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 사진: UnsplashMarten Bjork


'지도로 읽는다 한눈에 꿰뚫는 중동과 이슬람 상식도감'(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안혜은 옮김)의 '10장 · 석유 분쟁과 중동의 민주화' 중 '레바논 내전–종교 갈등과 주변국 개입, 레바논 전역이 초토화'를 읽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론파 [Maronites] (종교학대사전, 1998. 8. 20.)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29121&cid=50766&categoryId=50794

고대 페니키아를 계승한 레바논은 1944년 프랑스 지배로부터 독립을 이루었다. 수도 베이루트는 일찍 서구화의 길을 걸으며 중동의 금융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인구 400만의 소국 레바논은 기독교 4종파, 이슬람교 3종파로 이루어진 종교적 모자이크 국가이다.

1930년대 이후 대통령은 마론파 기독교도, 총리는 수니파, 국회의장은 시아파, 부총리와 국회 부의장은 그리스정교도를 임명한다는 관행에 따라 간신히 정치적 안정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실제로는 다수파를 차지한 기독교도가 대부분의 특권을 누리며 경제를 좌우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이슬람교도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양측의 대립이 고조되었다.

PLO가 요르단에서 쫓겨나 레바논으로 근거지를 옮기자, 유혈 사태를 우려한 레바논 정부는 PLO에 자치정부나 다름없는 특권을 주고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묵인했다.

그러나 1975년 베이루트 외곽에서 마론파 민병대가 팔레스타인인들이 탄 버스를 공격해 이슬람교도 27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후 해묵은 갈등이 폭발하며 전국으로 내전이 확산되었다.

시리아는 당초 이슬람 측에 서서 참전했으나, 나중에는 레바논의 종파 균형을 깨지 않기 위해 마론파 측으로 돌아섰다.

무력 투쟁이 계속되자 1982년 이후 이스라엘이 참전해서 레바논 남부 베이루트를 침공했다. 이스라엘은 PLO를 레바논에서 철수시키고 마론파의 주도 아래 친이스라엘 정권을 수립하려 했다. 하지만 시리아의 지원을 얻은 이슬람교도와 이란의 지원을 얻은 시아파 민병 조직 헤즈볼라가 이스라엘군과 치열한 전투를 이어가며 내전은 장기화에 돌입했다.

이스라엘, 시리아, PLO 등이 개입한 15년간의 내전으로 레바논의 관광업, 금융업이 거의 붕괴되다시피 했고, 중동의 파리라 불리던 수도 베이루트는 물론 레바논 전역이 초토화된다.

내전 후 시리아군 약 3만 명이 주둔하며 레바논 정부를 조종했으나, 2005년 하리리 전 총리가 암살되자 미국 등이 시리아군 철수를 종용해 2005년에는 정보기관을 포함한 전 시리아군이 레바논에서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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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로운 고요' 이어가던 헤즈볼라, 임시 휴전 이튿날 이스라엘 공습 2023. 11. 25.]https://v.daum.net/v/20231125145044250 이 기사를 읽고 레바논에 관한 책을 찾아 보았다. '촘스키, 고뇌의 땅 레바논에 서다'에 실린 노엄 촘스키의 글을 읽고 발췌한다.


[헤즈볼라 "이스라엘과 전면전도 가능" (2023.11.04/뉴스투데이/MBC)]


- 이 글은 베이루트에 본부를 둔 문화·정치 계간지, 《알 아답》 2006년 7-8-9월 호에 아랍어로 실린 것이다. 《알 아답》의 편집장 사마 이드리스의 청탁을 받아 쓴 글로, 영어판은 2006년 8월과 9월에 ‘지넷Znet’을 비롯한 여러 웹사이트에 게시되었다.

많은 복합적인 요인이 있지만, 최근에 시도된 미국과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에 관련된 현안 문제는 과거 네 번의 침략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이 주된 원인이다. 특히 1982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은 이스라엘에서는 서안 지구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공공연히 얘기됐다.

파멸에 직면한 팔레스타인 국민이 유일하게 의지할 곳은 헤즈볼라뿐이다. 이런 이유만으로도 헤즈볼라는 당연히 분쇄하고 힘을 빼놓아야 할 적이다. PLO가 1982년 레바논에서 쫓겨날 때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헤즈볼라는 레바논 사회에 완전히 뿌리내려 절멸시키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레바논 자체를 파괴해버려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그렇게 레바논에 근거를 둔 방해 세력을 제거할 때 미국과 이스라엘이 얻는 이익은 이란에 대한 위협의 강도를 더욱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2006년 7월의 레바논 침략은 국경 부근에서 이스라엘 군인 둘이 피랍된 사건에 대한 이스라엘의 정당한 보복이라는 게 서구 사회의 일반적인 해석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기만에 불과하다. 미국과 이스라엘 및 서구 국가들은 레바논 군인의 피랍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심지어 민간인을 납치하고 민간인을 학살하는 훨씬 중대한 범죄에도 함구한다. 이스라엘은 레바논에서 오랫동안 그런 짓을 자행했지만, 누구도 이스라엘을 침략해서 대대적으로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만약 그 범죄가 이스라엘을 향한 살인적 공격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누군가 주장했다면, 그런 생각은 나치즘의 부활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런 차이는 역사적으로 흔히 있던 일이다. 투키디데스의 교훈을 쉽게 바꿔 말하면, "강한 나라는 뭐든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지만, 약한 나라는 고통 받아야 하기 때문에 고통 받는 것이다." - 7. 미국과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략에 대하여 | 노엄 촘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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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하는 습관'(메이슨 커리)의 니키 드 생팔 편으로부터 발췌했다.


