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페르시아어 수업
마리암 마지디 지음, 김도연.이선화 옮김 / 달콤한책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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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서울과 인천에서 보냈고, 평생 동안 표준 한국어로 말하고 쓰면서 살아왔다. 두 개의 언어를 병행해서 써야 했을 때는 해외여행을 갔을 때뿐이었고, 그 여행에서도 대부분의 시간은 일행과 한국어로 이야기하면서 보냈다. 그러니 혼혈이라든가, 이민을 갔다든가 해서 두 언어, 두 나라, 두 문화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사람들의 마음은 책이나 방송을 통해 간접 경험할 수밖에 없다.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은 두 개의 언어와 문화 사이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게 해주는 책이다. 


 이 책은 이란계 작가가 이란과 프랑스, 페르시아어와 프랑스어 사이에서 혼란을 겪다 모국어인 페르시아어를 버리지만, 성장해서는 자신의 뿌리인 페르시아어, 이란과 화해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기승전결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기보다는,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과 상념들을 털어놓고 있기 때문에 소설이라기보다는 환상적인 요소들이 섞인 에세이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찾아간다는 큰 이야기 줄기 아래 있지만, 이란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프랑스에서 보낸 소녀 시절, 성인이 되어 이란에 돌아왔을 때의 이야기가 시간의 순서와는 상관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더욱 혼란스럽다. 게다가 시와 산문, 현실과 환상, 비유와 상징이 뒤섞여 있어,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인 모국어 찾기 이야기를 기대했던 사람들로서는 당황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머릿속을 들여다 본다고 생각하고 그 안의 상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작가의 부모님이 어린 딸(작가)을 데리고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정치적 억압이었다. 1979년 부패한 팔레비 왕조를 몰아낸 이슬람 근본주의 정권은 서슬 퍼런 독재 정치를 펼치기 시작했다. 작가의 어머니는 임신한 몸으로 대학교 학우들과 시위를 하다 학생들이 경찰들에게 무참하게 살해되는 것을 목격하고, 자신도 경찰에게 쫓기다 3층에서 뛰어내려 유산할 뻔했다. 작가의 생일날마다 꽃을 선물하던 다정한 외삼촌은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전단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로 8년 동안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어야 했다. 이런 정치적 억압은 우리에게도 낯선 것이 아니다. 


 고국을 떠나 망명한 프랑스도 작가 가족에게 마냥 따뜻한 곳은 아니었다. 같이 놀아주지 않는 학교 아이들에게 말도 못 붙이고 외로워하던 작가는 프랑스에 적응하기 위해 모국어인 페르시아어를 버린다. 부모님이 집에서는 페르시아어를 쓰라고 해서 여전히 페르시아어로 말할 수는 있지만, 페르시아어보다는 프랑스어로 읽고 쓰는 것이 더 편해져 버렸다. 그렇게 수십 년 동안 프랑스어를 사용하면서, 처음에는 낯설기만 했던 크루아상이 고향 음식으로 느껴질 정도로 프랑스가 또 하나의 고국이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민자라는 이유로 작가가 '진짜' 프랑스인이 아니라고 한다. 두 개의 언어와 문화를 누릴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는 이야기는, 평생 두 언어, 두 문화 사이에서 헤매면서 살아온 작가에게 속 편한 소리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다시 이란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21세기가 되어서도 종교 경찰들이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게 옷을 입었는지, 정숙하지 못하게 외간 남자와 함께 있는지 감시하고 있는 곳이니까. 누구보다 손녀가 보고 싶었을 외할머니조차, 작가가 이란에 남겠다고 하자 만류할 정도다. 수십 년을 살았어도 온전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프랑스와, 민소매 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탈 자유도 없는 이란. 어느 곳도 작가를 온전히 받아주지도, 이해해 주지도 않는다. 책에 실린 온갖 기억과 상념의 파편들은 두 개의 정체성 사이에서 분열돼서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갈 수 없었던 작가의 혼란스러움을 보여준다. 


