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60년을 연애했습니다
라오 핑루 글.그림, 남혜선 옮김 / 윌북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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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결혼을 할지 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오래도록 서로 사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저렇게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평범한 중국의 노부부 라오핑루 할아버지와 메이탕 할머니의 이야기도 그런 이야기 중 하나다. 60년을 함께한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반 년 동안이나 라오핑루 노인은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죽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림으로 그려두면 그 속에는 아내가 살아 있을 수 있다 여겼다. 그림을 정식으로 배워본 적은 없지만 정이 마음을 움직이니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아내와 함께한 60여 년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니 18권이나 되는 화첩이 되었다. 그 화첩을 책으로 정리한 것이 이 책 『우리는 60년을 연애했습니다』다.


(위) 젊은 시절의 라오핑루와 메이탕 (아래) 노년의 라오핑루와 메이탕


둘의 시작은 소설이나 영화처럼 낭만적이거나 운명적이지 않았다. 둘은 집안에서 맺어준 사이였다. 그러나 둘은 서로를 마음에 들어했고, 정혼하자마자 60여 년간의 긴 연애를 시작했다.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둘의 삶도 평탄했겠지만 험난한 역사 때문에 둘은 고된 세월을 함께 견뎌내야 했다. 핑루는 젊은 시절 조국을 침략한 일본군에 맞서 싸웠지만, 국민당 출신 부대에 소속되어 싸웠다는 것이 두고두고 그의 발목을 잡았다. 항일 전쟁이 끝난 뒤 국민당과 공산당은 중국을 어떻게 이끌어나갈 것인지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고, 결국에는 내전까지 벌이게 되었다. 국민당이 패배해 대만으로 쫓겨나면서 함께 국민당 소속 부대에서 싸웠던 전우들도 대만으로 떠났지만, 핑루는 중국에 남아 있었다. 결국 핑루는 노동 개조(공산당에 반대하는 세력이나 그런 세력으로 의심받는 사람은 강제 노동과 세뇌 교육을 받아야 했다.) 대상이 되어 1958년부터 22년 동안이나 가족들과 떨어져 살며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 1년에 한 번만 집에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다. 직장에서는 남편과 이혼하라고 했지만, 아내는 남편의 결백함을 믿는다고 단호하게 말하며 끝까지 남편과 헤어지지 않았다. 1979년에 노동 개조 처분이 철회되면서 핑루는 마침내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신혼 시절 함께 누워 달을 바라보며 월병을 먹었던 기억을 글과 그림으로 남겼다.

이미지 출처: http://www.visualdive.com


험난한 인생사이니만큼 이야기를 더 극적으로 쓸 수 있었을 텐데도, 핑루 할아버지는 일기를 쓰듯 담담하게 인생사를 기록한다. 로맨틱한 사랑의 말도, 애절한 이별의 순간도, 감동적인 재회의 순간도 없다. 소소한 일상들만이 그림 일기를 채우고 있다. 연애 시절 호수 공원을 함께 거닐며 이야기하고, 신혼 시절 함께 침대에 누워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을 받으며 월병을 나누어 먹었던 기억 같은 행복한 일상부터 서로 떨어져 지내던 시절의 가난하고 고단했던 일상들까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살면서 겪은 수많은 소소한 일들이 무슨 특별한 연유도 없이 마음 깊은 곳에 흔적으로 남아, 오랜 세월을 거치며 소중히 기억되곤 합니다." 소중히 기억하고 있는 그 모든 순간이 사랑이었다.


눈이 나빠서 일어났던 일들을 가지고 서로 놀리는 핑루와 메이탕


핑루는 메이탕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그는 원래 눈이 좋았는데도 근시인 메이탕에게 맞춰 늘 영화관 앞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다 근시가 되고 말았다. 메이탕은 논에 심은 모와 부추를 구별하지 못했고, 핑루는 배추와 양배추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눈이 나빠졌다. 그런데도 핑루는 드디어 메이탕에게 보조를 맞출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메이탕이 "당신은 어째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수!"라고 타박을 놓아도 핑루는 허허 웃기만 했고, 화를 내도 오히려 얼마나 힘들었으면 화를 내겠냐고 가엽게 여겼다. 부록으로 실린 메이탕의 편지들에서는 반대로 메이탕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사랑한다거나 보고 싶다, 그립다는 말은 없지만 자신과 아이들은 괜찮으니 당신 몸부터 챙기라는 말은 편지마다 빼놓지 않는다. 남편 없이 다섯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버거웠을 텐데도 남편부터 먼저 걱정하는 것이 메이탕의 사랑이었다.


2008년 메이탕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둘은 영영 이별하게 된다.

이미지 출처: http://www.visualdive.com


핑루가 돌아온 1979년부터 메이탕이 세상을 떠난 2008년까지 두 사람은 29년 동안 함께 지냈다. 그러나 고된 노동과 가난으로 둘은 건강이 많이 상해 있었고, 나이가 들면서 건강은 점점 더 악화됐다. 둘이 번갈아 큰 병치레를 하느라 둘은 번갈아서 서로를 간호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함께 지낸 29년 중에서도 두 사람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지낸 시간이 짧았던 것이 핑루에게는 큰 한으로 남았다. 그렇게 함께한 시간이 길었는데도 아쉬워하는 사랑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바다는 깊지 않네.

한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바다보다 깊다네.

핑루와 메이탕의 이야기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사랑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의 깊이는 감히 헤아릴 수 없다. 일기장처럼 담담한 글과 소박한 그림에 담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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