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법이론의 전개 법철학연구 총서 5
윤진숙 엮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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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94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고이 사건을 계기로, 1999년 제정된 남녀차별 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에 성희롱을 불법행위이자 성차별로 명시하게 되었다남성 가장인 호주(戶主)를 중심으로 호적을 정리하는 제도인 호주제는 가부장적인 가족 제도의 잔재로 양성평등에 어긋나기에 2003년 위헌 판결이 내려졌고, 2008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그리고 2017년 10, 23만 여 명의 시민들이 낙태죄 폐지 청원에 참여했고 올해 4월 11일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 위헌 여부를 선고할 예정이다이렇게 우리 법은 여성의 자유와 평등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갔다이런 흐름을 따라 여성 문제페미니즘과 관련된 법학 논문들도 계속해서 나왔고이 책은 그 중 16개의 논문을 뽑아 엮은 것이다.

 

  낙태죄 위헌 여부 선고를 몇 달 앞둔 지금가장 먼저 눈이 가는 글은낙태죄 헌법소원과 여성의 목소리낙태는 1953년 형법 초안에서부터 죄로 규정되었고임신이 임산부 자신의 건강에 위해가 되거나 성폭행이나 근친상간으로 인한 임신처럼 윤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임신일 경우에만 임신중절 수술을 허용했다이미 7년 전인 2012년에 낙태죄에 대해 헌법소원이 제기되었지만헌법재판소에서는 낙태죄 조항이 임산부의 자기결정권을 지나치게 침해한다고 보기 어려우며이 조항으로 제한되는 사익(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조항으로 보호되는 공익(태아의 생명)에 비해 중요한다고 볼 수 없다낙태죄 조항이 헌법에 어긋나지 않다고 선고했다그러나 낙태죄가 처음 규정된 이후로 수십 년 동안 태아의 생명은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고 여겨졌지만태아를 직접 몸 안에 품고 낳고 양육하는 여성들의 권리는 그보다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낙태죄 조항의 역사를 훑어본 뒤이 글은 낙태 경험에 대한 여성들의 인식 조사 결과를 보여준다. “법이 낙태를 금지한다면 원치 않은 출산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84퍼센트의 응답자들이 그래도 원치 않는 출산은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했고, “법이 낙태를 허용한다면 사람들이 좀 더 쉽게 낙태를 할까라는 질문에는 78퍼센트의 응답자들이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했다응답자들은 국가에서 법으로 낙태를 허용하거나 금지하는 것과 무관하게 출산은 개인이 선택할 문제라고 답했다또한 낙태 시술은 여성의 신체에도 유해하고 정신적으로도 아이를 죽였다는 고통을 안겨주는 것을 알면서도 낙태를 감행할 정도면 정말 절박하게 낙태를 해야 했던 것이다여성들이 낙태를 쉽게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필자는 그 동안의 낙태죄 관련 논의에 낙태를 직접 몸으로 체험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것을 지적하고이 글을 통해 그녀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그 밖에도 성희롱성매매여성 채용 할당제 등 여성페미니즘 관련 굵직굵직한 이슈를 다룬 글들이 이 책에 담겨 있지만,동성애혼인에 대한 법적 개입의 딜레마와 가족 이데올로기 해체는 여성뿐만 아니라 성소수자에게까지 눈을 돌린 글이라 흥미롭다억압을 당한 경험이 있는 약자는 다른 약자에게 더 잘 공감할 수 있기에 여성을 넘어 또 다른 약자소수자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 본 것이다필자는 동성애가 배척되어 온 근본적인 원인이 이성애자 남녀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정상적인’ 가족에 대한 집착이라고 보고 있다성소수자들이 이성애자와 다를 것 없는 사회 구성원으로 승인되었지만아직도 동성결혼은 기존의 가족결혼 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것으로 여겨져 소수의 국가들에서만 허용되고 있다자녀를 가지는 것은 허용하지 않지만 두 동성애자의 동반자 관계는 허용하는 파트너십또는 시민결합 형태로 동성결혼은 서서히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과정조차 국가에서 성소수자들의 삶을 통제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배우자로서의 권리를 갖기 위해서는 법적으로 혼인 관계를 인정받을 필요가 있지만성소수자들이 동성결혼을 허락해 달라며 국가에 매달리고이성애자들의 일부일처제를 흉내 내는 건 아닌지 의문을 품는다성소수자들마저 정상적인 가족에 집착해 국가의 울타리 안에 들어오려고 한다는 것이다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정상적인 가족이 해체되고 있는 지금기존의 정상적인 가족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성소수자들을 '정상화'시키고 정상화되어야만 포섭하는 국가의 모순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한다그러나 성소수자들이 동성결혼을 하고 배우자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을 꼭 국가의 품 안에 들어가려는 발버둥이나 이성애자들의 일부일처제 흉내 내기로만 치부해야 할까결혼 자체가 인류에게 뿌리 깊이 이어져 온 하나의 제도이기는 하지만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을 이루고 서로의 배우자로서 떳떳하게 살아가고 싶은 욕망은 이성애자들만의 것은 아니다그러한 욕망도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주입된 것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사랑하는 한 사람하고만 결혼 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성소수자에게 왜 이성애자 흉내를 내고 그래그냥 자유롭게 살아가면 되지.”라고 말하는 것도 이성애자의 또 다른 오만이라고 생각한다동성결혼에 대한 고찰은 흥미로웠지만그 결론에는 공감할 수 없었다.


