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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타지 없는 여행 - 환타 전명윤 여행 에세이
전명윤 지음 / 사계절 / 2019년 7월
평점 :
몇 년 동안 수도권을 벗어나지도 못하다 작년에야 수도권을 벗어나 남쪽 지방으로 국내 여행을 갔는데, 올해 코로나가 터졌다. 그저 여행 에세이나 TV 여행 프로그램으로 간접 여행을 할 수밖에 없다. 예쁜 사진들로 글의 부실함을 가리는 여행 에세이, 그냥 떠나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여행 에세이는 읽고 싶지 않았다. 그런 여행 에세이들은 서점에 차고 넘치니까. 여행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여행 에세이를 읽고 싶었다.
『환타지 없는 여행』은 말 그대로 여행에 씌워진 환타지들을 걷어내는 여행 에세이다. 왜 '판타지'가 아니라 '환타지'냐 하면, 작가의 인터넷 닉네임 '환타'를 연상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여행에 대한 '환상을 타파'한다는 뜻의 닉네임처럼, 여행 가이드북 작가인 그는 사람들이 여행에 대해 품는 온갖 낭만적인 환상들을 걷어낸다. 그도 젊은 시절에는 다 버리고 무작정 떠나라고 사람들에게 추천했었지만, '떠나면 행복해진다'는 환상이 허상임을 깨달은 지금은 이렇게 말한다.
"돌아와야 할 이유를 찾고, 돌아올 날짜를 정해야 여행입니다. 돌아올 길을 불태우고 떠나면 그때부터 국제 거지가 되는 거예요."(p. 20.)
작가의 친구들은 늘 여행을 하고 있는 작가를 부러워하지만, 그들에게는 작가에게 없는 안정적인 직장과 편안한 집, 큰 차가 있다. 여행이 끝나면 돌아올 일상이 있어야 여행은 현실이 된다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무작정 떠나라는 말만 하지 않고, 삶을 지탱해 주는 일상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그에게 신뢰가 간다.
"누군가에게 가이드북은 여행지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고 수평선 너머의 풍경을 꿈꾸게 하는 책일지 모른다. 그러나 정보를 정확히 전달하고 제대로 안내해야 하는 나에게는 서바이벌 키트 혹은 만능 구급상자다. 그 책임감 때문에 내가 쓴 가이드북은 늘 잔소리로 넘쳐난다. 지도 밖은 위험천만한 곳이다. 현지인에게 당신이 특별한 이유는 당신의 지갑이 그곳의 지폐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에게 환상이 아닌 현실을 거듭 이야기하는 이유다."
(p. 72~73.)
그가 가이드북을 쓰는 이유는 여행에 대한 환상을 품고 떠난 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돕기 위해서다. 여행 작가들이 심어준 환상 때문에 제대로 사전 조사도 해 보지 않고 여행을 떠났다 낭패를 본 사람, 낭패 정도로 그치지 않고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세계적인 여행 가이드북 『론리 플래닛』에서는 2019년 스리랑카를 '올해 여행해야 할 국가' 1위로 선정했지만, 그해 4월 스리랑카에서는 연쇄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해 여행을 온 외국인들이 여러 명 사망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늘 여행지 추천에 신중을 기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가이드북이 관광 명소, 맛집을 찾기 위해 뒤적이는 정보 모음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잘 만든 여행책은 그 지역의 시대와 현실을 여행이라는 주제로 기록한 지역서이자 민속지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여행 에세이에서도 그는 사람들이 여행지에서 보지 못한 진실들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인도에서 소를 신성시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인도의 지방 유지들이 목 말라 죽어가는 사람들 대신 신성한 소에게만 물차를 보내 자신의 신앙과 부를 과시한다는 것은 잘 모른다. 주말마다 홍콩 거리를 가득 메운 외국인 가사도우미들을 보지만, 그들이 주5일 노동이라는 근로기준법의 규칙을 지키기 위해 주말에는 어쩔 수 없이 주인 가족들과 함께 사는 집에서 나와 거리에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보지 못한다. 요즘 인기를 얻고 있는 오키나와 흑당 음료에는 일본 본토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으로 이용당하며 사탕수수 외의 다른 작물은 재배할 수 없었던 과거 오키나와의 아픔이 담겨 있다. 이런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내가 우리나라 밖의 이야기에 얼마나 무지하고 관심이 없었는지를 깨달았다. 나 자신이 다른 문화권에 관심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흥밋거리로만 외국 이야기를 소비할 뿐이었다.
코로나가 지나면 가까운 곳부터 하나씩 환상을 걷어낸 여행을 하고 싶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곳에서 찍히는 사람 얼굴만 다른 사진을 찍으며, 여행지 하나하나가 해야 할 숙제인 듯이 여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책이나 TV로 보는 것만으로는 겪을 수 없는 것들을 겪으면서 더 넓은 세상과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배우고 싶다. 지저분한 것도 고생스러운 것도 못 견디는 나는 실전에서는 결국 편안한 환상으로 돌아갈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도전해 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