 하지만 작가는 두 언어, 두 나라, 두 문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법을 익힌다. 다시 페르시아어를 익히면서 페르시아어의 아름다움을 다시 느끼고, 이란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면서 이란과 프랑스 두 곳에서의 삶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 연습하게 된다. 이란도 프랑스도 아닌 곳들에서 몇 년 동안 살아가는 것에도 익숙해진다. 테헤란의 교통 체증 속에서도 택시기사가 읊어주는 하페즈(14세기 이란의 시인으로, 페르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다.)의 시에서 행복을 느낀다. 마침내 묵묵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국어와 화해한 것이다. 


 그냥 모국과 지금 살고 있는 나라 모두의 언어와 문화를 누리며 살아가며 되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고국을 떠나 낯선 나라와 언어, 문화에 던져졌던 작가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의사에 따라 어디서든 살 수 있는 지금에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두 개의 언어, 문화 사이에서 나름대로 균형을 잡았다 해도 다시 흔들리고 헤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묵묵히 그녀를 기다려준 모국어와 그녀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 많은 어려움과 시간을 겪으면서 단단해진 그녀 자신이 있기에 다시 굳건히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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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얼에 집중하라 - 세대 갈등을 넘어 공감과 소통을 이야기하다
심혜경 지음 / 북스고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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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레니얼(millennial)’은 천 년의라는 뜻으로, ‘밀레니얼 세대는 새 천 년인 2000년대, 21세기에 중심 소비층으로 등장한 세대를 말한다보통 198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출생한 세대를 밀레니얼 세대라고 한다이들이 최근 주 소비층으로 등장하면서 밀레니얼 세대를 분석하는 책들도 많아졌다밀레니얼 세대는 소비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직장에서 기성세대와 함께 생산의 주체로 활약하고 있기에 어떻게 하면 밀레니얼 세대와 성공적인 직장 생활을 할 수 있는지 분석하는 책들도 나오고 있다이 책은 그런 책들 중 하나다.

 

 나도 밀레니얼 세대 중의 한 사람이니 밀레니얼 세대를 어떻게 분석했을까 궁금했는데다른 밀레니얼 세대 관련 책들과 크게 내용이 다르지 않다밀레니얼 세대는 회사라는 집단의 발전과 번영보다는 자신의 행복과 발전을 중시한다열심히 일하면 성공이 보장된 시대는 이미 지났기에 미래를 위해 저축하기보다는 지금의 작은 행복을 위해 소비한다불필요한 절차는 생략하고 핵심적인 내용을 자유롭고 즉각적으로 소통하는 것을 원한다등등공감은 되지만 이미 들어본 이야기들이다.

 

 밀레니얼 세대와 슬기로운 직장 생활을 하기 위해 이 책에서 제시하는 해결책들도 다소 원론적이다. ‘요즘 젊은 것들은 노력이 부족하다고 단정 짓지 말고 밀레니얼 세대가 불러일으키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자기성세대가 먼저 밀레니얼 세대에게 다가가서 이해하며 공감해야 한다밀레니얼 세대도 기성세대의 장점을 배우면 도움이 된다등등다른 경제경영서들이나 기업 교육에서도 많이 제시하는 해결책들이다.

 