  그 점에서는 아쉽지만이 책에서는 법 집행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면서 정작 당사자인 약자소수자들의 목소리보다는 엘리트 법조인들의 판단이 더 중요시된다는 점을 계속해서 지적하고 있다이 책에 실린 마지막 논문로여링을 통한 맥락 추론에서는 소수자가 처한 맥락을 추론하면서 변호 업무를 실습하는 교육을 소개하고 있다. ‘로여링lawyering’은 변호사처럼 생각하는 훈련으로 미국의 로스쿨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변호사 실습 교육이다학생들은 의뢰인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의뢰인이 어떤 경험을 했고그 경험이 어떻게 법적 문제가 되었는지그 경험이 의뢰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등 의뢰인이 처한 맥락을 추론한다그 과정에서 법의 합리성이나 중립성이라는 명목으로 가려져 있던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듣는다그리고 사회복지사심리학자 등 다른 분야 종사자들과의 협동을 통해 법률적인 면과 법률 외적인 면 양면으로 의뢰인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이런 제도가 국내에도 도입된다면당사자인 여성이나 다른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법 집행에 반영되기 힘든 현실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앞으로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들의 문제를 법 집행에서 다룰 법조인이나 법 전공 학생들에게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법조인은 아니지만 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은 일반 독자들도 읽어 볼 가치가 있다법학 논문이지만 생각만큼 어렵지는 않고생각보다 이해하기 쉽게 쓰여진 글들도 있다.


  다만 교열 상태가 좋지 않다주술 관계가 맞지 않고 조사가 잘못 쓰인 문장들이 많고오탈자도 많다논문 사이트에서 논문 자체를 그대로 가져오고 다듬지 않은 느낌이다그리고 본문에서 언급하는 날짜들로 보아 2000년대 초반에 쓰여진 논문들도 여러 편 있는데, 10여 년 전 상황을 근거로 이야기하고 있어 시의성이 떨어진다이미 폐지된 호주제와 동성동본 혼인 금지법을 비판하는 논문이 그 대표적인 예다논문을 썼을 당시의 법이 뿌리 깊은 가부장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현재의 법이 그때 이후로 어떻게 변했는지는 보여주지 못한다작년 11월에 출간된 책이라면 지금의 흐름을 좀 더 많이 담고 있어야 했는데논문 선정이 아쉽다이러한 점들이 이 책의 신뢰도를 떨어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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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
장수연 지음 / 어크로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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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 누구의 엄마도 아니다. 지금 나 한 사람의 삶만으로 벅차고, 앞으로 엄마가 될지 되지 않을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렇지만 엄마로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고 싶었다. 우리 엄마부터 엄마가 된 친구들, 선후배들, 지인들, 그리고 내가 공공장소에서 마주치게 될 이름 모를 엄마들까지, 나는 수많은 엄마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네가 애를 안 낳아봐서 모르는 거야."라고 말하는 대신 "엄마로 사는 게 나한테는 이래."라고 말하는 책을 읽고 싶었다. 그래서 읽게 된 책이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다. 이 책은 MBC 라디오 PD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삶을 솔직담백하게 털어놓은 에세이집이다.


