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웃어주지 않기로 했다 - 친절함과 상냥함이 여성의 디폴트가 아닌 세상을 위해
최지미 지음 / 카시오페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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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장소에서 예절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지적을 할 때마다, 특히 나이 지긋한 사람에게 지적할 때 두렵다. '젊은 여자가 감히 어른한테 지적을 한다'고 고까워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별 미친년을 다 보겠네"라고 욕을 먹은 적도 있다. 반면 아버지나 건장한 남자 동기와 같이 있을 때는 상대방이 언짢은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도 심한 욕설은 하지 못했다. 동아리 모임에서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 회원들이 성차별적인 말을 할 때 지적하면 나만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든 눈치 없는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이 책은 이렇게 젊은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책이었다.


내가, 아니 우리 사회의 여성들이 당하는 일이 사소하고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라고 이 책은 지적한다. 사회는 여성이 공격적이지 않고 사무적이지 않고, 늘 상냥하고 밝게 웃으면서 친절하게 대하기를 요구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여성은 '여자답지 못하고 감정적인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무례한 말과 행동에 '그 말, 행동 때문에 기분이 나쁘다'고 정확히 의사 표현을 하면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예민하냐'고 예민한 사람 취급을 하거나, 오히려 화를 내기까지 한다. 그러니 무례한 일을 당해도 내 감정과 의사를 밝히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저자는 그래도 목소리를 내라고 격려한다. 당신이 참으면 상대는 용기를 얻고, 자신의 무례함을 합리화한다고. 목소리를 내고 정면으로 대응해야 세상이 바뀐다고.


저자는 여성을 옭아매는 사회의 편견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반박한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흔히 남자는 이성적이지만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여자는 감성적이고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그러나 오리건 대학교의 크리스틴 클레인과 사라 호지스 교수가 '남녀 사이의 공감 능력 차이'를 알아보기 위해 수행한 실험 결과는 이런 통념과 다르다. 연구진은 감정적 공감을 정확하게 수행했을 때 한 그룹에는 아무것도 보상하지 않고 다른 한 그룹에는 보상을 했는데, 돈을 받기로 한 그룹의 경우 남성과 여성 사이의 유의미한 공감 능력 차이가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하버드 대학교의 사라 스노드그라스 교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여성 리더가 남성 하급자의 감정을 파악하는 것보다 남성 하급자가 여성 리더의 감정과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고 한다. '남자는 원래 공감 능력이 떨어지니 네가 이해해'라고 여자친구에게 말하는 남자들도 회사 상사나 군대 선임 앞에서는 눈치 빠르게 행동하며 뛰어난 공감 능력을 보인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에세이지만 사회과학 도서 같은 면모도 지니고 있다. 여러 실험과 논문, 실제 사건을 근거로 들기에 더 신뢰가 간다.


온갖 편견과 폭력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세상이 강요할 때가 아닌 내가 원할 때에 웃으면서 살아갈 수 있으려면 나 자신이라는 성을 단단히 다져야 한다. 어떻게 세상이 웃으라고 강요하고 내게 무례하게 굴 때 대응해야 하는지, 세상이 어떻게 살라고 정해진 삶의 방식을 강요해도 내가 원하는 삶의 방식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도 조언한다. 여기에서는 자기계발 도서 같은 느낌이 들지만,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젊은 비혼주의자 여성으로서 자신이 직접 겪었던 사회의 부조리함을 이야기하고, 철없지만 멋진 이모로 살겠다면서 자신의 인생 계획을 솔직히 털어놓아 같은 여성으로서 깊이 공감하게 한다.

