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법이론의 전개 법철학연구 총서 5
윤진숙 엮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1994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었고이 사건을 계기로, 1999년 제정된 남녀차별 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에 성희롱을 불법행위이자 성차별로 명시하게 되었다남성 가장인 호주(戶主)를 중심으로 호적을 정리하는 제도인 호주제는 가부장적인 가족 제도의 잔재로 양성평등에 어긋나기에 2003년 위헌 판결이 내려졌고, 2008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그리고 2017년 10, 23만 여 명의 시민들이 낙태죄 폐지 청원에 참여했고 올해 4월 11일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 위헌 여부를 선고할 예정이다이렇게 우리 법은 여성의 자유와 평등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갔다이런 흐름을 따라 여성 문제페미니즘과 관련된 법학 논문들도 계속해서 나왔고이 책은 그 중 16개의 논문을 뽑아 엮은 것이다.

 

  낙태죄 위헌 여부 선고를 몇 달 앞둔 지금가장 먼저 눈이 가는 글은낙태죄 헌법소원과 여성의 목소리낙태는 1953년 형법 초안에서부터 죄로 규정되었고임신이 임산부 자신의 건강에 위해가 되거나 성폭행이나 근친상간으로 인한 임신처럼 윤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임신일 경우에만 임신중절 수술을 허용했다이미 7년 전인 2012년에 낙태죄에 대해 헌법소원이 제기되었지만헌법재판소에서는 낙태죄 조항이 임산부의 자기결정권을 지나치게 침해한다고 보기 어려우며이 조항으로 제한되는 사익(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조항으로 보호되는 공익(태아의 생명)에 비해 중요한다고 볼 수 없다낙태죄 조항이 헌법에 어긋나지 않다고 선고했다그러나 낙태죄가 처음 규정된 이후로 수십 년 동안 태아의 생명은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고 여겨졌지만태아를 직접 몸 안에 품고 낳고 양육하는 여성들의 권리는 그보다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낙태죄 조항의 역사를 훑어본 뒤이 글은 낙태 경험에 대한 여성들의 인식 조사 결과를 보여준다. “법이 낙태를 금지한다면 원치 않은 출산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84퍼센트의 응답자들이 그래도 원치 않는 출산은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했고, “법이 낙태를 허용한다면 사람들이 좀 더 쉽게 낙태를 할까라는 질문에는 78퍼센트의 응답자들이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했다응답자들은 국가에서 법으로 낙태를 허용하거나 금지하는 것과 무관하게 출산은 개인이 선택할 문제라고 답했다또한 낙태 시술은 여성의 신체에도 유해하고 정신적으로도 아이를 죽였다는 고통을 안겨주는 것을 알면서도 낙태를 감행할 정도면 정말 절박하게 낙태를 해야 했던 것이다여성들이 낙태를 쉽게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필자는 그 동안의 낙태죄 관련 논의에 낙태를 직접 몸으로 체험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것을 지적하고이 글을 통해 그녀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그 밖에도 성희롱성매매여성 채용 할당제 등 여성페미니즘 관련 굵직굵직한 이슈를 다룬 글들이 이 책에 담겨 있지만,동성애혼인에 대한 법적 개입의 딜레마와 가족 이데올로기 해체는 여성뿐만 아니라 성소수자에게까지 눈을 돌린 글이라 흥미롭다억압을 당한 경험이 있는 약자는 다른 약자에게 더 잘 공감할 수 있기에 여성을 넘어 또 다른 약자소수자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 본 것이다필자는 동성애가 배척되어 온 근본적인 원인이 이성애자 남녀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정상적인’ 가족에 대한 집착이라고 보고 있다성소수자들이 이성애자와 다를 것 없는 사회 구성원으로 승인되었지만아직도 동성결혼은 기존의 가족결혼 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것으로 여겨져 소수의 국가들에서만 허용되고 있다자녀를 가지는 것은 허용하지 않지만 두 동성애자의 동반자 관계는 허용하는 파트너십또는 시민결합 형태로 동성결혼은 서서히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과정조차 국가에서 성소수자들의 삶을 통제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배우자로서의 권리를 갖기 위해서는 법적으로 혼인 관계를 인정받을 필요가 있지만성소수자들이 동성결혼을 허락해 달라며 국가에 매달리고이성애자들의 일부일처제를 흉내 내는 건 아닌지 의문을 품는다성소수자들마저 정상적인 가족에 집착해 국가의 울타리 안에 들어오려고 한다는 것이다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정상적인 가족이 해체되고 있는 지금기존의 정상적인 가족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성소수자들을 '정상화'시키고 정상화되어야만 포섭하는 국가의 모순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한다그러나 성소수자들이 동성결혼을 하고 배우자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을 꼭 국가의 품 안에 들어가려는 발버둥이나 이성애자들의 일부일처제 흉내 내기로만 치부해야 할까결혼 자체가 인류에게 뿌리 깊이 이어져 온 하나의 제도이기는 하지만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을 이루고 서로의 배우자로서 떳떳하게 살아가고 싶은 욕망은 이성애자들만의 것은 아니다그러한 욕망도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주입된 것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사랑하는 한 사람하고만 결혼 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성소수자에게 왜 이성애자 흉내를 내고 그래그냥 자유롭게 살아가면 되지.”라고 말하는 것도 이성애자의 또 다른 오만이라고 생각한다동성결혼에 대한 고찰은 흥미로웠지만그 결론에는 공감할 수 없었다.