  저자는 모성애를 무조건적으로 찬양하지도 않고, 비혼과 비출산을 결심한 사람들에게 아이를 낳고 키우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나는 엄마가 된 게 이렇게 좋은데 너는 이 행복을 모르겠지. 넌 왜 결혼 안 하니? 왜 아이를 안 낳니?"라고 말하는 친구나 친척을 만났을 때의 곤혹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기에, 엄마가 될 생각이 없는 사람들도 이 책을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나는 비혼과 비출산을 선택한 당신을 응원한다. 지지한다. 그 선택에 따르는 행복을 충만하게 누리길 기원한다. ... 결혼이 사랑의 완성이 아니듯 아이는 행복의 증명이 아니며, 당신이 선택에 따르는 무게를 감당하는 딱 그만큼 나 역시 내 선택의 대가를 치르며 살고 있다. 내가 '아이를 낳아 기르는 행복'을 늘어놓듯이, 비혼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 역시 그만의 행복을 나열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내 글이 '결혼과 출산이 정상적인 삶'이라는 사회적 편견을 공고화하는 데 일조하기를 결코 바라지 않는다. 

  결혼과 육아가 부담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행복보다 아이를 낳고 키우기로 한 선택의 대가가 더 와 닿을 수밖에 없다. 한 번도 임신하고 아이를 낳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태동을 처음 느꼈을 때, 첫째가 갓 태어난 동생을 처음 바라보는 모습을 지켜볼 때의 뭉클함에 공감하기는 어렵다. 아이가 없고 고양이를 키우는 나로서는 아이의 몸짓 하나 하나가 신기하고 사랑스럽다는 이야기에 내 고양이를 대입해 짐작해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이와 사람 대 사람으로 소통하면서 느끼는 감동은 고양이와는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반면 나 혼자 살아가기도 빠듯한 경제적 상황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막막해지고, 공공장소에서 도무지 통제가 안 되는 아이들을 마주치면 저 아이들을 집에서 키우는 것은 얼마나 어려울지 두려워진다.


  아이를 키우면서 생기는 문제들은 다양하다. 아이가 말을 듣지 않고, 아이에게 먹일 돈까스를 튀기다 기름이 튀어 화상을 입는 것 같은 사소하고 사적인 문제들이 있다. 다른 한편 아빠와 엄마의 육아와 가사 배분이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문제, 노동 시간은 긴데 정부에서는 보조금만 지원해 주니 아이와 지낼 시간이 부족해지는 문제처럼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도 있다. 저자는 사적인 문제들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면서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는 분노한다. 사회과학 서적이 아니니 문제의 근원을 파헤치거나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친밀감과 연대감을 느끼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부모가 아닌 사람들은 부모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충을 헤아려보고 그 고충을 자아낸 원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부모로서가 아닌 사람으로서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들 중에서도 공감되는 것들이 있다. 마침 회의에서 바보 같은 소리만 하다 나온 것 같았을 때, 회의가 성공적으로 끝났어도 나 자신이 기여한 건 없는 것 같아서 좌절감을 느낀다는 구절을 읽었다. 나는 왜 이렇게 멍청한 건가 싶어 자책하다 나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게 위로가 됐다. 좀 더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것은 먹는 것과 같고 그 감상을 글로 쓰는 것은 똥을 싸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에도 공감했다. 많이 읽고 보기만 했지 아무 것도 쓰지 않으면 뭔가 묵은 것이 내 안에 쌓인 것 같다. 저자가 말하는 '글 마렵다'는 감각이 어떤 것인지 안다. 머릿속에 묵혀 뒀던 글을 마침내 썼을 때의 후련함도. 또한 요즘 같이 다양한 의견이 쏟아져 나오고, 그만큼 생각지 못한 곳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때에 글을 쓰는 사람의 두려움도 공감한다. 페미니즘 관련 도서의 서평을 썼다가 정말로 악플이 달리고 나서부터는 더 두려워졌다. 하지만 누구도 불편하게 하지 않는 글이 과연 좋은 글일까? 그런 글을 쓰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글을 쓰는 것의 목표는 욕을 먹지 않는 게 아니다, 글을 쓰면서 욕을 먹을까에 신경 쓰는 것, 실수할까 걱정하느라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이 책의 이야기에 용기를 얻었다.