Pixabay로부터 입수된 M W님의 이미지 2012년 12월 30일 게시 

Pixabay로부터 입수된 94451님의 이미지 2013년 11월 30일 게시


Pixabay로부터 입수된 sinepax님의 이미지 2018년 9월 14일 게시


위 사진들은 공유사이트에서 구한 여성 예술가 니키 드 생팔의 타로 공원이다.*타로공원 https://ilgiardinodeitarocchi.it/en/


[총으로 불행을 쏘다…佛작가 니키 드 생팔]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23080337811


예술적 모험을 시작한 지 겨우 2년 만에 생팔은 ‘사격회화’로 유명해졌다. 사격회화는 페인트 주머니나 통을 모아서 붙여놓고 엽총과 권총, 혹은 소형 대포로 쏘아 물감을 튀겨서 작품을 창작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생팔은 주로 조각가로 일하기 시작했고, 1978년에는 타로 공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타로 공원은 생팔이 20년에 걸쳐서 토스카나에 조성한 기념비적인 조각 공원이다. 생팔은 그 공원에서 가장 큰 조각품인 집 한 채 크기의 여성 조각상을 완성한 후, 조각상의 가슴 한쪽은 침실로, 다른 한쪽은 부엌으로 바꾸었다(두 개밖에 없는 창문은 조각상의 유두 부분에 만들었다). "전 수도승 같은 삶을 즐겼지만 그게 항상 즐겁지는 않았어요." 훗날 생팔은 조각상 앞에서 생활했던 7년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바닥에 커다란 구덩이가 있어서 거기에 식료품들을 보관했어요. 후덥지근한 밤마다 잠에서 깨어나 보면 습지에서 날아 들어온 벌레들이 떼를 지어 주변에서 윙윙거렸어요. 마치 어린 아이의 악몽에 나오는 것처럼 말이죠."

생팔의 부유한 친구들이 타로 공원 부지를 제공해주었지만 그 건축물을 유지하는 것은 언제나 힘든 투쟁이었다. 그래서 생팔은 향수를 판매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다.

"열정은 바이러스예요. 제가 아주 쉽게 퍼뜨릴 수 있는 바이러스죠. 열정이 있으면 아무리 어려워도 제가 원하는 걸 무엇이든 할 수 있거든요."

니키 드 생팔Niki de Saint Phalle(1930~2002) 프랑스의 신사실주의 조각가. 1961년 전시장에서 관객에게 총으로 캔버스 위에 매단 물감 주머니를 쏘게 하여 무작위적인 추상화를 연출하는 ‘슈팅 페인팅‘ 작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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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아이레스 : 남미의 파리'(고부안 지음) 중 오벨리스크에 관한 부분이다.


2022 월드컵 아르헨티나 우승 당시 인파로 가득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오벨리스크를 볼 수 있다.

 

[오벨리스크 광장에 모인 아르헨 축구 팬들] https://v.daum.net/v/KIIMFp3oav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가장 상징적인 거리 중의 하나가 ‘7월 9일 가’일 것이다. 이 길과 꼬리엔떼스 가가 만나는 지점에 오벨리스끄가 있기 때문이다. 폭이 140m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길로 여겨지고 있는 이 대로는 1911년 알베아르(Carlos María de Alvear) 대통령이 제안하고 의회가 동의해 건설하게 되었다.

이 7월 9일 가가 건설되기 위해서는 1,000개의 만사나(1만사나=100m×100m) 위에 있던 집들이 모두 헐려야 했다. 프랑스의 건축가인 챨스 타이즈(Charles Thays)가 1887년에 디자인한 이 대로가 완성되는 데까지는 근 100년이 걸렸다.

세계에서 최고로 넓다는 이 길 위에 있는 67.5m 높이의 오벨리스끄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상징물이 되어온 기념탑이다. 이것은 1936년 5월에 건축가 알베르또 쁘레비치(Alberto Prebisch)가 부에노스아이레스 시 건설 400주년 기념물로 만든 것이다. 이것이 건설되었을 때는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이런 상징물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이미지를 얼마나 높이게 될 지를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의 비판이었다. 오벨리스끄는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 그 내부에는 200개의 계단이 있고 꼭대기에는 작은 창이 하나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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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 폭파..페소 없애고 달러!"극우 대통령 등장에 '발칵' (2023.11.20 /MBC뉴스)


'부에노스아이레스 : 남미의 파리'(고부안 지음) 중 '역사 속에 선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아래 글의 출처이다. 


[부자나라의 몰락 / 참고도서 ‘역설과 반전의 대륙’https://xn--s39ao3hz3kevg82f.com/notice/670


아르헨티나라는 국가 이름은 ‘은’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아르헨툼(Argentum)에서 유래된 말이다. 아르헨티나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시인 마르띤 엘 바르꼬 쎈뗴네라(1535~ 1602)로 스페인 엑스뜨레마두라에서 태어나서 남아메리카의 식민개척에 적극 참가했던 인물이다. 그는 『아르헨티나와 리오 데 라 쁠라따의 정복』이라는 작품에서 이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처음 아르헨티나에 엄청난 양의 은이 있다는 설이 있고 나서 ‘은의 땅(La Argentina)’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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