 딱히 새로운 이야기는 없지만 기업 교육을 하는 저자가 쓴 만큼 실제 직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예로 들어 깔끔하고 이해하기 쉽게 잘 설명해 놓았다기성세대인 상사들이(물론 밀레니얼 세대인 부하 직원들도 노력하고 실천해야 하지만책에 나오는 것만큼만 이해하고 실천해도 직장 문화는 훨씬 더 나아질 것이다기성세대뿐 아니라 밀레니얼 세대 안에도밀레니얼 세대와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젊은 꼰대는 있으니 그들도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다른 밀레니얼 세대 관련 책들과 비교했을 때 독보적으로 뛰어나다고 하기는 어렵지만밀레니얼 세대는 어떤 세대인지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더 성공적인 직장 생활을 하려면 어떤 마음가짐과 노력이 필요한지 알고 싶을 때 가볍게 입문서처럼 읽기에는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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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타지 없는 여행 - 환타 전명윤 여행 에세이
전명윤 지음 / 사계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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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동안 수도권을 벗어나지도 못하다 작년에야 수도권을 벗어나 남쪽 지방으로 국내 여행을 갔는데, 올해 코로나가 터졌다. 그저 여행 에세이나 TV 여행 프로그램으로 간접 여행을 할 수밖에 없다. 예쁜 사진들로 글의 부실함을 가리는 여행 에세이, 그냥 떠나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여행 에세이는 읽고 싶지 않았다. 그런 여행 에세이들은 서점에 차고 넘치니까. 여행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여행 에세이를 읽고 싶었다.

『환타지 없는 여행』은 말 그대로 여행에 씌워진 환타지들을 걷어내는 여행 에세이다. 왜 '판타지'가 아니라 '환타지'냐 하면, 작가의 인터넷 닉네임 '환타'를 연상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여행에 대한 '상을 파'한다는 뜻의 닉네임처럼, 여행 가이드북 작가인 그는 사람들이 여행에 대해 품는 온갖 낭만적인 환상들을 걷어낸다. 그도 젊은 시절에는 다 버리고 무작정 떠나라고 사람들에게 추천했었지만, '떠나면 행복해진다'는 환상이 허상임을 깨달은 지금은 이렇게 말한다.

"돌아와야 할 이유를 찾고, 돌아올 날짜를 정해야 여행입니다. 돌아올 길을 불태우고 떠나면 그때부터 국제 거지가 되는 거예요."(p. 20.)

작가의 친구들은 늘 여행을 하고 있는 작가를 부러워하지만, 그들에게는 작가에게 없는 안정적인 직장과 편안한 집, 큰 차가 있다. 여행이 끝나면 돌아올 일상이 있어야 여행은 현실이 된다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무작정 떠나라는 말만 하지 않고, 삶을 지탱해 주는 일상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그에게 신뢰가 간다.

"누군가에게 가이드북은 여행지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고 수평선 너머의 풍경을 꿈꾸게 하는 책일지 모른다. 그러나 정보를 정확히 전달하고 제대로 안내해야 하는 나에게는 서바이벌 키트 혹은 만능 구급상자다. 그 책임감 때문에 내가 쓴 가이드북은 늘 잔소리로 넘쳐난다. 지도 밖은 위험천만한 곳이다. 현지인에게 당신이 특별한 이유는 당신의 지갑이 그곳의 지폐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에게 환상이 아닌 현실을 거듭 이야기하는 이유다."

(p. 72~73.)

그가 가이드북을 쓰는 이유는 여행에 대한 환상을 품고 떠난 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돕기 위해서다. 여행 작가들이 심어준 환상 때문에 제대로 사전 조사도 해 보지 않고 여행을 떠났다 낭패를 본 사람, 낭패 정도로 그치지 않고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세계적인 여행 가이드북 『론리 플래닛』에서는 2019년 스리랑카를 '올해 여행해야 할 국가' 1위로 선정했지만, 그해 4월 스리랑카에서는 연쇄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해 여행을 온 외국인들이 여러 명 사망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늘 여행지 추천에 신중을 기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가이드북이 관광 명소, 맛집을 찾기 위해 뒤적이는 정보 모음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잘 만든 여행책은 그 지역의 시대와 현실을 여행이라는 주제로 기록한 지역서이자 민속지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여행 에세이에서도 그는 사람들이 여행지에서 보지 못한 진실들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인도에서 소를 신성시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인도의 지방 유지들이 목 말라 죽어가는 사람들 대신 신성한 소에게만 물차를 보내 자신의 신앙과 부를 과시한다는 것은 잘 모른다. 주말마다 홍콩 거리를 가득 메운 외국인 가사도우미들을 보지만, 그들이 주5일 노동이라는 근로기준법의 규칙을 지키기 위해 주말에는 어쩔 수 없이 주인 가족들과 함께 사는 집에서 나와 거리에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보지 못한다. 요즘 인기를 얻고 있는 오키나와 흑당 음료에는 일본 본토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으로 이용당하며 사탕수수 외의 다른 작물은 재배할 수 없었던 과거 오키나와의 아픔이 담겨 있다. 이런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내가 우리나라 밖의 이야기에 얼마나 무지하고 관심이 없었는지를 깨달았다. 나 자신이 다른 문화권에 관심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흥밋거리로만 외국 이야기를 소비할 뿐이었다.