본문의 마지막 챕터에서 저자는 요즘 여성들이 자주 듣는 질문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로 "너, 페미니스트야?"라는 질문. 인종 차별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문화 시민의 도리가 된 지금은 "너 인종 차별에 반대하니"라고 묻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남성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여성도 당연하게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페미니즘이고 그것이 당연한 일인데, 마치 그것이 잘못된 일인 양 '너 페미니스트냐'고 사상 검증을 한다. 그 질문 자체가 그런 질문을 받지 않을 수 있는 남성으로서 권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여성들 중에서도 페미니즘은 세상에 분란을 일으킬 뿐이며, 우리나라의 페미니즘은 너무 과격하고 남성들을 혐오하며 그들보다 우위에 서려 하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힘이 빠진다. 하지만 저자는 페미니즘에 반대하고 당당히 여성 혐오를 표현하는 이들이 과거의 노예주나 KKK단처럼 과거의 부끄러운 유산으로 남게 될 것이며, 여성이 두려움 없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세상이 꼭 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세상이 올 때까지 자기 자신을 좀 더 사랑하고 챙기라고, 함께하면 더 강해진다고 저자는 여성들을 응원한다. 아직도 세상에는 두려운 것투성이지만 그 응원이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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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내가 남자를 죽였어
오인칸 브레이스웨이트 지음, 강승희 옮김 / 천문장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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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외 여행을 갈 수는 없으니 대신 책으로라도 외국을 느껴보자고 도서관 해외 문학 코너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런데 멀리서 봐도 눈에 띄는 표지와 제목의 책이 있었다. 샛노란 색 표지 위에 '언니, 내가 남자를 죽였어'라는 제목이라니. 서가에서 책을 꺼내 뒤 표지를 보니 '연쇄살인범 동생을 둔 주인공이 동생이 살인을 저지를 때마다 뒷수습해 주는 이야기'라고 한다. 설정도 특이한데 나이지리아 스릴러라고 한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온 스릴러의 대부분은 일본이나 영미권 스릴러였다. 이래저래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조합이라 빌려왔다.


평범한 간호사인 주인공 코레드가 평범하게 살 수 없는 이유가 딱 하나 있으니, 바로 동생이었다. 엄마를 닮아 평범한 외모인 코레드와 달리 동생 아율라는 미남이었던 아빠를 닮아 인형처럼 예쁘다. 그런데 아율라가 도무지 고치지 못하는 악습관이 있다. 매번 실수인 듯 고의인 듯 남자친구를 죽여버리는 것이다. 그 때문에 코레드는 밥을 먹으려다가도 동생이 호출하면 달려가, 자신의 의학 기술과 청소 기술을 총동원해 시체를 처리해야 한다. 게다가 아율라는 남자친구를 죽인 지 며칠도 되지 않아 엄마와 즐겁게 찍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려고 할 정도로 죄책감도 생각도 없다. 동생이 살인을 저지를 때마다 숨겨주고 수습해 주느라 벅찬데, 그에 대한 보상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보상은커녕 엄마의 사랑과 남자들의 관심, 심지어 짝사랑하는 동료 의사 선생님의 마음까지 아율라가 독차지한다. 이런 줄거리 소개를 읽어보면, 스릴러 쪽으로도 드라마 쪽으로도 흥미로운 소설일 것 같다.


문제는 이 소설이 스릴러로서는 스릴이 없고 드라마로서는 여운이 없다는 것이다. 한 챕터의 길이가 매우 짧아 호흡이 짧은 것이 이 소설의 특징인데,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 전개에 속도감이 붙는 것이 아니라 뚝뚝 이야기가 끊어지는 느낌이다. 예상치 못한 이야기의 전개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릴이나 긴장감, 뒤통수를 치는 듯한 반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복잡하고 정교한 트릭이 있는 것도 아니다.


  드라마로서 여운을 줄 수 있는 요소가 없지는 않다. 처음에는 예쁘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다 가진 아율라가 언니를 마냥 이용하기만 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어린 자신을 중년 남자와 조혼시키려 했던 아버지에게서 지켜줬던 언니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었다. 코레드도 짝사랑하는 사람까지 빼앗아가고 늘 뒤치다꺼리를 떠넘기는 동생을 원망하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동생을 지키려고 한다. 사실 두 자매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것은 남자들이 아니라 서로다. 이런 서사가 뭉클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소설이 진행되면서 쌓여 온 감정선이 빈약하니 감정의 여운이 남지 않는다.


