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노서아 가비, 커피를 아우르다.




노서아 가비. 러시안 커피란다. 커피를 지독히 사랑하면서도 러시아산 커피는 생소하다. 대개 에티오피아, 콜롬비아, 동티모르 産 커피는 익어도 여태껏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 제목에서부터 풍기는 궁금증의 유발은 커피처럼 짙고 그윽하기만 하다. 게다가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이야기라.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다. 김탁환 작가의 상상력은 기발하다 못해 시쳇말로 죽인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세상과 엮어 뭉개는 이야기는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자신을 스스로 스토리 디자이너로 명명한 정체성과 글발의 화수분은 부럽기 그지없다. 무엇보다 시시콜콜하게 풀어 쓰지도 나열하지도 않고도 자유자재로 상황을 지배하는 필력은 압권이다. 그래서 예의 어색함도 없으며 자연스럽게 사건을 따라 움직이는 이야기의 행방에 어지러움도 없다. 그런데도 이야기의 정점은 첨예하게 얽히고 대립한다. 식상할 법한 이야기도 그의 손을 거치면 새롭게 보이게 하는 마이다스의 손처럼 희한한 능력을 가진 것일까 하는 착각마저 인다. 지나친 과찬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흠모할 능력임에는 틀림없다.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 따냐.




이야기는 구한말을 배경으로 거침없이 내달린다. 신문물이 홍수처럼 쏟아지던 그 시절, 새로운 세상과의 조우는 미처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에 충분하다. 열강의 틈바구니에 끼어 자주성을 상실한 조선의 암울한 운명을 담보로 뽑아 낸 추출물은 커피가 품은 본래의 그것, 검은 색과 동색일지 모른다. 그래도 커피와 조선은 좀처럼 어울리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것도 뻬쩨르부르크에서 날아 온 생경한 커피이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저자는 단숨에 들이키듯 조금의 음미할 여유도 허락지 않고 커피로부터 걷어 올린 진한 향을 쏘아 올리기에 정열을 다한다. 자유를 갈구한 보헤미안처럼.

이 책의 두 주인공 따냐와 이안은 노마드적인 삶을 산다. 조선이 가진 보수적 이미지와는 파격적인 변신이다. 우선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가 여자라는 것도 그렇고 신분의 벽을 파괴한 것에서부터의 출발도 그렇고 세계를 무대로 영혼을 내맡기는 스케일이 웅장함이 그렇다. 기존의 역사소설과는 그 궤를 견주려도 견줄 수가 없다. 실제와 상상이 혼합된 거침없는 배합은 새로운 농도로 재탄생하여 유혹적인 맛을 생산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방커피도, 카페라떼도, 에스프레소도 아닌 전혀 색다른 커피 맛이 난다. 바로 사랑으로 녹여진 자유를 닮은 강렬한 맛이리라.

역사를 뒤흔든 유쾌한 사기극

구한말 조선의 왕, 고종은 우유부단함이 그림자처럼 따라 붙는다. 외세의 억압에 굴복당하고 치욕의 대표적인 왕으로 그려지기 십상이다. 이런 고종을 중심으로 이 책의 주인공과 얽히고설킨다는 설정은 일종의 나약함을 씻는 정화로부터의 소망이다. 당시 열강이었던 러시아를 무대로 호쾌한 사기극이 통하고 대륙을 호령하는 그들을 통해 전달되는 생생함은 짜릿함마저 배어나게 한다. 어찌 봉이 김 선달을 모를 수 있겠는가? 세련되고 통 커진 19세기 판 신 김 선달이 바로 그들이다.

그래서 일까? 미장센이 화려했던 김지운 감독의 영화 <놈, 놈, 놈>의 그것과 닮았다. 시대적 배경도 엇비슷해서 상상의 밭이 그쪽으로 기우는 것도 한 몫 하겠다. 만주 벌판을 휘젓던 그들과 동토의 자작나무 숲을 무대를 가로지르던 주인공들과 오버랩 되는 것은 자연스러움이 주는 현상이 아닐까? 이 책이 독자들에게 빛을 보기도 전에 영화화 되었다는 것도 그런 방증이겠다. 여기에 돈에 얽힌 기상천외함이 감칠맛을 더하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또한 치밀한 고증과 수집을 통해 파헤친 역사의 흔적과 상식을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이 가진 강점이다.

사랑, 자유에 담긴 커피의 매혹적인 유혹

작가 김탁환은 타냐를 통해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현란한 모습을 펼쳤다. 거짓과 진실 사이를 교묘하게 오고가는 질펀한 심리묘사를 통해 인간 본성의 이면을 내밀하게 보듬었다. 타냐는 신세대 여성이며 개화된 인물이다. 압제와 억압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로 어디에고 속박당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유를 찾아 떠나는 저공비행을 끊임없이 재촉한 캐릭터다. 그러나 타냐가 욕망과 탐욕으로부터 오는 유혹에 철저하게 냉정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은 사랑이다.

사랑이 위대함을 다시 일러 무엇하랴마는 작가가 보여 준 속내는 페미니즘적인 요소가 다분히 포함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이러한 관점은 양비론적인 새로움이다. 타냐의 캐릭터가 계급, 신분, 지위를 뛰어 넘는 초월적 탄생도 시대가 낳았다는 설정보다 작가의 상상이 만든 산물에 가깝다. 희망이 되었든 소망이 되었든 수평적 시선처리를 통해 우리는 모종의 쾌감을 동시에 받기 때문이다. 마치 갓 볶은 커피의 그윽함에서 바리스타의 농염한 기교와 자연이 만든 매혹적인 그 순수한 매혹적인 맛처럼 말이다.

이래저래 이 책은 단숨에 마셔진다. 뜨거움을 느낄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다. 혼란한 압록강 국경지대가 펼쳐지다가도 러시아공사관으로, 뻬쩨르부르크로, 뉴욕으로 막힘없이 날아오른다. 살아 내기를 위선으로부터 경계하는 사기꾼의 삶일지라도 타냐와 이안의 숨 막히는 사랑은 정열적이다. 아울러 고종의 보일 듯 말 듯 내비친 타냐와의 연정이 은밀한 삼각관계의 줄타기를 보는 즐거움도 있다. 이처럼 노서아 가비는 시대를 잊게 만드는 어울리지 않는 세계를 제법 어울리게 만든 잘 만든 이야기다. 어느새 끝나 버린 이야기에 언제 있을지 모를 시즌2라도 기대하게 만드는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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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1 21: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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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2 0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