코로나가 지나면 가까운 곳부터 하나씩 환상을 걷어낸 여행을 하고 싶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곳에서 찍히는 사람 얼굴만 다른 사진을 찍으며, 여행지 하나하나가 해야 할 숙제인 듯이 여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책이나 TV로 보는 것만으로는 겪을 수 없는 것들을 겪으면서 더 넓은 세상과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배우고 싶다. 지저분한 것도 고생스러운 것도 못 견디는 나는 실전에서는 결국 편안한 환상으로 돌아갈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도전해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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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미술 Art & Ideas 11
조너선 블룸 외 지음, 강주헌 옮김 / 한길아트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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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멀고 낯선 나라의 이야기가 담긴 책, 예쁜 이미지가 많이 실린 책을 읽고 싶어진다. 도서관에서 그런 책을 찾다 문득 몇 년 전에 읽었던 『이슬람 미술』이 떠올랐다. 이슬람교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근대까지 이슬람 미술사 전체를 훑어보는, 두껍고 사진이 많았던 책. 그때는 호기심에 읽었다가 생각보다 지루해 꾸역꾸역 읽었는데, 그때보다 공부 양이 많이 쌓였고 딱딱한 책에 대한 인내심도 더 많아진 지금이라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확실히 몇 년 전보다는 재미있게 읽혔다. 더 이상 역사와 미술사를 전공 과목으로 공부하지 않게 된 이후로 역사와 미술사 공부가 얼마나 즐거웠는지 깨달았으니까. 이 책은 미술사와 그 정치적, 사회적 배경이 되는 역사를 잘 설명하고 있고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다. 하지만 서술이 딱딱하다는 평에는 공감했다. 알함브라 궁전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부분처럼("햇살이 볼트 천장의 드럼에 설치된 창문으로 스며들 때 생기는 그림자의 움직임은 별이 총총한 하늘이 회전하는 듯한 효과를 자아낸다.") 서정적인 문장들도 종종 보이지만, 대부분은 사실 그 자체만 나열하는 서술이라 종종 지루하게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그만큼 정보량이 많다. 이슬람 미술에 대해 이렇게 풍부한 내용을 담은 책이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없으니 정보량이 많은 건 분명히 장점이다.


13세기의 서예가 야쿠트 알 무스타심이 필사한 쿠란. 16세기 중반 오스만 제국(지금의 터키)에서 이 쿠란을 복원했다.

이미지 출처: https://www.donttakepictures.com/dtp-blog/2016/3/7/bookmarks-islamic-arts-museum-of-malaysias-quran-collection