  이 책은 육아 문제를 심도 있게 분석하는 책도 아니고, 육아의 꿀팁을 제시해 주는 책도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자 엄마로서 살아가는 삶을 털어놓은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아이가 없는 나는 아이가 있는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마음을 헤아려본다. 이 책이 모든 엄마들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와 다른 사람,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한 타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내가 몰랐던 세상 한 귀퉁이를 보게 되고, 세상을 점점 더 많이 알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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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60년을 연애했습니다
라오 핑루 글.그림, 남혜선 옮김 / 윌북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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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결혼을 할지 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오래도록 서로 사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저렇게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평범한 중국의 노부부 라오핑루 할아버지와 메이탕 할머니의 이야기도 그런 이야기 중 하나다. 60년을 함께한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반 년 동안이나 라오핑루 노인은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죽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림으로 그려두면 그 속에는 아내가 살아 있을 수 있다 여겼다. 그림을 정식으로 배워본 적은 없지만 정이 마음을 움직이니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아내와 함께한 60여 년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니 18권이나 되는 화첩이 되었다. 그 화첩을 책으로 정리한 것이 이 책 『우리는 60년을 연애했습니다』다.


(위) 젊은 시절의 라오핑루와 메이탕 (아래) 노년의 라오핑루와 메이탕


둘의 시작은 소설이나 영화처럼 낭만적이거나 운명적이지 않았다. 둘은 집안에서 맺어준 사이였다. 그러나 둘은 서로를 마음에 들어했고, 정혼하자마자 60여 년간의 긴 연애를 시작했다.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둘의 삶도 평탄했겠지만 험난한 역사 때문에 둘은 고된 세월을 함께 견뎌내야 했다. 핑루는 젊은 시절 조국을 침략한 일본군에 맞서 싸웠지만, 국민당 출신 부대에 소속되어 싸웠다는 것이 두고두고 그의 발목을 잡았다. 항일 전쟁이 끝난 뒤 국민당과 공산당은 중국을 어떻게 이끌어나갈 것인지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고, 결국에는 내전까지 벌이게 되었다. 국민당이 패배해 대만으로 쫓겨나면서 함께 국민당 소속 부대에서 싸웠던 전우들도 대만으로 떠났지만, 핑루는 중국에 남아 있었다. 결국 핑루는 노동 개조(공산당에 반대하는 세력이나 그런 세력으로 의심받는 사람은 강제 노동과 세뇌 교육을 받아야 했다.) 대상이 되어 1958년부터 22년 동안이나 가족들과 떨어져 살며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 1년에 한 번만 집에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다. 직장에서는 남편과 이혼하라고 했지만, 아내는 남편의 결백함을 믿는다고 단호하게 말하며 끝까지 남편과 헤어지지 않았다. 1979년에 노동 개조 처분이 철회되면서 핑루는 마침내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신혼 시절 함께 누워 달을 바라보며 월병을 먹었던 기억을 글과 그림으로 남겼다.

이미지 출처: http://www.visualdive.com


험난한 인생사이니만큼 이야기를 더 극적으로 쓸 수 있었을 텐데도, 핑루 할아버지는 일기를 쓰듯 담담하게 인생사를 기록한다. 로맨틱한 사랑의 말도, 애절한 이별의 순간도, 감동적인 재회의 순간도 없다. 소소한 일상들만이 그림 일기를 채우고 있다. 연애 시절 호수 공원을 함께 거닐며 이야기하고, 신혼 시절 함께 침대에 누워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을 받으며 월병을 나누어 먹었던 기억 같은 행복한 일상부터 서로 떨어져 지내던 시절의 가난하고 고단했던 일상들까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살면서 겪은 수많은 소소한 일들이 무슨 특별한 연유도 없이 마음 깊은 곳에 흔적으로 남아, 오랜 세월을 거치며 소중히 기억되곤 합니다." 소중히 기억하고 있는 그 모든 순간이 사랑이었다.