물론 시나 시처럼 짧은 소설이 그 안에 함축된 것으로 여운을 주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 소설의 간략한 서술은 함축적이라기보다는 빈약하다. 그 빈약한 서술 중에서도 앞에서는 아율라가 다른 곳은 몰라도 코레드 자신과 눈이 닮았다고 하다가, 뒷부분에서는 (코레드는 눈이 작다고 했는데) 아율라는 얼굴의 반은 될 정도로 눈이 크다는 묘사가 나오는 등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속도감이 있고 경쾌하고 단순명료하다는 평도 있지만, 이야기에 몰입하게 할 만한 요소가 적다.


  제3세계나 이민 2세 작가들은 자기 나라 음식이나 언어를 중간중간에 삽입해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키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런 이국적인 요소를 찾아보는 재미도 없다. 다른 나라의 문학을 이국적인 것으로만 소비한다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아모스 오즈의 『유다』가 겨울날의 예루살렘 거리의 스산함을, 오르한 파묵의 『내 마음의 낯섦』이 새벽녘 이스탄불 골목의 차가운 공기까지 느껴주게 해주는 것처럼 우리는 책을 통해 낯선 세계를 간접적으로 여행하게 된다. 이 소설에도 젤레 같은 전통 장신구나 아직까지 남아 있는 조혼 풍습, 교통 단속을 하면서 시민들에게 뇌물을 받고 봐주는 교통경찰 같은 나이지리아의 모습이 조금 드러나지만, 그곳의 공기를 생생하게 느끼게 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니 가볍게 한번 읽을 정도지, 곁에 두고 오래 볼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혜성처럼 등장한 천재 작가'라는 찬사를 듣는데 그 정도의 찬사가 어울리지는 않아 보인다. 책을 읽고 나서까지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연쇄살인범 내 동생My Sister the Serial Killer』라는 평범한 원제를 더 인상 깊게 바꾼 제목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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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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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인답지 못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가룟 유다에게 연민을 느낀다. 수천 년 동안 그 이름이 배신자의 대명사로 불렸던 사람. 온 세상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구원한 예수에게도 구원받지 못했던 사람. 그가 예수를 팔지 않았다면 십자가도 부활도 기독교도 없었을 텐데, 그는 구원의 도구로 사용되었어도 영원히 저주받는 운명에 놓였다. 그래서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부터 영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소설  「직소」까지 가룟 유다를 재해석하는 작품들에 끌리곤 했다. 이스라엘의 작가 아모스 오즈의 마지막 장편소설  『유다』도 같은 맥락에서 호기심이 생겼다.


  예상과 다르게 유다의 재해석만이 이 소설의 중심축은 아니었다. 1959년에서 196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대학원생 슈무엘이 예루살렘의 어느 외딴 집에서 몸이 불편한 노인 게르숌 발드의 말벗이 되어주는 이야기가 액자 역할을 하고, 발드와 그의 며느리 아탈리야, 아탈리야의 친정아버지 쉐알티엘 아브라바넬이 겪은 비극과 유다의 재해석이 그 안에서 얽히며 소설을 구성한다. 발드와 아브라바넬 가족의 비극과 유다의 재해석을 통해 작가가 돌아보려는 것은 '배신자'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저명한 정치가였던 쉐알티엘 아브라바넬은 유대인만을 위한 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끝없는 전쟁을 불러일으킬 것이고, 국가라는 제도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기에 이스라엘 건국을 반대했다. 이스라엘이라는 유대인만의 국가 대신 유대인과 아랍인이 공존하는 공동체를 꿈꾸었지만, 이스라엘 건국을 도모하고 있던 동료 정치인 벤구리온 때문에 정계에서 쫓겨나고 같은 민족인 이스라엘인들에게 매국노 취급을 당했다.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배신자였다.

  또 다른 '배신자' 유다는 이 작품에서 예수를 가장 사랑했던 제자로 재해석된다. 그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면 신의 권능으로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올 것이고, 그 즉시 천국이 이 땅에 임하고 사랑만이 넘쳐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예수는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오기는커녕 어린애처럼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으며 울부짖다 힘없이 죽어갔다.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 사랑했던 사람을 자기 손으로 죽인 데다, 세상의 구원이라는 일생의 목적이 산산조각 났으니 그에게는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배신자로 손가락질 받았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아모스 오즈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배신자로 불리는 사람들 중에는 정말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거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신을 믿고 사랑했던 사람들, 뜻을 함께했던 동지들, 심지어 나라까지 배신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를 너무 앞서 태어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바람직하다고 여기고 기대하는 방향으로는 다른 방향으로 갔던 사람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꾸지 못한 꿈을 꾼 사람들도 있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재평가될 기회도 얻을 수 없었던 것이 그들의 비극이었다.