딱딱한 서술에 지루해지다가도,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나오는 아름다운 이슬람 미술 작품들에 마음을 사로잡힌다. 이슬람 문화권 사람들은 책을 신의 계시가 담긴 것, 문화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책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 만들었다. 각지게 쓰거나 물 흐르듯이 부드럽게 흘려쓰거나, 굵기를 일정하게 하거나 강약을 주는 등, 글의 목적과 성격에 맞추어 다양하게 써내려간 아랍 문자들은 그 자체로 예술이다. 거기에 각 장의 제목, 본문의 첫머리, 한 문장 한 문장이 끝나는 곳, 모음 부호까지 금박과 은박, 화려한 색색의 물감들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비흐자드, <유수프의 유혹>, 1488. 유수프(요셉의 이슬람식 발음)가 이집트 노예로 지내던 시절, 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해 오자 도망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책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건 삽화로 실린 세밀화들이다. 옷과 머리 모양만 바꾸면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고 전형적으로 그려진 인물들과 달리, 그들이 입은 옷과 그들을 둘러싼 배경은 더 없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스크린톤 없이 어떻게 저렇게 자잘한 무늬를 다 그려냈을까, 어떻게 저런 색감을 만들어냈을까 신기하다. 각각의 색들이 보석처럼 빛난다. 



아르다빌의 카펫, 이란, 1539~1540. 가로 10m, 세로 5m에 달하며 장식매듭이 수천만 개나 되는 정교한 작품이다. 이미지 출처: https://ardabilcarpetanalysis.wordpress.com/2017/11/16/formal-and-contextual-analysis-of-the-ardabil-carpet/ 이슬람 문화권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카펫. 수 세기 동안 직물은 이슬람 경제의 근간이었고 경제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중시되었다. 이 책에도 이슬람 직물들의 도판이 많이 실려 있는데, 그 중에서도 카펫은 다른 문화권의 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화려하다. 길이가 10m가 넘는데다 장식매듭이 수천만 개나 된다니 얼마나 정교한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샤 자한의 백옥으로 만든 포도주잔, 인도, 1656~1657. 조롱박 형태는 중국에서, 염소 머리 모양 손잡이는 유럽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무굴 제국은 실크로드 도시인 호탄이나 중국에서 옥을 수입해 정교한 옥 공예품을 만들었다. 이미지 출처: https://www.pinterest.co.kr/pin/335940453438363473/ 우아한 공예품들도 눈길을 끈다. 대부분 여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공예품들이지만, 샤 자한의 백옥 포도주잔은 간결하면서 단아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많지 않은 선으로도 잔의 우아한 형태를 만들어냈고, 티 없는 하얀색이 깨끗한 느낌을 더한다. 꼭 필요한 형태와 선만으로 우아함을 만들어낸 장인의 솜씨가 감탄스럽다.


이스파한의 샤 모스크, 이란, 1611~1616.

이미지 출처: https://www.anciens-stmarc-lyon.fr/vie-de-lassociation/photos-iran/ispahan-la-mosquee-du-shah/image_view_fullscreen 

예배를 드리는 모스크와 군주들이 생활하고 정무를 보는 궁전, 군주와 그의 가족들이 묻힌 영묘는 처음에는 단순한 모습이었지만, 필요에 따라, 각 지역의 특성에 따라 독특한 건축 양식이 발전하게 되었다. 기독교의 성당에서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장식들이 이슬람교의 모스크와 궁전, 영묘에서는 주된 요소로 사용된다. 돔과 주변의 미나레트(첨탑), 뽀족 아치가 만들어내는 우아한 선과 건물 표면을 뒤덮고 있는 화려한 아라베스크 무늬가 어우러져 이슬람 문화권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다시 읽는 책인데도 새삼 느꼈다. 세상은 넓고 아름다운 것은 많구나. 그리고 내가 잘 모르는 역사와 미술사가 너무 많구나. 고등학생 때 공부한 세계사에서도 이슬람권의 역사가 나왔는데 까맣게 잊어버렸다. 우리와 가까운 중국, 일본사나 근대에 들어 세계사를 주도한 서구의 역사보다 세계사 교과서에서 비중도 훨씬 적었고, 고등학생 때 이후로 접할 일도 거의 없었으니까. 대학교에서도 이슬람 역사만 따로 공부하는 과목은 없었고. 또한 서양미술사를 다룬 책은 정말 많은데 이슬람 미술만을 다룬 한국어 책은 몇 권 되지 않는다. 이 책이 출간되고 17년이 지났는데도 같은 주제를 다루었거나 최근의 연구 동향을 반영해서 업데이트한 책이 거의 없다시피하다. 우리가 책을 통해 접하는 세상도 좀 더 넓어졌으면 좋겠다.


