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결의 비밀 - 아시아 베스트 컬렉션 아시아 문학선 15
바오 닌 외 지음, 구수정 외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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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알게 되는 경로는 참 다양하다. 이웃 블로거 분이 작년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되었던 <만토>라는 영화 이야기를 했었다. <만토>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작가인 사다트 하산 만토Saadat Hassan Manto, 1912-1955라는 인물의 삶을 그린 영화인데, 그의 작품 중 단편소설 「모젤」이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소설이 담긴 단편집 『물결의 비밀』을 언급했다. 인터넷에서 좀 더 정보를 찾아보니, 『물결의 비밀』 은 사다트 하산 만토뿐만 아니라 아시아 여러 국가의 작가들이 쓴 단편들을 모은 책이었다. 일본과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지역의 문학은 접하기 어렵기 때문에 다른 작가들의 단편도 모두 읽고 싶어졌다. 「모젤」 덕분에 나머지 열한 편의 단편도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책을 만나게 한 단편 「모젤」은 인도에서 일어나는 종교 간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인도는 1947년 힌두교를 믿는 인도와 이슬람교를 믿는 파키스탄으로 분리되었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학살, 폭행, 강간을 저지르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이후로도 종교 간의 갈등으로 인한 폭력사태와 학살은 인도에서 계속되어 왔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직접 보고 듣고 겪은 작가는 종교 간의 갈등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문제도 작품에서 다루었다고 한다. 이 작품도 그러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주인공 티얼로천은 무슬림들이 폭력 사태를 일으키고 있는 동네에서 사는 약혼녀 키르팔을 걱정한다. 시크교도인 키르팔은 언제라도 무슬림의 희생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티얼로천이 고민만 하고 있을 때 티얼로천의 전 연인 모젤은 키르팔을 구하러 나선다. 종교 간의 갈등이 폭력을 낳는 상황에서 소수자인 유대인인데도 주눅들지 않고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행동하는 모젤의 용기가 빛난다.(그런데 모젤만 티얼로천에게 존대를 하고 티얼로천은 모젤에게 반말을 하는 것으로 번역된 것이 아쉬웠다. 둘은 동등한 연인 관계이고, 모젤은 당당한 여자인데. 그래서 머릿속으로는 모젤이 반말을 하는 것으로 바꿔 읽었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지만 약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위험을 무릅쓰는 모젤은, 만토가 활동했던 시기 인도 여성들의 위치를 생각해 볼 때 파격적인 여성 캐릭터다. 만토는 이 작품 외에도 파격적인 작품들로 논란을 몰고 다녔다는데 그의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졌다.

또 다른 인도 작가 마하스웨타 데비의 단편 「곡쟁이」는 인도의 밑바닥 인생들을 그린 블랙코미디다. 주인공 사니차리는 남편이 죽었을 때도, 아들이 죽었을 때도 울지 않았다. 그러나 장례식에 가서 곡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게 되자, 생판 모르는 남을 위해 친가족보다 서럽게 통곡한다.

"슬퍼서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독한 재난을 당한 뒤에도 사람들은 차츰 목욕을 하고 밥을 먹고, 마당에서 고추를 물어뜯고 있는 염소를 쫓아낸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먹지 못하면 죽는다. (...) 사니차리는 슬픔에 넋을 잃었지만 울지는 않을 것이다. 돈, 쌀, 새 옷, 이런 것들을 대가로 얻지 않는다면, 눈물은 쓸모없는 사치다."

사니차리는 낮은 카스트의 가난한 하층민이고, 의지할 가족 한 명 없는 과부다. 살기 위해서는 눈물이나 감정조차 상품으로 팔 수밖에 없다. 사니차리의 눈물을 사는 부자, 고위층들은 정작 가족이 살아 있을 때는 병상에 방치해 두면서 죽고 난 뒤에는 성대한 장례식을 치룬다. 순전히 체면치레 때문에. 진심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을 곡쟁이들의 통곡도 장례식을 빛내는 수단으로 여기고 기꺼이 돈을 내어준다. 이렇게 비정한 현실을 입담 좋게 풀어내 읽는 재미가 있지만, 읽고 나면 씁쓸함이 남는다.

읽는 재미로는 이 단편집에 실린 단편들 중 「곡쟁이」와 투 톱을 이루는 작품이 중국 작가 츠쯔젠의 소설 「돼지기름 한 항아리」이다. 주인공은 세 아이를 둔 엄마이고, 남편은 헤이룽장성의 임업 작업장에서 일하느라 주인공과 아이들과 떨어져서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관리소에서 가족들과 살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며, 살고 있던 집을 팔고 아이들을 데리고 오라고 편지를 보낸다. 주인공은 집을 판 돈으로 산 돼지기름 한 항아리와 세 아이를 데리고 남편에게 간다. 무거운 돼지기름 항아리와 세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이끌고 가는 여정이나, 이사 간 임업 작업소에서의 삶이나 만만치 않지만 그 안에 따뜻한 정과 나름대로의 행복이 있다. 단편이다 보니 몇 문장만에 수 년, 수십 년이 훅훅 지나는 게 아쉬웠다. 살을 좀 더 붙여 장편으로 만들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 글에서는 가장 마지막으로 이야기하지만, 가장 먼저 독자들을 맞는 작품은 표제작 「물결의 비밀」이다. 베트남 작가 바오 닌이 쓴 이 작품은, 베트남 전쟁 당시 어느 마을의 어느 강이 품고 있는 비극을 이야기한다. 모든 비극을 보고도 묵묵히 흐르는 강물처럼, 주인공도 자신만이 알고 있는 슬픈 비밀을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 전체 분량은 4페이지밖에 안 되지만, 작품이 남기는 여운은 그보다 수십, 수백 배 길다.

표제작처럼 다른 작품들도 아시아 곳곳의 물결들이 품고 있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어떤 부분은 우리와 닮아서 공감하게 되고, 어떤 부분은 우리와 달라서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의 모습들을 보게 된다. 편집 후기에서 미처 다 담지 못해 아쉽다고 했던 단편들도, 이 단편집에 실린 작품을 쓴 작가들의 다른 작품들도 이어서 만나고 싶다. 우리가 만나지 못한 이야기들이 너무나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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