  그들 중에는 아모스 오즈 자신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쉐알티엘처럼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자체의 존재를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 평화롭게 공존하기를 바라며 자신의 작품으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저지른 폭력을 비판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아랍 국가들과 공존하자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이스라엘 극우 단체들은 그를 배신자로 몰아갔다. 그는 쉐알티엘, 유다와 같은 처지에 있으면서 그들의 다음 세대인 청년 슈무엘의 눈으로 오랫동안 매도당하고 잊혔던 그들의 꿈과 절망, 슬픔을 헤아려본다. 슈무엘의 성찰이 작품 속에서는 그들의 운명을 바꾸거나 그들의 재평가를 이끌어내지는 못하지만, 독자들에게 역사 속에 배신자로 남았던 이들과 그들을 배신자로 몰아갔던 역사, 세상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권한다.

  배신자라는 소재는 자극적일 수 있지만 이 소설은 읽기 고통스러울 정도로 천천히 담담하게 흘러간다. 아모스 오즈 자신이 인터뷰에서 이 책은 "추운 겨울 세 명이 한 방에 앉아 차를 마시며 서로 논쟁하는 이야기"라고 할 정도로 이 소설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등장인물들 사이의 대화다. 이상주의자 슈무엘과 현실주의자 발드의 대화, 이스라엘이 아랍인들에게 자행하는 폭력에 비판적이지만 이스라엘 국가라는 생각의 틀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는 슈무엘과, 유대인들이 이 땅에 있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말하며 어리석은 전쟁을 거듭하는 남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아탈리야의 대화. 이들의 대화를 통해 오즈는 한 치도 물러서거나 주저하지 않고 고국 이스라엘이 지금까지도 자행하고 있는 폭력을 비판한다. 소설로 자신의 정치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한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와 가룟 유다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나름대로 연구해 온 슈무엘과, 해박한 지식에 기초해 자신의 견해를 풀어놓는 발드의 대화를 통해, 신학적, 철학적 고찰의 깊이를 드러낸다. 인문 연구서가 아니라 소설인데 번역자가 단 역주가 거의 300개는 될 정도로, 슈무엘과 발드는 수많은 성경 구절과 유대 경전 구절을 인용한다. 기독교인으로서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예수의 이미지와 오즈의 가룟 유다 재해석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이 소설은 정치적이고 지적이며 전반적으로 건조하지만, 곱씹어 읽어보면 묘한 정취와 서정이 느껴진다. 딱딱한 빵을 씹다 보면 느껴지는 고소한 맛처럼. 책 전체에는 겨울날 예루살렘의 적막하고 황폐한 분위기가 드리워져 있다. 여러 해 전 겨울에 예루살렘에 갔을 때 느꼈던, 깊은 밤 어두운 골목의 정취가 다시 느껴졌다. 오즈가 여기서 묘사하는 예루살렘은 내가 갔을 때로부터도 수십 년 전의 예루살렘이지만, 그때부터 변하지 않는 쓸쓸함이 있다. 겨울의 어느 도시가 쓸쓸하지 않겠냐만은, 수천 년 동안 험난한 역사와 온갖 비극을 겪으면서 슬픔이 쌓여왔고, 지금도 어디서 유혈극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있어서일 것이다. 유다의 심리를 그린 47장은 이 부분만 단편소설로 따로 떼어내도 좋을 만큼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을 크게 움직이는 부분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직소처럼 휘몰아치지는 않지만 담담해서 더 여운이 남는다. 번역자는 47장을 번역하고 이틀을 울었다고 하는데, 나는 울지는 않았지만 유다의 사랑과 꿈, 희망과 절망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서사 전개가 빠르고 흥미로운 소설을 더 좋아하는 편이라 이 소설을 보름에 걸쳐서 읽었다. 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읽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언제 다시 갈지 모르는 예루살렘의 공기를 책으로나마 다시 느꼈고, 수많은 성경과 유대 경전 이야기를 통해 지식욕을 채웠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배신자로 불리는 사람들을 다시 돌아보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되었으니까. 누군가의 진심과 꿈이 다른 한 사람에게라도 기억된다면 그의 삶이 완전히 헛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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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이게 다 인권 문제라고요? - 새로운 인권 감수성으로 만나는 청소년, 디지털, 기후위기, 젠더, 장애, 난민 이야기, 2021년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도서, 2021년 (사)행복한아침독서 추천도서 곰곰문고 6