* 책에 실린 작품 사진들은 저작권 때문에 사용하기 어려워 책에 실린 작품들을 검색해 찾은 이미지로 대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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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구기담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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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단편집에 실린 단편 중 한 편인 「특별 요리」가 스탠리 엘린의 특별 요리」(*스탠리 엘린의 특별 요리」서평 https://blog.aladin.co.kr/797871198/11830161)를 오마주한 작품이라고 해서 빌려 봤는데흔한 일본 괴기소설일 뿐이다스탠리 엘린의 특별 요리」가 날카로운 풍자와 통찰력촌철살인인 문장을 갖추고 있는 반면, 이 단편집 속 단편들에는 음습함과 중2병 정서끈적끈적하고 뒤틀린 에로티시즘만 있다.

 

재생 

근친 성폭력의 피해자인 유이가 사실은 본인도 아버지와의 변태적인 성관계를 즐기고 있었고남편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봤기 때문에 남편을 선택했다는 설정이 찜찜하다성폭력 가해자들을 정당화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상대도 같이 즐겼다이니까유이의 잘린 머리에서도 새 몸이 나오고머리 없는 몸에서도 새 머리가 나와서 주인공을 당황하게 하는 설정이었다면 더 섬뜩하지 않았을까 싶다.

 

 요부코 연못의 괴어

전 지구급 재앙이라도 불러올 것 같은 괴생명체의 최종 진화 형태가 겨우 예쁜 새였다니 김이 빠진다그나마 중2음습함이 덜하고 밝은 내용의 단편이다.

 

 특별 요리 

스탠리 엘린은 음식에 개똥철학을 부여하는 사람들을 풍자했는데주인공은 아내를 설득하기 위해 개똥철학을 늘어놓고아내는 또 거기에 넘어간다이것도 나름의 풍자라고 할 수 있지만결국 낳자마자 잡아먹기 위해 아이를 가지자고까지 하게 되는 주인공. 엘린의  특별 요리」가  미식에 탐닉하는 사람들을 풍자한 반면 이 소설은 내가 이렇게까지 기괴하고 엽기적으로 쓸 수 있다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더 강한 것 같다.

 

 생일 선물

주인공이 남자친구를 죽이고 기억을 잃었던 것까지는 알겠다하지만 주인공이 왜 남자친구를 죽였는지동아리 사람들이 주인공에게 준 토막시신의 정체는 무엇인지동아리 사람들은 왜 토막시신을 주인공에게 생일 선물로 주었는지는 전혀 밝혀지지 않는다그냥 생시인지 꿈인지 알 수 없는 몽환적인 분위기와 상자를 열어볼 때마다 동아리 사람들이 주문처럼 뇌까리는 섬뜩한 문장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철교

괴담에서 일어난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흔한 설정어떤 때는 지어낸 이야기라도 그 이야기 자체가 실제와 같은 힘을 얻는 것 같다.

 

인형

진짜 주인공이 소멸되고 인형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인형은 자신이 진짜 주인공인 줄 알다가 또 다른 인형에게 소멸당하는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을까지금의 자신과 과거의 자신이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분열된 자아 사이에서 헤매는 이야기.

 

안구기담

주인공이 진짜 후배 아버지의 눈을 희생해서 눈을 뜨게 된 소녀였는지아니면 후배가 그저 주인공을 놀리기 위해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었는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는다그래서 더 찜찜함이 남는 이야기후배 아버지로 추정되는 액자 속 주인공이 겪는 끈적끈적한 에로티시즘과 유이의 어머니가 벌이는 행각의 기괴함은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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