  그 점에서는 아쉽지만이 책에서는 법 집행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면서 정작 당사자인 약자소수자들의 목소리보다는 엘리트 법조인들의 판단이 더 중요시된다는 점을 계속해서 지적하고 있다이 책에 실린 마지막 논문로여링을 통한 맥락 추론에서는 소수자가 처한 맥락을 추론하면서 변호 업무를 실습하는 교육을 소개하고 있다. ‘로여링lawyering’은 변호사처럼 생각하는 훈련으로 미국의 로스쿨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변호사 실습 교육이다학생들은 의뢰인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의뢰인이 어떤 경험을 했고그 경험이 어떻게 법적 문제가 되었는지그 경험이 의뢰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등 의뢰인이 처한 맥락을 추론한다그 과정에서 법의 합리성이나 중립성이라는 명목으로 가려져 있던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듣는다그리고 사회복지사심리학자 등 다른 분야 종사자들과의 협동을 통해 법률적인 면과 법률 외적인 면 양면으로 의뢰인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이런 제도가 국내에도 도입된다면당사자인 여성이나 다른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법 집행에 반영되기 힘든 현실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앞으로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들의 문제를 법 집행에서 다룰 법조인이나 법 전공 학생들에게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법조인은 아니지만 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은 일반 독자들도 읽어 볼 가치가 있다법학 논문이지만 생각만큼 어렵지는 않고생각보다 이해하기 쉽게 쓰여진 글들도 있다.


  다만 교열 상태가 좋지 않다주술 관계가 맞지 않고 조사가 잘못 쓰인 문장들이 많고오탈자도 많다논문 사이트에서 논문 자체를 그대로 가져오고 다듬지 않은 느낌이다그리고 본문에서 언급하는 날짜들로 보아 2000년대 초반에 쓰여진 논문들도 여러 편 있는데, 10여 년 전 상황을 근거로 이야기하고 있어 시의성이 떨어진다이미 폐지된 호주제와 동성동본 혼인 금지법을 비판하는 논문이 그 대표적인 예다논문을 썼을 당시의 법이 뿌리 깊은 가부장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현재의 법이 그때 이후로 어떻게 변했는지는 보여주지 못한다작년 11월에 출간된 책이라면 지금의 흐름을 좀 더 많이 담고 있어야 했는데논문 선정이 아쉽다이러한 점들이 이 책의 신뢰도를 떨어뜨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