김도현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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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에 청소년을 위한이라는 말이 들어간 책을 읽기에는 쑥스러운 나이가 되었지만, 청소년 책들을 살펴보면 어른이 읽어도 좋은 책들이 보인다. ‘이런 책이 내가 청소년일 때 나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고 한탄이 나올 정도다. 잠깐! 이게 다 인권 문제라고요?도 그런 책이다.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춰 집필되고 편집되었지만, 어른들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남겨주는 책. 인권 문제에 나름대로 관심이 많다고 생각했는데도 살아가면서 지나쳤던 인권 관련 이슈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첫 챕터인 청소년 인권 문제부터 내가 평소에 의식하지 않고 있는 부분이었다. 이 챕터를 읽으면서 내가 청소년 시절에 겪어온 것들이 인권 침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야간 자율학습이라고 했지만 예체능계가 아니면 무조건 밤 열 시까지 학교에 남아 공부를 해야 했고, 점심시간에도 자율 학습을 해야 했다. 성인 노동자에게는 식사 시간을 포함한 휴식 시간을 보장해야 한다고 법으로 정해져 있는데, 미성년자인 학생은 휴식할 권리도 없단 말인가. ‘생활 지도라는 명목으로 교사가 학생에게 감정을 실어 체벌을 할 때가 많았고, 수업 시간에 학생에게 네 가슴 사이즈는 A컵쯤 되겠네하고 성희롱을 하는 교사도 있었다. 이렇게 자기 권리가 침해되는데도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이유로 교사의 통제를 따르며 입시 준비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학교 풍경을 바꾸기 위해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학생 인권조례에는 나와 내 또래 사람들이 학창 시절에 겪었던 인권 침해들을 방지할 수 있는 조항들이 있었다. 학생의 쉴 권리와 모든 종류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개성을 추구할 권리도 보장하고 있었다. 저자는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학생들 스스로가 문제 제기를 하고 자신의 권리와 평등을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대화의 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나도 청소년이었던 사람이고 지금의 청소년들이 겪었던 억압과 인권 침해를 경험했으면서 그 모든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청소년 자신이 자신의 인권을 놓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도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저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면 청소년들의 인권이 좀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을 뿐. 청소년들을 학생인권조례의 시혜 대상으로만 생각했을 뿐 그들을 그들 자신의 인권을 스스로 지키는 주체로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내가 겪고 있지 않은 인권 문제에 무심했을 뿐 아니라 나 자신이 다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기도 했다는 것도 깨달았다. 인터넷을 하다 좋아하는 연예인의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사람이 그 연예인의 고등학교 졸업 사진을 올린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 같은 팬들이 보면 좋아하겠다 싶어 그 졸업 사진을 팬 사이트에 올리고 고등학교 때는 이랬네하고 웃고 떠들었다. 내 행동은 명백히 그 연예인의 초상권과 사생활을 침해하는 행동이었다. 이 책에서는 너무 많은 사람이 사생활을 침해하면 그 행위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고 지적했는데, 내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인터넷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정보가 올라와 있기 때문에 누구나 검색해서 볼 수 있는 것누구나 마음대로 사용해도 되는 것이라고 착각한다는데, 나도 그런 착각에 빠져 있었다.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고 다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얼마나 안일하고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무심히 지나쳤던 인권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인권 관련 이슈에 대해 대답하기 난감했던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 힌트도 얻게 되었다. 우선 남자만 군대에 가는 것은 역차별이 아니냐는 질문. 이 책에서는 남자만 군대에 가는 것이 역차별이 아닌 이유를 조목조목 밝힌다. 역차별은 부당한 차별을 받는 쪽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한 제도나 장치가 너무 강해 오히려 반대편이 차별을 받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남성만 군인으로 징집하는 제도가 여성을 보호하고 우대하기 위한 것일까? 이 책은 국방부에서는 남성만 징집하는 것이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특정 연령대의 남성만으로도 필요한 군인 수를 채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국방의 의무에는 병역뿐만 아니라 군 작전에 협조하거나 전시 근로 동원에 응하는 의무도 있기에 군대를 가지 않는다고 해서 국방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 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헌법재판소에서는 여러 차례 병역 부과 대상을 남성으로 한정한 병역법이 합헌이라고 판결했고, 징병제가 있는 70여 개 국가들 중에 여성에게 병역 의무를 부과하는 국가는 극히 일부이며 남성 중심의 현 군 조직에서 여성에게 병역 의무를 부과했을 때 상명하복과 권력관계를 이용한 성희롱 등의 범죄가 일어날 우려가 있다고, 남성의 병역 의무는 역차별, 평등권 침해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물론 여성이든 남성이든 모든 국민이 군 복무를 하는 것으로 병역법이 바뀔 수 있지만 그 전에 여성이 평등하고 안전하게 군 복무를 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이 책은 이야기한다. 남성만 징집하는 한국 병역법이 역차별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이야기할 근거를 정확히 알지 못했는데, 이렇게 근거를 조목조목 설명해 주니 막혔던 가슴이 트이는 것 같았다.


