미국의 문제라고만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는 이 세계에서 다양한 인종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고, 인종주의의 피해자도 가해자도 될 수 있다. 우리는 동양인으로서 인종차별과 인종혐오 범죄의 희생양이 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에 들어오려는 이민자와 난민들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가해자가 될 수 있다. 나치는 이 세상에서 유일무의한 극악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극악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보다 선하다고 자신하면서 자신 안의 악을 직시하지 못할 때 나치의 유대인 학살 같은 비극은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또한 읽고 되새겨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참고 기사: "트럼프 '출생시민권' 폐지 발언에 수정헌법 14조 논란 격화"(2018.12.31.뉴시스)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81031_0000459692&cID=10101&pID=1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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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1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02 1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송기원의 포스트 게놈 시대 - 생명 과학 기술의 최전선, 합성 생물학, 크리스퍼, 그리고 줄기 세포
송기원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8년 10월
평점 :
품절


  2003년 인간 유전체(게놈 genome, 한 개체가 가지고 있는 유전 정보 전체)의 모든 정보를 읽어내는 것을 목표로 했던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23년 만에 완료되었다. 인류는 이제 자신의 유전 정보를 모두 알 수 있는 '포스트 게놈(게놈 프로젝트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유전 정보를 쉽게 얻고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유전 정보를 모두 읽어내고 분석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으니, 이제는 역으로 유전 정보를 조립해 인간이 원하는 대로 생명을 설계하고 편집하고 창조하려는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런 연구들을 통틀어 '합성생물학'이라고 한다.    


크레이그 벤터 박사의 연구팀이 2016년 3월에 만들어낸 합성 생명체 Syn 3.0. 인간이 합성한 유전체만으로도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합성생물학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2010년 미국의 생명과학자 크레이그 벤터는 한 세균의 유전체를 인공적으로 합성한 다른 세균의 유전체로 교체했고, 인간이 교체하고 합성한 유전체로도 세균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2017년 8월에는 인간의 배아에서 유전체를 성공적으로 교정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유전자 조작 농산물(GMO,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을 먹어도 안전한지는 궁금해하면서, 그 밖의 생명과학이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생명과학은 앞으로의 인류의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생명과학자 송기원 교수가 생명과학이 최근 어떻게 진행되고 발전되고 있는지, 이런 상황 속에서 고민할 문제는 무엇인지 소개하기 위해 쓴 책이  『송기원의 포스트 게놈 시대』 다.


​  이 책의 저자가 공동저자로 참여한 『생명과학, 신에게 도전하다』을 몇 달 전에 읽었었는데, 같은 저자가 같은 주제의 내용을 쓴 책이다 보니 이 책과 겹치는 내용이 있다. 겹치는 부분은 복습하는 기분으로 읽었다. 『생명과학, 신에게 도전하다』가 2017년 3월에 출간된 책이니 그때까지의 상황을 다루고 있는 반면, 이 책은 그 이후의 상황과 이슈들까지 다루고 있다. 또 다른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책이 나오면서 이 책의 시의성 또한 떨어지겠지만, 2018년을 전후해서 생명과학 분야에서 어떤 일들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 그리고 『생명과학, 신에게 도전하다』에서 소개됐던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CRISPR, Clustered Regularly Interspaced Short Palindromic Repeats, 간헐적으로 반복되는 회문 구조(앞에서 읽어도 뒤에서 읽어도 똑같은 구조) 염기 서열 집합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유전자를 편집하려면 필요한 부분만 잘라내는 유전자가위가 필요하다. 2012년 세균이 자기 몸에 침입한 바이러스의 DNA를 크리스퍼라는 유전자 사이에 저장해 두고 있다가, 다음에 같은 바이러스가 침입하면 저장된 정보를 통해 침입한 바이러스의 DNA 염기서열을 인식해 잘라버린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원리를 응용한 크리스퍼 가위는 기존의 유전자가위들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유전자를 편집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이전의 유전자가위들과 크리스퍼 가위의 특징을 비교하고, 크리스퍼 가위 기술을 활용한 사례들을 보여준다.  말라리아모기에게 불임 유전자나 말라리아 전달을 차단하는 유전자를 이식하는 연구, 인간 배아의 유전체를 편집하는 연구 등 크리스퍼 가위를 활용해 동식물이나 인간의 유전체를 인간의 의도대로 편집하고 교정하려는 다양한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  그러나 이 책은 크리스퍼 가위의 단점과 합성생물학의 문제 또한 이야기한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다른 유전자가위에 비하면 정확한 편이지만 엉뚱한 부분까지 같이 잘라내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그리고 인간의 세포는 매 순간 새로운 세포로 교체되고 있기 때문에, 성인의 세포를 가지고 유전자 교정 시술을 할 경우 시간이 지나면 원래 상태로 돌아온다. 수정란이나 배아 세포였을 때 세포의 유전자를 편집해야 수정란이나 배아 세포에서 만들어진 모든 세포의 유전자를 영구적으로 교정할 수 있다. 



박사와 고양이, 생쥐 캐릭터가 합성생물학의 원리를 설명해 주는 일러스트. 한 챕터당 하나 꼴로 실려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또한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자연의 간섭을 피할 수 없다. 앞에서 이야기한 말라리아 모기 불임 유전자 연구는 자연의 힘에 부딪치게 되었다. 처음 4세대까지는 불임 효과가 나타났지만, 세대가 지나갈수록 불임 효과를 상쇄시키는 또 다른 변이가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의 생명과학 기술이 아무리 빠르게 발달해도 자연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길을 찾아내고야 만다. 그리고 유전자를 변형시킨 생물이 생태계로 유출되었을 때 기존의 생물과 전체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인간 유전체를 모두 분석했다 해도, 어떤 유전자를 편집했을 때 의도했던 효과 외에 또 어떤 효과가 나타날지 지금의 기술로서는 예상할 수 없다. 


​  이렇게 이 책은 최근의 생명과학, 특히 합성생물학의 명암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대학교 때 교수님의 강의보다 명쾌한 필기 노트로 동기들의 공부에 도움을 주었다던 송기원 교수는 이 책에서도 최대한 쉽고 명쾌하게 최근의 생명과학 연구와 그 원리들을 설명한다. 송기원 교수를 캐릭터화한 것으로 보이는 박사 캐릭터와 고양이 캐릭터, 생쥐 캐릭터가 그림을 통해 합성생물학의 원리를 설명하는 일러스트가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처음에는 이 책이 그런 일러스트들로 이루어진 책인 줄 알았다. 막상 책을 읽어보니 텍스트가 주이고 일러스트는 한 챕터당 하나씩만 나오지만, 합성생물학의 원리를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캐릭터들이 귀여워 과학책의 딱딱한 느낌을 덜어준다. 


​  이 책을 통해 지금의 생명과학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연구자들도 버거울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생명과학이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 책뿐만 아니라 더 많은 생명과학 관련 소식에 귀를 기울여야겠다.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생명과학이 영향을 미치는 날은 생각보다 빨리 올지 모르고, 이미 와 있을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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