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 폭파..페소 없애고 달러!"극우 대통령 등장에 '발칵' (2023.11.20 /MBC뉴스)


'부에노스아이레스 : 남미의 파리'(고부안 지음) 중 '역사 속에 선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아래 글의 출처이다. 


[부자나라의 몰락 / 참고도서 ‘역설과 반전의 대륙’https://xn--s39ao3hz3kevg82f.com/notice/670


아르헨티나라는 국가 이름은 ‘은’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아르헨툼(Argentum)에서 유래된 말이다. 아르헨티나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시인 마르띤 엘 바르꼬 쎈뗴네라(1535~ 1602)로 스페인 엑스뜨레마두라에서 태어나서 남아메리카의 식민개척에 적극 참가했던 인물이다. 그는 『아르헨티나와 리오 데 라 쁠라따의 정복』이라는 작품에서 이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처음 아르헨티나에 엄청난 양의 은이 있다는 설이 있고 나서 ‘은의 땅(La Argentina)’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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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지식총서 '부에노스아이레스 : 남미의 파리'(고부안 지음) 중 '문학으로 보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부터 옮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2020년5월-사진: UnsplashNestor Barbitta



파블로 네루다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03n3929a 네루다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칠레 영사를 지냈다.

1983년 아르헨티나에 민주 정부가 들어선다. 급진당의 알폰신 대통령이 취임을 했다. 군부 시대에 금지되었던 젊음의 파티가 허용되었다.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음악가와 가수들이 루나 파크에 모였다. 이렇게 모일 수 있는 즐거움을 노래하기 위해 시가 읊어졌는데, 그 시는 이러했다.

나는 죽어있다. 나는 살해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다시 한번 살 것이다.
왜냐하면 태양이 떴으니까.

이것이 파블로 네루다의 시이다. 칠레 피노체트 독재정권의 희생물이었던 저항적 시인 네루다의 시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높게 외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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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겔 - 서재를 떠나보내다 / 도플갱어

아래 글의 출처는 알베르토 망겔의 '서재를 떠나보내다'이다. 망겔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국립도서관장을 지냈다. 

국립도서관(부에노스아이레스) By Gobierno de la Ciudad Autónoma de Buenos Aires, CC BY 2.5 ar, 위키미디어커먼즈(2013년10월 사진)

구 도서관 건물 By loco085, CC BY-SA 2.0, 위키미디어커먼즈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돌아온 부에노스아이레스는 꿈속에서 본 장소 같았다. 도시의 특징들은 낯익지만 그 거리 속으로 들어가려 하면 자꾸 변하면서 멀찍이 달아나는 듯한 도시.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책을 좋아하는 그 도시의 특징은 바뀌지 않았다. 내가 방과 후 하굣길에 들르곤 했던 서점과 책 가판대들은 상당수 사라졌지만 그래도 몇몇은 아직 남아 있었고, 다른 새로운 서점들이 생겨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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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재가 있는 삶
    from 에그몬트 서곡 2023-11-25 10:50 
    보르헤스와의 인연으로 유명해진 독서가이자 작가인 알베르토 망겔의 책이다. '서재'로 검색하다 만난 책. 그냥 좀 밍밍해서 얼른 읽어 버렸는데 다 끝나니 묘한 아쉬움 비슷한 감정에 싸여 아무데나 펼쳐 또 읽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다. 책을 다 싸고 서재를 비우기 직전이 이럴까? 이 책은 나중에 싸 주세요, 저 책은 가장 마지막에 싸 주시면 안 될까요? 요 책은 ....... 이런 식으로 끝 없이 이어지는 책의 행렬들. 이 책을 쓸 당시 망겔은 아르헨티나
 
 
 

'디코딩 라틴아메리카'의 'Code 16. 아르헨티나 근대화의 뒤안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기와 탱고의 사회학'로부터 가져왔다.



Mi Buenos Aires Querido · Carlos Gardel


전성기 시절에는 아르헨티나인들의 자부심도 대단해서 아르헨티나가 미국 같은 나라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유럽 문화를 갈망했다. 아르헨티나의 유일한 콤플렉스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나라가 ‘역사 없는 나라’, ‘문화 없는 나라’라는 것이었다. 얼마나 유럽 문화를 동경했는지, 유럽의 문화 수도 혹은 예술 수도라고 일컬었던 파리의 도시계획을 그대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적용하기도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남미의 파리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1910년부터 1916년까지 무려 6년에 걸쳐 각종 독립 100주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치르면서 아르헨티나 사람들, 특히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의 자부심은 점점 높아졌다. 파리보다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이들까지 생겨났을 정도였다. 자부심의 일단은 몰라보게 달라진 도시경관에서 비롯되었다. 프랑스의 소설가 앙드레 말로는 젊은 시절인 1923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의 눈에도 이 도시는 "존재하지 않았던 제국의 수도"였다. 세계적인 대문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시집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기El ferver de Buenos Aires』(1923)나 전설적인 탱고 가수 카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의 <내 사랑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Mi Buenos Aires Querido>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대한 이러한 자부심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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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2017년5월 - 사진: UnsplashSasha • Stories


라틴아메리카 연구서 '디코딩 라틴아메리카'의 'Part 2. 라틴아메리카 깊게 읽기' 중 아르헨티나 편을 읽었다.

사진: UnsplashJuan Cruz Mountford


아르헨티나는 식민시대에는 변방이었다. 스페인의 식민통치가 거의 끝나가는 1776년에야 상업적인 중요성을 어느 정도 인정받아 멕시코, 페루, 콜롬비아 지역에 이어 네 번째로 부왕령으로 승격되었을 뿐이다. 또 19세기 초 독립 이후에도 아르헨티나는 오랫동안 그다지 중요한 나라가 아니었다.

아르헨티나의 전성기는 1880년대에 시작되어 20~30년 정도 지속된다. 이 전성기를 이끈 세대가 속칭 1880세대이다. 아르헨티나가 1950년대에는 세계 5위 내지 7위의 부국이었다는 이야기가 마치 전설처럼 회자되지만, 사실 그때는 이미 전성기가 한참 지난 다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 상위권에 위치할 정도로 부국이었으니 전성기 때 아르헨티나의 부는 대단했을 것이다.

1870년대 하나의 ‘사소한’ 발명과 또 하나의 ‘굉장한’ 발명이 아르헨티나의 국운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사소한’ 발명품은 가시철조망이다. 미국의 한 목장에서 어떤 사람이 그냥 밋밋한 철조망을 쳐두니까 자꾸 가축이 도망가서 골머리를 앓다가 아이디어를 내어 만든 것이 가시철조망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1870년대에 가시철조망이 도입되면서 아르헨티나에서 대규모 목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굉장한’ 발명이란 냉동 설비이다. 이 발명 덕분에 아르헨티나는 쇠가죽이나 육포 대신 쇠고기를 유럽에 대량 수출하게 되었다. 1880년대에 개막된 아르헨티나의 전성기는 이 두 가지 발명으로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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