  또 한 가지 나를 난감하게 만드는 질문은 혐오 표현도 표현이니 표현의 자유를 인정해야 되지 않느냐는 것.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는 이들 중에서는 교회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는 설교를 해도 처벌받는 것이 아니냐며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책에서는 동성애가 싫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자신이 이성애자임을 과시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동성애가 싫다는 말은 이성애자로서 차별당하지 않는 안전한 위치에 있으면서 동성애자라는 소수자는 불안에 떨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혐오 표현은 특정한 조건을 지닌 사람들을 무시하고 비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계속 쓰다 보면 그 말에 담긴 증오에 물들어, 그 대상을 진심으로 증오하게 되고 폭력도 서슴없이 가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혐오 표현에 대해서는 표현의 자유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근거를 들어도 이해가 안 된다면 역지사지를 하게 하면 된다. 외국에 나갔을 때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백인 우월주의자에게 코로나 바이러스를 옮기는 동양인은 싫어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어떤 논리적 근거를 들어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역지사지의 태도를 취하게 하는 것도 방법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한 신문 기사를 보고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시내 지하철역 엘리베이터 설치 예산이 삭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애인들이 이동권을 보장해 달라며 시위를 했는데, 시민들은 그들을 조롱하고 경찰이 그들을 끌어내자 환호했다는 것이다. 더 슬프고 답답했던 것은 그 기사에서조차 장애인들을 조롱한 시민들을 비판하기는커녕, ‘자기 권리를 찾겠다고 다른 사람의 이동까지 방해해서야 되겠냐며 장애인들을 비난하는 댓글들이 달린 것이었다. 청소년들이 지금 당장 내가 불편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인권을 생각하는 어른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사는 게 벅차다며 다른 사람의 인권까지 챙기기는 힘들다는 어른이 조금씩이라도 마음을 바꾸기 위해 이런 책이 필요하다. 나와 다른 조건, 사회적 위치 때문에 인권 문제를 겪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외면한다면, 우리의 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할 때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런 것도 인권 문제였구나하고 다시 한 번 돌아보고 그런 문제를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데 이 책이 좋은 출발점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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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알고 싶은 건축물이 너무도 많아 - 역사와 문화가 보이는 서양 건축 여행
