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너무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면 진저리가 난다고 했던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는 말은 부작위(不作爲)를 의미한다. 실정법 상 유기죄는 대표적인 부작위범이다. 작위의무가 있음에도 능동적인 구호조치를 취하지 않는 행위를 벌하겠다는 법리다. 이것도 법적 안정성이라는 테두리 내에서만 가능한 일이겠으나 어찌 생각해보면 누구도 자유로울 순 없다.




내가 무진에 사는 자애학원의 천인공노할 일을 목도한 시민이었다면 어찌할 수 있었을까? 진실은 항상 불편하다는 작가의 말처럼 침묵으로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알 수 없는 논리로 넘어가야 할까? 아니면 농인들을 대변하던 강인호나 서유진 인권센터직원처럼 불의에 맞서 항거의 몸부림이라도 해야만 할까?




읽을수록 불편한 마음은 더부룩 답답하기만 하다. 명치 언저리 쯤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 딱 그 짝이다. 속 시원하게 활명수 한 병 들이킨다고 달라질까마는 그런다고 해결될 수 있음 정말 좋겠다. “잘못했다면 벌을 받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나서야 한다 그러나......“로 돌변하는 그 젊은 목사의 매캐한 말이 ‘진실이 덮이고 눈을 감는 것은 시간문제구나’하는 생각이 비단 이것만은 아니리라.




명백한 범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권력구조를 따져 보고 이권을 재는 것의 밑바탕은 이 사회가 윗대로 물려받은 요상한 대물림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라면 희망도 신념도 얼마쯤 뚝 떼어 나누어 팔 수 있겠다. 진실은 결코 개들에게 던져 줄 수 없다는 작가의 말도 이해 못하는바 아니나 이런 현실이라면 침묵하는 저들을 무엇으로 바꾸겠는가. 




제 아무리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 기본권과 존엄성의 가치가 단 일 그램의 오차범위 없이 모두에게 동일성을 부여한다고 할지라도 달라지지 않는 것은 바로 이 저주스런 한국식 온정주의에 물든 메커니즘이지 싶다. 이른바 힘의 불균형에서 오는 구조적 차별이자 모순이다.




작가가 강인호를 통해 보여준 소시민적 모습은 나를 보는 불편함이다. 권력을 향한 소리 없는 외침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공허함이다. 무진에 짙게 깔린 해무(海霧)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보지 못하는 그들과 무엇이 다를까? 신체의 장애가 아니라도 마음의 장애는 그 크기나 형태가 똑같다. 그것을 현상의 다름에서 오는 차별로 인식할 뿐 마음에서 오는 소리는 외면하기 때문이다. 침묵의 카르텔이 생산하는 눅진한 끈적거림은 원래부터라는 논리로 인정해 버린다.




자애학원의 농인들도 보편적 인간의 유전자구조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인면수심의 그들의 짐승만도 못한 행위를 버젓이 보고도 내버려 둔단 말인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인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분개하고 관심을 가지고 그러다 시간이라는 명약(?)이 우리를 서서히 가라앉게 만들고 타협하게 만들 것이니 말이다. ‘적당히’라는 그것으로 말이다.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메커니즘이 이런 것일까? 온정주의로 무장한 적당히 눈 감아 주는 것이 과연 미덕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서 드러난 구조적 모순은 한국 사회 전체의 문제이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치부를 드러내더라도 할퀴고 물어뜯는 야만성은 희망을 얼어붙게 만든다. 야비하다 못해 역겹기까지 하다. 가진 자들의 연대가 이토록 견고한 철옹성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것이라면 깨트리기 힘든 요새나 진배없다.




가진 자가 가진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에너지는, 가지지 못한 자가 그것을 빼앗고 싶어 하는 에너지의 두 배라고 한다. 가진 자는 가진 것의 쾌락과 가지지 못한 것의 공포를 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이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거짓말의 합창은 그러니까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어서 맑은 하늘에 천둥과 번개를 부를 정도의 힘을 충분히 가진 것 이었다.(p-246)


장애인들에 대한 차별과 인권침해는 명백한 사회적 부작위다. 장애와 비장애를 나누는 기초적인 기준부터 새롭게 바꾸고 개선해야 한다. 그들이 조금 불편한 신체적 특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 하나만으로 지금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방치된다는 것은 ‘더불어 사는 사회’의 참된 의미를 곡해한 처사다. 자연이 가진 놀라운 자정능력을 이제라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시스템의 문제가 아닌 인식의 문제며 포용의 요구다. 왜(Why)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How) 바꿀 것인가의 문제로 직시해야 한다.




높은 도덕적 연대의식은 공공의 선을 만드는 기준이 되며 이러한 작동원리는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순환하고 피돌기를 하게 만드는 버팀목이 된다. 저자의 사상적 맥락 또한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한 소시민적 변화를 희망한다. 비록 각색에 의해 한 꺼풀 낮춘 이야기로 탈바꿈 되어 아비규환의 세상이 <도가니>로 내려앉았으나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공지영작가의 평소 철학 그대로 담고자 한 것은 담고 버릴 것은 과감히 버렸기에 그저 독자들의 눈물샘이나 자극하자고 펜을 들진 않았으리라 본다.


분명 어떻게 받아 들일까하는 것은 읽는 사람의 자유의지다. 작가의 엔딩에 담긴 이 사회를 향한 거대한 바람처럼 나는 소망해 본다. 밀알처럼 키위 일궈낸 희망의 싹이 갈아엎은 대지 사이로 다시금 잎을 틔웠다는 바람처럼, 홀로 더불어 꿋꿋하게 살아가겠다는 홀더의 바람처럼 그렇게 모두 행복해지기를 말이다. 비록 세파에 시달리고 가난이라는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현실에 치이고 멍이 들더라도 희망만은 사라지지지 않는 그것으로 남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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