눈이 나빠서 일어났던 일들을 가지고 서로 놀리는 핑루와 메이탕


핑루는 메이탕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그는 원래 눈이 좋았는데도 근시인 메이탕에게 맞춰 늘 영화관 앞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다 근시가 되고 말았다. 메이탕은 논에 심은 모와 부추를 구별하지 못했고, 핑루는 배추와 양배추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눈이 나빠졌다. 그런데도 핑루는 드디어 메이탕에게 보조를 맞출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메이탕이 "당신은 어째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수!"라고 타박을 놓아도 핑루는 허허 웃기만 했고, 화를 내도 오히려 얼마나 힘들었으면 화를 내겠냐고 가엽게 여겼다. 부록으로 실린 메이탕의 편지들에서는 반대로 메이탕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사랑한다거나 보고 싶다, 그립다는 말은 없지만 자신과 아이들은 괜찮으니 당신 몸부터 챙기라는 말은 편지마다 빼놓지 않는다. 남편 없이 다섯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버거웠을 텐데도 남편부터 먼저 걱정하는 것이 메이탕의 사랑이었다.


2008년 메이탕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둘은 영영 이별하게 된다.

이미지 출처: http://www.visualdive.com


핑루가 돌아온 1979년부터 메이탕이 세상을 떠난 2008년까지 두 사람은 29년 동안 함께 지냈다. 그러나 고된 노동과 가난으로 둘은 건강이 많이 상해 있었고, 나이가 들면서 건강은 점점 더 악화됐다. 둘이 번갈아 큰 병치레를 하느라 둘은 번갈아서 서로를 간호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함께 지낸 29년 중에서도 두 사람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지낸 시간이 짧았던 것이 핑루에게는 큰 한으로 남았다. 그렇게 함께한 시간이 길었는데도 아쉬워하는 사랑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바다는 깊지 않네.

한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바다보다 깊다네.

핑루와 메이탕의 이야기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사랑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의 깊이는 감히 헤아릴 수 없다. 일기장처럼 담담한 글과 소박한 그림에 담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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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의 비밀 - 아시아 베스트 컬렉션 아시아 문학선 15
바오 닌 외 지음, 구수정 외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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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알게 되는 경로는 참 다양하다. 이웃 블로거 분이 작년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되었던 <만토>라는 영화 이야기를 했었다. <만토>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작가인 사다트 하산 만토Saadat Hassan Manto, 1912-1955라는 인물의 삶을 그린 영화인데, 그의 작품 중 단편소설 「모젤」이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소설이 담긴 단편집 『물결의 비밀』을 언급했다. 인터넷에서 좀 더 정보를 찾아보니, 『물결의 비밀』 은 사다트 하산 만토뿐만 아니라 아시아 여러 국가의 작가들이 쓴 단편들을 모은 책이었다. 일본과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지역의 문학은 접하기 어렵기 때문에 다른 작가들의 단편도 모두 읽고 싶어졌다. 「모젤」 덕분에 나머지 열한 편의 단편도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책을 만나게 한 단편 「모젤」은 인도에서 일어나는 종교 간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인도는 1947년 힌두교를 믿는 인도와 이슬람교를 믿는 파키스탄으로 분리되었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학살, 폭행, 강간을 저지르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이후로도 종교 간의 갈등으로 인한 폭력사태와 학살은 인도에서 계속되어 왔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직접 보고 듣고 겪은 작가는 종교 간의 갈등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문제도 작품에서 다루었다고 한다. 이 작품도 그러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주인공 티얼로천은 무슬림들이 폭력 사태를 일으키고 있는 동네에서 사는 약혼녀 키르팔을 걱정한다. 시크교도인 키르팔은 언제라도 무슬림의 희생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티얼로천이 고민만 하고 있을 때 티얼로천의 전 연인 모젤은 키르팔을 구하러 나선다. 종교 간의 갈등이 폭력을 낳는 상황에서 소수자인 유대인인데도 주눅들지 않고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행동하는 모젤의 용기가 빛난다.(그런데 모젤만 티얼로천에게 존대를 하고 티얼로천은 모젤에게 반말을 하는 것으로 번역된 것이 아쉬웠다. 둘은 동등한 연인 관계이고, 모젤은 당당한 여자인데. 그래서 머릿속으로는 모젤이 반말을 하는 것으로 바꿔 읽었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지만 약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위험을 무릅쓰는 모젤은, 만토가 활동했던 시기 인도 여성들의 위치를 생각해 볼 때 파격적인 여성 캐릭터다. 만토는 이 작품 외에도 파격적인 작품들로 논란을 몰고 다녔다는데 그의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졌다.