스기모토 다쓰히코나가오키 미쓰루.가부라기 다카노리 외 지음, 고시이 다카시 그림, 노경아 / 어크로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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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제목은 '세상엔 알고 싶은 건축물이 너무도 많아'이지만 사실은 '서양엔 알고 싶은 건축물이 너무도 많아'이다. 원제는 '건축 용어 도감 서양편'이고 '서양편'이라는 제목대로 서양 건축사에 이름을 남긴 걸작 건축물들을 소개하는 책이니까. 아쉽지만 타지마할이나 아야 소피아, 앙코르 와트 같은 아시아의 건축물이나 테오티우아칸의 피라미드, 마추픽추 같은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건축물은 이 책에서 만나볼 수 없다. 그래도 괜찮은 번역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건축 용어 도감 서양편'보다는 '세상엔 알고 싶은 건축물이 너무도 많아'를 더 읽고 싶으니까(물론 취향에 따라 반대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부터 현대에 루브르 박물관에 설치된 유리 피라미드까지 69개의 서양 건축물을 65개의 꼭지를 통해 소개한다. 대부분의 경우 한 꼭지에 한 건축물을 다루는데 3~5페이지 정도의 분량에 그 건축물의 역사와 그 건축물이 속한 건축 사조, 그 건축물의 특징을 꽉꽉 채워 넣었다. '한 권으로 읽는 OO' 유의 책인데도 꽤 세세한 건축 사조까지 다루고 있다. 건축 양식과 건축물을 이루는 각각의 구조물, 그것을 가리키는 용어까지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경어체로 이야기를 하듯 설명해 더 부드럽고 친근하게 내용을 전달한다. '기독교는 일신교인 유대교의 교리를 이어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신으로 숭배합니다.(p. 44)'처럼 지나치게 뭉뚱그린 부분도 있고(기독교와 유대교에서 공통적으로 숭배하는 유일신은 여호와(야훼)이고,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 교리에 따라 예수를 성부(여호와), 성령과 일체로 보지만 유대교에서는 예수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미술사에서의 선후 관계를 잘못 설명한 부분도 있지만('...눈에 보이는 것을 자신의 감각으로 해석하여 표현하는 '회화 기법'은 피카소의 큐비즘에서 시작되어 인상파까지 이어집니다.(p. 211-212) 서양미술사에서 자신의 감각, 즉 '눈에 보이는 그대로' 해석하고 표현한 것의 시초는 19세기 후반의 인상파이고, 큐비즘은 피카소의 1907년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을 시초로 한다.) 건축뿐만 아니라 당대의 사회적, 종교적 배경과 건축사와 연관된 미술 사조까지 충실히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사진 대신 일러스트로 각 건축물의 설명을 보충하고 있다는 것이다. 건축물의 전경과 평면도, 독특한 특징이 드러나는 부분들을 일러스트로 그려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굵은 선으로 대략적인 특징을 알아보기 쉽게 그리고 노란색으로 포인트를 주는 일러스트라 본문에서 설명하는 특징들을 알아보기 쉽다. 다만 그 건축물을 더 자세히 보고 싶거나 특유의 색채(다채로운 색채가 특징인 건축물인 경우는 더더욱)를 보고 싶은 독자들로서는 사진을 넣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일러스트에는 이렇게 장단점이 함께 있다.



본문 뒤에는 서양사와 서양 건축사의 흐름을 대조한 연표와 각 건축물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가 부록으로 실려 있다. 서양사와 함께 서양 건축사가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 살펴볼 수 있어 유용하다. 지도에서는 이 책에 실린 서양 걸작 건축물들의 분포를 알 수 있다. 부록까지 공을 꽤 많이 들였다.


이 책에 실린 서양 건축 사조와 건축 용어가 제법 많아 한번에 기억할 수는 없겠지만, 서양 건축사의 흐름을 훑어보면서 각 시대와 사조를 대표했던 건축물로는 어떤 것이 있고, 그 건축물은 어떤 특징이 있는지 대략적으로 알아보는 데 좋다. 깊이 있게 건축사를 공부할 수 있는 책은 아니지만, (코로나가 지난 뒤) 여행을 가서 이 건축물은 어떤 역사적 상황에서 지어졌고 이런 특징이 있구나, 하고 더 유심히 들여다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니까. 교양을 쌓고 싶어 하는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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