또 다른 인도 작가 마하스웨타 데비의 단편 「곡쟁이」는 인도의 밑바닥 인생들을 그린 블랙코미디다. 주인공 사니차리는 남편이 죽었을 때도, 아들이 죽었을 때도 울지 않았다. 그러나 장례식에 가서 곡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게 되자, 생판 모르는 남을 위해 친가족보다 서럽게 통곡한다.

"슬퍼서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독한 재난을 당한 뒤에도 사람들은 차츰 목욕을 하고 밥을 먹고, 마당에서 고추를 물어뜯고 있는 염소를 쫓아낸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먹지 못하면 죽는다. (...) 사니차리는 슬픔에 넋을 잃었지만 울지는 않을 것이다. 돈, 쌀, 새 옷, 이런 것들을 대가로 얻지 않는다면, 눈물은 쓸모없는 사치다."

사니차리는 낮은 카스트의 가난한 하층민이고, 의지할 가족 한 명 없는 과부다. 살기 위해서는 눈물이나 감정조차 상품으로 팔 수밖에 없다. 사니차리의 눈물을 사는 부자, 고위층들은 정작 가족이 살아 있을 때는 병상에 방치해 두면서 죽고 난 뒤에는 성대한 장례식을 치룬다. 순전히 체면치레 때문에. 진심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을 곡쟁이들의 통곡도 장례식을 빛내는 수단으로 여기고 기꺼이 돈을 내어준다. 이렇게 비정한 현실을 입담 좋게 풀어내 읽는 재미가 있지만, 읽고 나면 씁쓸함이 남는다.

읽는 재미로는 이 단편집에 실린 단편들 중 「곡쟁이」와 투 톱을 이루는 작품이 중국 작가 츠쯔젠의 소설 「돼지기름 한 항아리」이다. 주인공은 세 아이를 둔 엄마이고, 남편은 헤이룽장성의 임업 작업장에서 일하느라 주인공과 아이들과 떨어져서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관리소에서 가족들과 살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며, 살고 있던 집을 팔고 아이들을 데리고 오라고 편지를 보낸다. 주인공은 집을 판 돈으로 산 돼지기름 한 항아리와 세 아이를 데리고 남편에게 간다. 무거운 돼지기름 항아리와 세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이끌고 가는 여정이나, 이사 간 임업 작업소에서의 삶이나 만만치 않지만 그 안에 따뜻한 정과 나름대로의 행복이 있다. 단편이다 보니 몇 문장만에 수 년, 수십 년이 훅훅 지나는 게 아쉬웠다. 살을 좀 더 붙여 장편으로 만들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 글에서는 가장 마지막으로 이야기하지만, 가장 먼저 독자들을 맞는 작품은 표제작 「물결의 비밀」이다. 베트남 작가 바오 닌이 쓴 이 작품은, 베트남 전쟁 당시 어느 마을의 어느 강이 품고 있는 비극을 이야기한다. 모든 비극을 보고도 묵묵히 흐르는 강물처럼, 주인공도 자신만이 알고 있는 슬픈 비밀을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 전체 분량은 4페이지밖에 안 되지만, 작품이 남기는 여운은 그보다 수십, 수백 배 길다.

표제작처럼 다른 작품들도 아시아 곳곳의 물결들이 품고 있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어떤 부분은 우리와 닮아서 공감하게 되고, 어떤 부분은 우리와 달라서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의 모습들을 보게 된다. 편집 후기에서 미처 다 담지 못해 아쉽다고 했던 단편들도, 이 단편집에 실린 작품을 쓴 작가들의 다른 작품들도 이어서 만나고 싶다. 우리가 만나지 못한 이야기들이 너무나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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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의 비밀 - 아시아 베스트 컬렉션 아시아 문학선 15
바오 닌 외 지음, 구수정 외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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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물결이 품은 수많은 이야기들. 우리와 달라서 흥미로운 데도 있고, 우리와 다르지 않아서 공감하게 되는 데도 있다. 이야기의 재미로는 <곡쟁이>와 <돼지기름 한 동이>가 베스트. 표제작 <물결의 비밀>은 단 4페이지만으로도 몇 배의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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